posted by 치운 2013. 11. 9. 11:40

홍산(紅山)문화의 후예: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꽃잎.낙엽 퍼옴 lczhu77@hotmail.com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 만주『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요서의 신석기 홍산(紅山, 4000-3000 BC)문화를 공유하고,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알타이계통 언어권의 홍산문화는 한장(漢藏) 언어권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은 고대 연(燕, 1027-222 BC)나라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夏家店)하층(下層) 문화(2000-1500 BC)에서 찾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같은 지역의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 출현한 유목문화가 전파되면서, 하층문화가 본격적 청동기인 상층문화 형태로 전환되었다.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요하 유역에 이르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융합했고, 한반도로 전파되면서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역에 청동기시대를 전개했다. 기원전 400년경, 연나라는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전파했다. Janhunen은 연나라가 애당초 (漢族의) 중국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Di Cosmo는 소위 연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한족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사기(史記)는, 서주의 무왕(武王)이 소공(召公)을 북연(北燕)에 봉해주었다며, 남연(南燕)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걸쳐 등장한 전연(前燕), 후연, 서연, 남연, 북연 중 유독 「북연」만을 한족(漢族 馮氏)이 세웠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용 선비(慕容 鮮卑)족이 세웠다. 홍산-하가점 문화를 이어 받은 연나라는 소공의 북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 연나라의 성격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 1. Barnes (1993: 135)
 
홍산문화와 『선비-퉁구스』 원시 알타이 언어 공동체

정복왕조의 본고장 만주


洪 元 卓 (서울대 교수)

흉노족의 본고장인 몽골 초원

몽골초원은, 돌궐(터키)족의 선조이며 아마도 몽골족의 선조일 가능성도 있는 흉노의 본고장이다. Fagan (2004: 201)은 “초원지대는 마치 펌프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비가 충분히 올 때는 목초와 가축들이 잘 자라 유목민들을 흡수하지만,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유목민들을 주변지역이나, 이웃나라로 내몰게 된다. 기원전 9세기경, 초원지대의 기후가 갑자기 춥고 건조해졌는데, 몽골고원의 목초지가 제일 먼저 이러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8세기경, 가뭄이 초원지역 유목민들을 중국대륙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한족에게 격퇴되었고, 연쇄반응적인 민족이동이 일어나, 일부 기마(騎馬)유목민들은 당시 켈트족 세상이었던 유럽의 동부 변경인 다뉴브강 유역에까지 몰려가게 되었다.” 1

몽골고원은 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반부를 구성하며, 만주의 서쪽 경계로부터 시작하는 초원은 군데군데 높은 산들에 의해 단절이 되기도 하면서 헝가리 평원에까지 도달한다. 언뜻 보면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이 서로 만나서 유라시아 대초원을 절단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가타이의 이밀강(江) 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초원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산산맥의 북쪽 끝자락과 타르바가타이 준령 사이의 중가르 관문은 카자크 초원지대로 통하는 중앙아시아의 최남단 통로이다. 알타이산과 타르바가타이 사이의 이르티쉬 계곡 역시 서쪽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몽골고원의 돌궐-몽골 기병들은, 바이칼호(湖)로 흘러 들어가는 오르콘 강둑에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초원을 거쳐, 헝가리 평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달려갈 수 있었다. 이 초원의 통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밀고원을 넘어가는 천산산맥 남쪽의 실크로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교통로 이었던 것이다.
 
발카쉬호(湖) 서쪽의 (터어키쉬) 초원지대는 평균 고도가 해수면에 가깝지만, 몽골 초원은 평균 해발 1500미터로, 한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가고 한 겨울에는 영하 42도까지 내려간다. 고비는 건조한 초원지대로, 내몽골과 외몽골을 가른다. 북쪽의 목초지는 바이칼호와 흑룡강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들의 유역과 알타이산맥의 동쪽 경사지로 구성되어있다. 알타이지역은 여름의 한낮에는 섭씨 40도를 상회하며, 일조량이 18시간에 달한다. 바이칼호 주변지역은 몽골 초원지대가 시베리아 삼림지역으로 바뀌는 접경지대에 해당된다. 황하(黃河)에 의해 말편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오르도스 평원에 접하면서, 남쪽의 대마군산(大馬群山), 서쪽의 만주 등을 경계로 하는 내몽골도 수많은 유목민들을 부양하였다. 2 돌궐-몽골 족들은 양고기를 주식으로 했고, 염소, 낙타, 소, 말, 등을 길렀다.

    
 
▲ 2. Barnes (1993: 109)
 
선비-퉁구스 족의 본고장인 만주대륙

만주는, 북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남으로는 칠노도(七老圖)-연산(燕山) 산맥 등을 경계로, 몽골초원과 분리된다. 샤라무렌강(西拉木倫)-노합하(老哈河) 유역으로부터 서요하(西遼河) 유역에 걸쳐 만주 서부의 목초지대가 펼쳐지는데, 이 지역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기슭과 눌루얼후(努魯兒虎) 산맥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여기가 바로 동후(東胡)라 칭하는 선비족의 본고장인데, 문화적으로는 몽골에 가까웠다.

송화강 유역의 평원지대는, 동쪽의 울창한 삼림을 보면서 시베리아 끝자락으로부터 한반도 북변 산악지대까지 내려가는 도중, 남서쪽의 요하(遼河)유역 평원과 연결되어, 소위 동북평원을 형성한다. 만주의 중부 평야와 동부 산림지역에 살던 이른바 동이(東夷)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돌궐말로 돼지를 “통구즈”라 부른다는 사실을 근거로 “퉁구스”의 어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Janhunen(1996: 221)에 의하면, 이는 언어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접근방법이다.

홍산문화-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문화- 하가점 상층문화

신석기 홍산(紅山)문화(4000-3000 BC)의 유적은 요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3 홍산문화는 황하(黃河)중류-위수(渭水) 유역의 앙소(仰韶)문화와, 황하 하류 유역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킨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들이 이룩한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유물로는 각종 의례용 도구를 포함하여, 점토로 빚은 인체조형물, 옥으로 만든 동물형상, 염료를 칠한 통형관(筒型管) 등이 발견되었고,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전통과 양과 돼지를 포함해 가축들을 길렀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竪穴式) 움집과 함께 저장고, 불을 때는 화로 등도 발견되며, “Z”자 모양의 문양, 빗살 문양, 칼끝으로 판 문양으로 장식된 적색 혹은 회색의 (회전판 위에서 완성된) 사질성(沙質性) 토기와 채색토기 및 토기제조용 가마, 수수를 수확할 때 쓰는 조개로 만든 칼 등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과 제사를 행했던 공공건물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를 보면 사회적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중국본토 문화유적의 조각품들을 보면 다분히 추상적으로 정형화 되었지만, 홍산문화의 조각품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 모양을 하고 있다.

홍산문화는 즐문(櫛紋)-인각(印刻)문 토기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반지, 칼, 손잡이 등과 같이 소형 동제품을 사용하는 초기 청동기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로 이어진다. 4 Barnes(1993: 109)에 의하면,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 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고, 사슴을 사냥하며 살았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 Nelson, 1995: 148-9)은 옛 연나라 (燕, c. 1027?-222 BC)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찾았으며, 궁극적으로는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곽대순(1995: 179)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나라 문화를 일으켰고, 일부는 그 자리에 남아 연나라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를 (서주-동주 시대) 연(燕)문화의 전 단계로 이해한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 2. Pottery with Incised Designs
excavated at Xin-le 新樂
 
곽대순(1995: 178)에 의하면, 연나라 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 사이에는 과도기적인 연계성이 존재한다. 하가점 하층의 채색토기에 그려진 동물 가면 문양은, 그 출현시점이 매우 이르고, 상당히 발전된 형태이었다. 상(商)나라 도철(??-전설상의 흉악하고 탐식하는 야수) 문양의 근원이 된 이 괴물 문양의 전통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00년경까지, 연나라에 존속 되었었다고 말한다. 곽대순은, 서주(西周, 1122-771 BC)시대의 연나라는, 주나라와는 크게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신탁(神託) 갑골(甲骨)에 이미 연(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시 연나라는 상(商, 1766-1122 BC)나라 때 이미 존재해 있었고, 그 문화적 전통이 서주 시대의 연나라에 이어져 보존되었다고 주장한다.

    
 
▲ 3. Sherds of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from the Han River Basin Area (Am-sa-dong)
 
유목민 생활 형태는 기원전 1000년경 알타이와 천산 산맥 주변지역에서 출현하여 소위 알타익-스키타이 시대를 전개했다. 스키토-사이베리안 사람들의 초기 유목문화는, 특히 기원전 6세기 이후에는, 장례 때 매장된 청동과 철제 무기류, 기마용 도구, 동물 형상의 공예품, 금과 보석 등 부장품의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몽골고원 초원지대로부터 새로운 유목문화의 도래는, 기원전 3세기경,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스키토-사이베리안과 전혀 다른 집단인 흉노제국의 팽창과 함께 일어난다. 5

Barnes(1993: 157-8)는, 하가점 상층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려 넣은 동제품이 (비록 기마전투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이지만) 동아시아에서의 기마전통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이라고 말한다. 6 Barnes는 하가점 상층문화 발생시기를 전후로 유목문화가 등장했고, 이 새로 생긴 유목문화의 전파가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를 상층문화(1100-300 BC)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 3. Sherds of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from the Han River Basin Area (Am-sa-dong)
 
Barnes(1993: 153)는, 홍산문화 시대에 이미 그 흔적을 보인 청동기는, 같은 지역의 하가점 상층문화 시기에 와서 아주 본격적으로 다양한 품목들을 보여주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의 스키타이 유물과 유사한 동물문양의 청동제품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하가점 상층문화는 유라시안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유목민들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 상층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되면서 기원전 700년경부터 한반도에 본격적 청동기시대를 연 것으로 보았다. Barnes는 또, 고대 연나라가 남부만주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문화적으로 융합했고, 기원전 400년경에 한반도에 철기시대를 전개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빗살-민무늬 토기, 비파형-세형 동검, 북방형-남방형 고인돌

기원전 1300년경 까지는 요동과 요서 지역의 청동검들이 칼날과 손잡이가 분명하게 분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7 그러나 하가점 상층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파형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동검과 달리,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되었다. 한반도의 비파형 동검은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유래하며, 후에 세형동검으로 바뀌어 철기시대 초까지 사용된다. 하가점 상층에서는 하층과 달리 민무늬 토기가 발견된다. 8 한바도를 비롯한 만주의 여타 지역에서는 민무늬 토기가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용이 되었는데, 하가점 상층문화는 뒤늦게 (곽대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하 유역방향으로부터 민무늬 토기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다. 9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체를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특이한 유물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요동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길림성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밀집된 형태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지역은 한반도이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시대 말기쯤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말기쯤 나타난 것 같으나, 이 두 형태의 고인돌은 그 분포지역이 상당히 중복된다. 고인돌의 축조는 기원전 300년경에 중단된 것으로 생각된다.10

돌을 사용하는 매장 방법, 토기의 형태, 청동제품 등의 유사성은 만주를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으로 연결시킨다. Di Cosmo(2002: 67)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으로부터 상층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실상은 하가점 상층문화와 북쪽의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 사이의 연관성이 완전히 구명될 때까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흑룡강, 눈(嫩)강, 송화강, 요하 등을 연결하는 만주대륙의 물길(水路)이 이들 전 지역에 철 제조 확산 과정을 포함하는 천연의 교통로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Nelson(1995: 252, 14)에 의하면, 동북지역에서 청동 제품이 상당히 일찍 발견되는데, 특히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 제품들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상나라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조차도 동북지역의 문화를 중원문화의 어설프고 야만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Nelson은 홍산문화는 중원의 문화와 분명히 다르며, 단지 그들이 문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중원문화에 결코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소공(召公)의 북연(北燕, 1027 BC), 한족(漢族 馮氏)의 북연(409-36), 선비족(慕容 鮮卑)의 남연(南燕)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武王)은 소공에게 북연(北燕)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봉해주었고 (c. 1027-1025 BC), 그가 연 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각주(註)에는, 이 봉토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연나라, 즉, 남연(南燕)이 존재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소공의 연나라 수도는 오늘날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연나라가 진시황제에게 멸망되기 90년 전인 기원전 311년, 연은 진개(秦開)를 시켜 동호(東胡=鮮卑)를 공격하고, 동북방으로 영역을 대폭 넓혔다 한다. 12 한 고조(r. 206-195 BC)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노관을 연왕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후에 흉노한테 도피를 했고, 흉노는 그를 동호왕으로 임명했다. 연나라에 관한 기록에 “동호”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사기 각주에 나타난 남연이라는 존재, 후세에 선비족들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국명을 “연”이라 부른 사실, 한족들한테는 모반을 한 자들로 보이는 공손연 (237년), 안록산 (756년), 사사명 (759년) 등이 한족과 차별성을 내세울 때 자신들을 연왕이라고 불렀던 사실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Janhunen(1996: 224)은, 고대의 연나라는 애당초 중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원시 투르코-몽골족이 바로 초창기의 연나라를 구성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구사하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모두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옛 전통을 공유하며 홍산문화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한족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말 한다면, 선비-퉁구스족은 홍산문화의 후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13 중국대륙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른, 요서의 신석기 홍산문화 유산의 상속-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범“선비-퉁구스” 계통의 역사-문화 공동체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5 (2005. 1. 22.)
정리: 강현사 박사
 
 

posted by 치운 2013. 11. 9. 11:38

1.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이집트의 나일강, 바빌로니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인디아의 갠지스강, 중국의 황하 등의 유역에서 문명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므로 그 피해를 막기 위하여 통치자는 이것을 정확히 예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정기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하늘을 관찰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이집트인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에 이미 1년이 365일과 1/4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당시의 지배자는 국민이 입은 피해의 정도에 맞추어 그 세금을 절감해야 했으므로 이로 인하여 수의 계산기술도 상당히 진보되었다고 한다. 초기 수학은 농업, 토목, 건축과 같은 일에 필요한 실용적인 과학으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의 과학과 수학에 대한 상당한 양의 지식이 오늘까지 전해지나 중국이나 인도의 연구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중국인과 인도인은 썩기쉬운 재료를 사용했으나 바빌로니아 인은 그들의 문자를 점토판에 적어 햇빛에 말려서 사용하여 지금까지 점토판이 많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곱셈표, 역수표, 제곱, 세제곱표, 지수표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세계최고의 수학서는 대영 박물관의 Rhind 수집품 중에 있는 아메스의 파피루스이다. Rhind 는 1858년에 이것을 구입했다. 이 파피루스에 기재된 고문서는 1877년 독일의 고고학자 아이젠로올에 의하여 현대어로 번역되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집트 사람들은 이론적인 성과를 몰랐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증거로 거기에는 정리가 없음을 들 수 있으며 일반법칙도 거의 없었다. 대개가 같은 종류의 문제를 몇 개고 계속 풀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귀납적으로 쉽게 일반법칙을 발견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하지 않고 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에는 분수의 계산을 표기하고 있고, 또한 1개의 미지수를 가지는 1차방정식 및 2차방정식에 귀속되는 문제도 다루고 있다. 또 아메스의 파피루스에는 여러 가지 기하문제 등이 있고, 원주율 π로서는 (16/9)2 = 3.1604… 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원과 동면적인 정 4각형의 존재도 인정했던 흔적도 있다.

  이집트의 고문서에는 등차급수, 등비급수 등에 해당되는 예를 볼 수 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아마도 기하학적 지식을 표시하고 있는 최고의 증거품일 것이다. (모스코바 파피루스) 고대의 과학은 미신과 결부되어 있다. 바벨로니아의 기하학적 도형이 길흉을 점치는 데에 사용되었던 증거도 있다. 그들의 도형 중에는 평행선, 정 4 각형, 오목각을 포함하는 도형 등이 있다. 바빌로니아인은 60진법을 아용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1차방정식, 2차방정식도 풀고 있었다. 바빌로니안 인의 점토판인 Plimpton 322에는 직삼각형을 나타내는 세변의 테이블이 실려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피타고라스 원시 3 쌍(공통인수가 없는 3 쌍)이 실려있다.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문제 : 재산이 일곱채의 집이고 각 집에는 7마리의 고양이가 있고 각 고양이는 7마리의 쥐를 먹었고 각 쥐는 7개의 밀 이삭을 먹었고 각 밀 이삭은 7홉의 곡식을 만들 수 있다. 집, 고양이, 쥐, 밀이삭, 홉 모두를 합하면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

posted by 치운 2013. 11. 6. 12:01

고대사 X파일  슈메르 언어와 한국어의 비교2
 
 

    슈메르어 An은 하느님을 뜻한다. 또한 이 An은 제정일치 사회에서 군왕의 표상이 되었다. 원래 제왕이란 우주의 최고신을 대신하여 이땅을 다스리는 성인을 말한다. 고대에서는 그 시대의 최고의 지혜와 덕을 갖춘 성인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습제로 바뀌게 되면서 여러 가지 폐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원래 왕조는 세습제가 아니었다. 선출방식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습제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폐단도 같이 발생하게 된다.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변천된것도  그 이유가 있다. 이 역사적 원리를 나중에 설명하겠다. ) 한민족은 하늘과땅의 민족이란 뜻이고 천손민족의 뜻이다. 제왕은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스스로를 희생하고 고난에 놓이게 하여 백성들을 보살피는 그런 존재이다.


또한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서 수많은 백성들을 더 살기 좋고 이롭게 한 존재이다.

 

슈메르인들이 사용했던 12궁도와 우리의 12간지, 60진법과 60천간, 흑해/홍해와 황해의 오행흔적, 한단고기의 12환국에 묘사된 수밀이(須密爾)와 슈메르는 같은 뿌리라고 단언할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아카드 문명이 그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와 힛타이트, 박트리아, 페르샤 등등으로 연결되는데 반해 찬란한 슈메르 문명은 후계를 잃어버린, 바람같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문명은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 취급을 받지만, 역사적으로 분명히 바빌로니아-그리스-동로마-아랍(오스만투르크 등)-서유럽 르네상스로 그 계보를 잇는다.   
 
고대사 X파일  어머니나라의 붕괴는 어디를 말하는것일까?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 발견한 나칼 점토판의 해석구절에는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라마 야나'에 '동방의 미지의 땅에서 미얀마로 온 것'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동방은 바로 태평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태평양일 수도 있고 필자는 고대의 환국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이 번역을 한 처치워드는 슈메르문명의 모체가된 동방의 환국문명을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트로아노 고사본'은 유카탄 반도와 고대 마야족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도 무(MU) 대륙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인도나 미얀마, 이집트에서 발굴된 상형 문자는 모두 나칼 점토판에 새겨져 있는 무 제국의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기록 말고도 무(MU) 대륙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다고 처치워드는 주장한다.


 이스터, 망가이, 마리아나 제도 등 남태평양의 섬들에 남아 있는 온갖 유적에서 무 대륙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고, 유카탄 반도의 우슈말 사원 비문에 새겨진'서방의 나라,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표현도 그 증거의 하나다. 멕시코시티 남쪽에 있는 피라미드의 비문에는 '어머니 나라의 붕괴를 기념해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제임스 처치워드는 어머니 나라의 붕괴는 뮤대륙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필자는 어머니나라를 슈메르제국이라고 본다. 피라미드속의 왕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연대와 실제 뮤대륙의 멸망의 연대와는 수천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뮤대륙의 문명을 이어받은 중간 매개자의 역할을 한 고대 문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할 수 있을것이다.

 슈메르문명과 이집트의 고대벽화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혹자는 고대의 건축물이 돌무더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건축물들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건축하기가 간단하지 않은, 매우 정교한 것들이다. 이런 건축물들은 대홍수로 휩쓸려간 여러 유물들과는 달리 아직도 굳건하게 남아 과거의 찬란한 문명을 증거하고 있다.[펌]
 
 

 

posted by 치운 2013. 11. 6. 12:00

<퍼온글 임>

고대사 x파일 슈메르 언어와 한국어의 발음비교 
 이정도 모티브로 닮았다고 주장한다고 정통사학자들이 꼬집는다면 다음의 증거를 제시하겠다.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는 증거이다.

봉황의 상징과 같은 동양인의 공통점, 역사의 뿌리가 같다면 반드시 닮은꼴이 있기 마련이다.  슈메르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와 현재의 한국어를 비교하여 보자.

슈메르어(발음)[ 뜻]
 한국어 발음[단어 뜻]
 슈메르발음[단어뜻 ]
 한국어 발음[단어 뜻]
 
아누(Annu)[최고 신]
 하느님 [하느님,上帝]
 Bad 바드 [ 밭 ]
 밭 (Bat) [밭, 田 ]
 
안 (An) [天]
 하늘 (ha) [ 하늘, 天 ]
 Na 나 [나 1인칭]
 나 Na [ 나,我  ]
 
기르(Gir)
 길 (Gil) [路]
 Ge 그 [3인칭 ]
 그 Ge [ 3인칭 ]
 
라 (Ra) [~ 에서 ]
 로 (Ro) [ 조사 ]
 I  이 [1 인칭 ]
 이 [지시대명사]
 
아비 Abi [ 아버지 ]
 아비 (Bo) [ 夫 ]
 Uhma 움마[엄마 母]
 엄마 Uhma [엄마 母]
 
니므 Nim [ 님 任 ]
 님 (Nim) [ 사람 任]
 
 
 

여기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문자와 발음의 변천원리를 간단히 배워두고 넘어가자

음운의 변천은 문화와 유적의 원뿌리를 밝히는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와 같이 기초 단어가 의미까지 모두 같다. 특히  조사를 사용해서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는 교착어의 유일한 특징이라 할수 있다. ~로, ~가, ~의 , ~를 와 같은 조사를 사용하는 언어는 교착어가 유일하다.

   교착어를 쓰는 종족은 전세계적으로 어떤 민족인가? 동이족 계열 뿐이다. 터키도 교착어를 쓴다. 어순체계가 약간 다른데 터어키에서는 현재에도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한국을 형제국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터키의 역사 교과서는 2000년전에는 한국과 터키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외 지구촌의 소수종족중에 교착어를 쓰는 곳이 그외 몇몇 종족은 중국의 묘족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교착어를 사용한다.(이 부분도 민족의 뿌리에서 차후에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슈메르의 주신은 아느(Annu), 최고의 신을 뜻한다. 우리말의 하느님, 하늘님, 한울님과 같은 의미이다. 중세 이전에 쓰던 아래아 한눌님 으로 기준하면 이단어는 전부 같은 발음이 된다. 하(아)가 뜻하는 것이 하늘과 위와 남성적인 것이라면 '느'가 뜻하는 것은 땅, 아래, 여성적인 것이다.(누리(땅), 누이(누나) 같은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고 며느리, 마누라도 이 어원에서 나온, 여자를 지칭하는 말)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 즉 천지를 부모로써 떠 받드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천지부모의 자식이란 뜻이 언어속에 그대로 전해진다. 삼일신고의 내용을 살펴보라. 사람 하나 하나에게 하느님의 씨알이 그대로 내려와있다는 사상과 정확히 일치한다.이것은 우리 민족의 근본사상과 정확히 일치 하는 것이다.

posted by 치운 2013. 10. 30. 12:05

고구려어 어휘 자료

1. 해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璡夷傳)>에 의하면,

 고구려 언어는 부여(夫餘)의 언어와 비슷하였으며, 옥저(沃沮) 및 예(濊)의 그

것과도 비슷하였다고 한다(부여에 대하여는 東夷舊語 以爲夫餘別種言語諸事

多與夫餘同…, 동옥저에 대하여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예에 대하여 其耆

老舊自謂 與句麗同種…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고구려어의 자료는

내외사적(內外史籍)에 나오는 고유명사들인데, 그 중에서도 《삼국사기(三國

史記)》 <지리지(地理志)>가 주된 자료이다. 거기에는 같은 지명에 대하여 한

자(漢字)의 음(音)을 빌려 표기한 것과 훈(訓)을 빌려 표기한 것이 있어, 이들의

대응관계를 수립함으로써 단어의 발음과 의미를 재구(再構)할 수가 있다. 이렇

게 현재까지 얻어진 어휘의 수효는 약 100을 헤아린다.

 

2. 어휘 자료: (* 백; 백제어, 신; 신라어, 중; 중세국어, 日; 일본어)

단어(표기)

의미

용례(출처)

참고/비교

☞ 名詞 / 천문 지리

山/高

土山縣本高句麗息達 등

(고) 阿斯達

旦/呑/頓

水谷縣日云買旦忽 등

(日) tani(谷)

內/奴/惱

槐壤郡本高句麗내斤內郡 등

巴衣/波衣/波兮

巖/峴

松峴縣本高句麗夫斯波衣縣 등

(중) 바회, (日) ifafo

土山縣本高句麗息達

長堤郡本高句麗主夫吐郡 등

述爾/首泥

峰城縣一云述爾忽玄

(중) 수늙(嶺)

水/川

水城郡本高句麗買忽郡

水城郡本高句麗買忽郡

(중) 골(谷/洞)

內米

池/長池

內米忽一云池城一云長也

海曲縣本高句麗波且縣

於乙

泉井郡一云於乙買

(신) 乙(井)

濟次

孔巖縣本高句麗濟次巴衣縣

加阿

薩寒

霜陰縣本高句麗薩寒縣

(중) 서리

奴音/奈

陰竹縣本高句麗奴音竹縣

☞ 동식물명

高木根縣一云達乙斬

仍伐

穀壤郡本高句麗仍伐奴縣

夫斯/扶蘇

松岳郡本高句麗扶蘇岬

(중) 봇(樺)

買尸

蒜山縣本高句麗買尸達縣

(중) 마날(아래아)

加支

菁山縣本高句麗加支達縣

牛岑郡一云牛嶺一云首知衣

(중) 쇼(牛)

烏斯含

兎山郡本高句麗烏斯含達懸

(日) usaggi

功木

功木達一云熊閃山

(중) 곰, (日) kuma

古衣

鵠浦縣一云古衣浦

(중) 고해(鵠), (日) kufu

居尸

心岳城本居尸城

忽次/古次

獐項口縣一云古斯也忽次/穴口縣一云甲比古次

(日) kuti

於支

於支谷一云翼谷

☞ 광물

乃勿

鉛城本乃勿忽

(日)namari

古斯

玉馬縣本高句麗古斯馬縣

(중) 구슬(玉)

蘇文

蓋蘇文一云蓋金

(중) 쇠(金)

折/召尸

銀尸城本折忽, 木銀城本召尸忽

毛乙

鐵圓郡一云毛乙冬非

加尸

犁山城本加尸達忽

(중) 가래

於斯

於斯內縣一云斧壤

☞ 인간

也次

母城郡一云也次忽

仇斯

童子忽縣一云仇斯波衣

(日) ko(子)

于尸

有隣郡本高句麗于尸郡

伊伐支

隣豊縣本高句麗伊伐支縣

(중) 이웃(隣)

遇王縣本高句麗伯縣

朱蒙

善射

夫餘俗語善射謂朱蒙(삼국사기)

(몽) mangga(善射)

☞ 기타

斤乙

文峴縣一云斤乙波兮

(중) 글

骨蘇/蘇骨

周書(高麗傳)/北史(高句麗)

七重縣一云難隱別

☞ 수사(數詞)

三峴縣一云密波兮

(日) mi

于次

五谷縣一云弓次云忽

(日) itu(五)

難隱

七重縣一云難隱別

(日) nana

十谷縣一云德頓忽

(日) towo(十)

☞ 형용사(形容詞)

奈吐縣一云大堤

(日) naga(長)

首知縣一云新知

(중) 새(新)

主夫

長堤郡本高句麗主夫吐郡

沙非斤·沙伏

赤木縣一云沙非斤乙, 赤城縣本高句麗沙伏忽

(백)所比, (日)sofo(赤)

今勿

黑壤郡本高句麗今勿奴郡

(중) 검-(黑)

奈兮

白城縣本高句麗奈兮忽

伐力

緣驍縣本高句麗伐力川縣

(중) 프르-(綠)

伐斯

深川縣一云伏斯買

(日) fuka-(深)

比烈

淺城縣一云比烈忽

골디語 biri(淺)

堅城郡本高句麗馬忽郡

퉁구스제어 ma(堅)

骨衣

荒壤縣本高句麗語骨衣奴縣

(신) 居柒(荒), (중)거츨-(荒)

沙熱伊

淸風

淸風縣本高句麗沙熱伊縣

(중) 서늘-(凉)

冬非

鐵圓郡一云毛乙冬非

둥글다 등의 「둥」

相似

句麗呼相似爲位

(중) 이슷-,비슷-(似)

於斯

橫川縣一云於斯買

(중) 엇-(橫)

☞ 동사(動詞)

多勿

復舊土

麗語謂復舊土爲多勿

遇王縣本高句麗皆伯縣

水入縣一云買伊縣

(日) i-(入), (몽) ire-(來)

 

출처:문학의 만남cafe.daum.net/iterarymeet문학의 만남

posted by 치운 2013. 10. 25. 12:02

4. 고구려 영토 지도 어떻게 이해할까.

고구려 영토의 변천과 지도상에 영토를 표시하는 데 있어 몇 개의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지도는 고구려의 모습을 2차원의 도면에 표현해 내는 것이다. 단순히 고구려의 면적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영토가 넓다고 해서 국가가 위대하다거나, 자랑스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캐나다가 넓은 땅을 가졌지만, 1/50에 불과한 잉글랜드 보다 그 땅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는 적다. 면적이 넓다고 해서 제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흔히 민족주의 사학에서 고구려를 넓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몽골 초원의 1억 평 보다는 경주 일대의 백만 평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고구려에게 있어서 요하에서 한강에 이르는 비옥한 농경지는 국가의 핵심지로 당시까지 개간이 안 된 넓은 삼강평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한 가치를 지닌다.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별 특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맹목적으로 크게만 지도를 그리는 것만큼이나, 민족의 영광만을 내세우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고구려를 보는 것이 못 마땅하다고 해서 고구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고구려의 내지만을 영토로 지도에 표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고구려가 제국이었던 만큼, 제국의 중심지대와 주변지대가 있다. 제국의 주변지대는 흔히 세력권, 영향권, 변방 등으로 말하기도 하며, 현대 중국식 표현을 빌리면 변강(邊疆)에 해당한다.

현재 중국의 역사 지도를 그릴 때에 중원의 정통왕조의 영역에 변강의 나라들을 포함시키는 것처럼, 고구려도 내지와 그의 세력이 미친 범주에 대해서 함께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구려는 제국을 운영한 나라답게,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여 새로운 고구려 문명을 창출해냈다. 멀리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까지 왕래하고, 세계제국인 수와 당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맞서 싸워 이긴 고구려인의 힘은 그들 스스로가 가진 제국의 경영자라는 자부심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고구려의 주변지대를 영토에 그리지 않는다면,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가 없으며, 고구려인의 활동 무대도 잘못 오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지도는 학생들에게 중국이 현재의 영토만큼 넓은 영토를 고대로부터 갖고 있었다는 인식을 주입시켜준다. 그것은 그들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가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는 만들어진 논리를 증빙하기 위해 만들어진 왜곡된 지도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기에 앞서서 우리의 지도 표현도 개선해야 할 것이다.

고대 국가들에게는 오늘날처럼 명확히 측량을 해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영토라고 하는 국경선이 없었다. 막연하게 이 지역까지 영토이고, 어디를 지나면 타국이란 개념이 전부였다. 즉 국가와 국가 사이에 완충지대가 매우 넓었다. 고구려에게 요서 지역, 대흥안령 일대가 대표적인 완충지대였다. 완충지대는 선이 아닌 면으로 지도에 표현되어야 한다. 특히 완충지대를 중국의 것이라고 단정 짓는 기존의 지도는 분명 고쳐야 한다.

고구려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명확한 구분, 고구려의 주변지대를 어떻게 영토 지도에 표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개인의 저서에서는 다양하게 표시된다고 하더라도, 교과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없었던 것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교과서에서부터 고구려의 천하, 또는 고구려의 중심부와 주변부 등의 제목 하에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친 지역을 지도로 표시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개인의 저서에서는 표현하기가 다소 힘들지만, 사회과부도나 국사교과서에는 반드시 지도를 지형도를 배경으로 그리는 것이 옳다. 그래야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고 어느 지역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 예를 들어 왜 삼국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노력했는지 -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를 통해서 역사를 읽는 것은 단지 어떤 나라가 얼마나 큰 영토를 가졌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가 어떤 지역을 언제 어떻게 차지함으로써 이후 어떤 역사적 변천을 겪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어떠한 자연환경에 놓여있는 국가이기에 어떠한 역사적 행동을 했는가를 이해할 단서가 지도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지금까지 고구려 영토에 대한 지도는 얼마나 넓은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고구려의 역사 전개의 이해를 돕는 지도, 즉 그들이 어떠한 자연조건을 가진 지역에서 활동했으므로, 어떠한 역사상을 만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지도가 그려져야 할 것이다.

posted by 치운 2013. 10. 25. 12:00

3. 고구려 영토의 몇 가지 문제

고구려 영토의 변화와 관련하여 아직 해결하지 못한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먼저 고구려가 오늘날의 북경일대를 지배했는가라는 문제다. 고구려가 북경 일대를 장악했다고 보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408년에 죽은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그려진 13태수의 하례를 받는 장면과 묵서명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묵서명은 고구려가 자사, 태수와 현령까지 갖춘 구체적인 지배체제를 가동하여 북경 인근의 구체적인 영토를 지배했다는 단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408년 이전에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지배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학자들이 더 많다. 유주자사 진을 망명객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유주자사를 지낸 진이 설령 고구려의 지배체제의 틀에서 그곳을 지배한 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망명해 올만큼 고구려가 유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고구려가 404년 북경 인근으로 추정되는 연군(燕郡)을 공격한 기록도 있는 만큼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이 검토되어야 한다.

고구려 영토와 관련된 몇몇 중요 지명의 경우도 논란의 소지가 많다. 특히 낙랑, 서안평의 위치는 기존 통설이 많이 공격받기도 한다. 구체적 지명의 위치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검토가 있어야만 하겠다.

이런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반드시 검토해야 할 부분은 말갈 지배 문제다.

중국에서 나온 역사지도에 보면 고구려의 영토 범주에 말갈 거주지는 전부 제외시켜 놓고 있다. 심지어는 고구려 동부 중심인 책성주변도 말갈의 영역으로 그린다. 고구려와 말갈을 철저히 분리시켜 보자는 시각이다. 고구려와 말갈을 분리시키려는 중국의 지도에는 단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조공을 한 국가를 중국의 영역에 포함시킨 장면과 극도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지도에는 고구려의 입장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갈은 고구려의 주요 구성원이다. 고구려와 말갈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말갈은 고구려 군대에 속하여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전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 존재였다. 598년 영양왕은 말갈군 1만을 이끌고 영주를 공격했으며, 661년에는 말갈장군 생해는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 뇌음신 장군과 함께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말갈군은 고구려군의 선봉에 서서 당나라 주력부대와 맞서 싸웠다.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말갈은 고구려와 분리시켜 볼 수가 없다.

수서에 기록된 말갈 7부 가운데 백산부, 안거골부, 호실부, 속말부, 백돌부는 고구려에 속한 부족들임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는 최근의 중국학자들의 발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불열부는 아예 기록조차 없어 단정하기는 힘들고, 흑수부는 유독 다른 계통을 지닌 읍루-물길과 연결되는 종족으로 여겨지는데, 흑수부는 고-당 전쟁 때에는 고구려를 도와 전쟁에 참전했다. 만약 고구려와 말갈이 전혀 별개의 세력이라면 어떻게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하나의 국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겠는가?

가장 이질적인 흑수말갈 조차 고구려와 무관한 세력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말갈에 대한 어떤 통제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양자 관계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흑룡강가에 위치한 러시아의 국경도시 하바로브스크시 인근의 코르사코브스키 고분군 112호 고분에서 고구려의 금동불상과, 같은 고분군에서 고구려식 화살촉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이곳은 흑수말갈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삼강평원의 북쪽이다. 금동불상과 화살촉 유물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 사는 흑수말갈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그릴 때에는 말갈의 거주지로 알려진 동북 지역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시 영토 개념에도 더 가까울 것이다. 손영종의 『고구려사2』의 지도는 고구려가 말갈 전역을 완전히 영토로 삼았다고 해석한 지도라고 볼 수 있다.

 

 

말갈 지역을 지도로 그릴 때에는 백산부와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 호실부 지역은 고구려의 내지에 그려 넣고, 연해주 북부와 삼강평원 일대의 흑수부 지역은 고구려의 변방으로 그리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구려사2』 지도에 표시된 흑룡강 북쪽의 시베리아 지역은 고구려 영토로 표시할 수 있을까?

먼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고구려를 그저 주변에 존재한 가장 강대한 국가 정도라고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담비가죽을 비롯한 산물을 거래하는 상업 활동의 보호, 여러 부족들의 산발적인 내침(來侵) 방지, 여러 부족들의 병사를 차출하여 외부와의 전쟁에서 동원 등을 목적으로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구체적인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가 이곳에 통치조직을 갖춘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은 아직까지는 무리한 역사 추론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간혹 무력시위를 하거나, 외교관을 파견하고, 소수의 부족장들에게 고구려 관직을 주는 책봉을 하거나, 또는 고구려의 선진 문물을 하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구려를 따르게 하는 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만으로 고구려 영토를 이곳까지 그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만약 현대 중국의 영토 표시 방법에 준하여 고구려 영토를 그린다면, 고구려가 숙신에게 조공을 받고 말갈 등을 제어한 것만으로도 북쪽 영토는 무한정 확대되어 그려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 지도에 고구려 영토에서 말갈을 제외시킨 것은, 수와 당의 영토를 그린 방식과 전혀 다른 이중 잣대로 지도를 그린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지도 표시 방법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북한의 『고구려사2』 지도 역시 지나친 과장이 있지만, 중국의 지도 표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겠다.

고구려 영토 표시에 있어서 또 하나 주목할 곳은 요서 지역이다. 대체로 고구려 영토를 표시한 지도에는 요서지역이 빠져있다. 일부 지도에 무려라 등 요서에 고구려 전진기지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요하를 건너 국경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특히 고구려의 것이 아니면 모두 중국의 것으로 표시하는 안일한 지도 표기가 문제가 된다. 대다수의 한국의 역사지도에는 고-수 고당 전쟁 시기 양국간 국경을 요하로 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수나라와 당나라는 요서 지역에 제대로 된 군현조차 없었다. 겨우 군사기지로 유성군 1개소에 인구 3천 남짓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를 근거로 광활한 요서 지역을 전부 수와 당의 영토로 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요서 지역은 역대로 고구려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다.

왕 명

년 대

고구려의 활동 상황

모본왕

49년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공격

태조대왕

55년

요서에 10성을 쌓음 ?

태조대왕

121년

후한 습격, 후한의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등의 군대가 동원된 것으로 볼 때 전쟁 무대는 요서 일대로 추정

미천왕

313년

모용선비의 책성 공격 (요서의 중심인 대릉하 주변)

광개토대왕

395년

거란 정벌, 부산(負山), 부산(富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름. 의무려산맥을 넘어 요서 북부로 진격한 것 ?

광개토대왕

402년

후연의 숙군성(대릉하 주변) 공격

광개토대왕

404년

후연의 연군(북경 일대 또는 대릉하 주변) 공격

광개토대왕

406년

후연의 군대가 3천리나 쫓겨 다님 (요서지역에서 전쟁 ?)

광개토대왕?

408년 이전

유주자사 진이 북경 일대 지배 ? (덕흥리 고분)

장수왕

436년

북연의 수도 화룡(조양지방)에 진격, 북연 접수, 북위군과 대치

장수왕

479년

유연과 함께 지두우 분할 (대흥안령 산맥, 요서 북부)

문자명왕

502년

북위의 변방을 습격 (북경 일대)

안장왕

520년대

유성(조양)을 공격하여 평주사마 한상을 잡아 옴

평원왕

560년대

돌궐을 격파, 거란 지배력 강화

평원왕

578년 경

북주군과 배산에서 맞서 싸움 (요서 일대 ?)

영양왕

598년

수의 영주 선제 공격, 요서와 발해만에서 수나라 해군 격파

보장왕

644년

영주 공격, 요하 서쪽 무려라에서 적과 대치

보장왕

658년

적봉진 전투(적봉 지역), 두방루의 3만 군대 당군과 전투

보장왕

659년

토호진수(서납목륜하)에서 고구려군 당나라 신문릉 군대 습격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게 요하는 내지 하천이지, 국경 하천이 아니었으며, 고구려군은 수시로 요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의 요서 지역에서의 활동은 두드러진다.

사서 명

내 용

후한서, 삼국지, 양서

사방 2천리

위서, 주서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북사

위나라 때에 비해 3배,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수서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구당서

동서 3,100리, 남북 2천리

신당서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합

통전

수나라 시기에 이르러 점점 커져 동서 6천리

역대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영토를 잠시 정리해보자.

고구려의 영토는 후기로 갈수록 넓어졌다. 특히 동서 6천리는 약 2,400km로 발해의 사방 5천리보다 더 크다는 표현이다. 북위는 고구려를 작은 술동이를 담을 거대한 술동이에 비유한 바 있다. 고구려가 북방의 강자 돌궐을 격파하고, 세계제국인 수와 당을 거듭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영토도 확대되었고 국력도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위서』<봉의전>에 따르면 봉의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거란이 고구려의 호위 하에 북위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간 일을 항의하였다고 한다. 문자명왕은 이 요구에 응하여 거란이 노략해간 재물과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낸 바가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북위는 고구려가 거란족의 상당수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거란의 종주국(宗主國)인 고구려에 항의사절을 보낸 것이다.

기존의 국사교과서 등은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라는 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통전의 기록을 적극 해석해서 고구려의 영역을 그린다면, 거란의 거주지도 포함해서 지금의 요서 북부 적봉시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까지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거란족의 경우 전체가 다 고구려에 지배된 것이 아니라, 일부는 돌궐, 일부는 수 등에 의해 분할 지배되었으므로, 이 지역은 영토보다는 강도가 약한 고구려 세력권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posted by 치운 2013. 10. 25. 11:48

2. 고구려 역사 전개와 영토의 변화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서기 668년까지 705년이란 장구한 역사를 지속해왔다. 긴 시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변화를 겪어왔다. 반드시 앞선 시대보다 뒷시대가 더 큰 영토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 초기에는 한 동안은 대외팽창정책을 펼치며 영역이 확대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왕 명

년 대

세력 확대

진출 방향

1대 추모왕

37

비류국

홀본 부근

32

행인국

동쪽 방향. 백두산? 동남

28

북옥저

동쪽 방향. 간도 또는 함경북도

2대 유리명왕

bc 9

선비

서북 방향. 천산산맥? 요하인근?

ad 14

양맥

서쪽 방향. 천산산맥 주변

3대 대무신왕

22

(부여국왕의 종제)

북쪽 방향. 부여국의 일파

26

개마국, 구다국

동쪽 방향. 개마고원?

37

낙랑국

남쪽 방향. 평안남도?

5대 모본왕

49

(상곡, 태원)

서쪽 방향. 기습 작전

6대 태조대왕

55

요서 10성

서쪽 방향. 요서지역?

56

동옥저

남동 방향. 함경남도, 강원북부

68

갈사국

북쪽 방향?. 부여국의 일파

72

조나

고구려 인근?

74

주나

고구려 인근?

98

(책성 지역 巡狩)

동쪽 방향

105

(요동군 공격)

서쪽 방향

118

(현도군 공격)

서쪽 방향

고구려 초기 대외 팽창 과정을 다음 도표를 통해 살펴보자.

고구려가 건국한 홀본 지역과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 지역은 압록강 물줄기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산지가 많아 농사짓기에는 그리 좋은 곳은 못된다. 반면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다. 고구려는 서기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국내성 일대를 국가의 중심지로 삼아 사방으로 영역을 확대해갔다.

고구려가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딛고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핵심지대가 있다. 그것은 평야가 많은 요동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황해안의 비옥한 반달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강력한 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힘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구려가 이곳으로 돌진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먼저 주변의 작은 세력부터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위 표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추모왕 시기에는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고구려 인근과 백두산 동쪽 산간지대의 약소국부터 공략을 시작했다. 2대 유리명왕은 서쪽 지역으로 진출을 했는데, 특히 선비족을 굴복시킨 것은 특별히 기억할 만하다. 유리명왕 시기까지 고구려는 평지보다는 주변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이렇게 실력을 다진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 시기부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서기 21년 고구려에게 조공을 하라는 압력을 가해온 부여국을 선제공격한다. 전쟁은 고구려의 패배로 끝났지만, 부여왕이 죽음으로써 부여는 내분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전쟁 후에는 고구려가 부여국과의 경쟁에서 앞서는 결과를 낳았다. 부여의 약화는 고구려로 하여금 갈사국, 개마국, 구다국 등 주변의 소국을 통합하는데 가속도를 붙게 했다. 고구려는 발전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서기 37년 낙랑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7년 후에 후한이 살수 이남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영역 확대에 제동을 걸었다.

고구려가 주변의 군소 국가들의 통합을 완료하고 핵심지대로 본격 진출을 모색한 것은 6대 태조대왕 시기였다. 이때 고구려는 동옥저, 갈사국, 조나, 주나 등 주변 소국들의 통합을 완성하여 대체로 동해안에서 남만주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서쪽의 후한과 격돌했다. 고구려는 후한이 가진 평야지대를 차지해야만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서기 49년 5대 모본왕은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이르는 장거리 기습작전을 수행했고, 후한으로부터 막대한 물건을 받은 후에야 무력시위를 중단한 바가 있었다. 이후 55년 태조대왕 시기에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태원 공격은 약탈을 위한 기습 공격일 뿐, 영토 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요서 10성 기록인데, 아직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신뢰하지는 않고 있다.

고구려는 2세기 초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거듭 공격한다. 후한은 고구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고구려가 잡아간 포로 1명당 비단 40필을 주는 조건으로 고구려와 화해를 추구한다. 당시 고구려는 영토를 적극적으로 지배하려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재물과 사람을 약탈하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었다.

태조대왕은 후한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후방에 배후기지를 건설하게 된다. 그 결과 주목하게 된 곳이 현재 연변자치주 일대인 책성지역이다. 서기 98년 태조대왕은 무려 6개월간 이곳에 머물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다. 책성 지역은 고구려 5개 지방의 장관인 욕살이 머무는 동부지역의 중심지로 확실한 영토가 된다.

태조대왕 시기 고구려는 부여보다 앞선 국력을 자랑하며 동북방의 숙신의 조공도 받는다. 반면 고구려는 서쪽의 후한, 북쪽의 부여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함에 따라 122년 이후 오랫동안 적극적인 대외 경략에 나서지 못하게 된다.

도리어 197년 왕의 동생인 발기와 소노부의 공손씨 정권에 투항 사건 등으로 인해 고구려의 서부지역 영토는 축소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요하 주변과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이르는 동방의 핵심지대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

이후 고구려는 238년 위나라가 요동에 위치한 공손씨를 공격할 때에 원군을 파견하는 등 요동 방면으로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도망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고구려는 259년 위나라 대군을 침입을 양맥곡에서 대파하지만, 여전히 요동 전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이후 서쪽 보다는 북쪽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70년에 즉위한 서천왕은 숙신과 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는 곧 새롭게 요서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와 부여 쟁탈전쟁을 벌이는 결과를 낳았다.

300년에 즉위한 미천왕은 요동진출을 모색하는 한편, 313년 중계무역기지로 전락해버린 남쪽의 낙랑군, 다음해에 대방군을 완전히 동방지역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미천왕은 319년 우문선비, 단선비, 서진 등과 함께 대릉하 주변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연합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고구려의 발전을 막은 것은 모용선비였다. 모용선비는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를 몰아내고, 단선비를 격파하고 342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적의 주력군이 오는 길을 잘못 탐지하여 수도를 함락당한 고구려는 왕모와 전왕(前王)인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겨 할 수 없이 모용선비에게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용선비가 우문선비를 물리치고 황하 일대로 남하하여 강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고구려는 뒷날을 기다려야 했다. 도리어 고구려는 371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국천왕이 살해당하는 등 시련을 연속으로 겪어야만 했다.

고구려가 다시 대외팽창에 나선 것은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이후 부터다. 그는 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하여 금관가야를 멸망에 이르게 했으며,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거듭 격파하여 한반도의 패자로 군림했다. 또 동북 방면에서는 동부여의 굴복을 받고 64개성을 점령하였고, 숙신족을 정벌하였으며, 서북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일파인 비려를 격파하고 서요하 상류인 염수(鹽水)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모용선비이 세운 후연을 적극 공격하여 이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시기 고구려는 엄청난 팽창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들이 있다. 고구려가 백제의 58개성을 점령하고 신라 수도에 주둔군을 배치하는 등 적극적인 남방 경영에 나섰지만, 백제의 수도가 여전히 한강변의 한성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했지만, 후연 땅에 고구려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다. 또 신라도 완전히 병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완전히 자국의 영토로 삼는 공간과, 단지 항복과 충성 맹세를 받고 인질과 노획물을 얻어감으로써 정복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을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 구별했기 때문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백제, 가야, 신라, 후연을 직접 통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고구려 중앙정부에 복종하는 제후국이 다스리는 지역이면 만족했던 것이다. 또 제후국으로 삼지도 않지만, 반드시 격파해야 할 외부의 공간도 구별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 개념은 고구려의 천하관으로 나타난다. 광개토대왕릉비문과 중원고구려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천하관이 나타난다. 고구려 천하관에는 고구려가 지켜야 할 천하와 그 외의 천하가 구분되어 진다.

신라 등의 제후국은 고구려가 지켜야 할 천하 즉 제국의 범주에 포함시켜 보았다. 후연이 멸망한 후 탄생한 북연에 대해 고구려가 종족의 예를 베푼 것은 북연을 제후국으로 인정했음을 뜻한다. 고구려는 북연을 제후국으로 인정했기에 요서 방면으로 경략을 멈추었다. 북연은 고구려에게 있어서 중원의 여러 세력들과 충돌을 방지하여 변방의 완충지대라는 의미가 있었다.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는 요동에서부터 한강에 이르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고구려는 이를 국가의 핵심지대로 삼고, 동쪽의 책성 지역, 북쪽의 부여 지역을 강력한 배후기지로 삼아, 전통의 압록강 중류 지역과 함께 다중 거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제국의 주변지대에는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거란, 북연, 신라, 숙신과 같은 제후국을 거느렸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국의 기본 틀을 완성한 것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4대 강국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435년 북연이 척발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어 북위와 대릉하 연안에서 대면하게 되었으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백제가 부흥하여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이를 먼저 탐지하고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를 남쪽의 웅진으로 몰아세웠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아산만에서 대전을 거쳐 포항에 이르는 선까지 남하했다.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인 충주 지역에 국원성을 세우고 남부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고구려 제국의 지배는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백제는 곧 국력을 회복해 고구려에 반기를 들었고, 신라도 서서히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으로 성장했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남쪽인 평양성으로 천도하는 등 남진 정책의 추진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북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5세기 고구려는 거란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북방의 유목제국인 유연(柔然)과의 우의를 바탕으로 양국 사이에 낀 대흥안령 일대에 거주하는 유목민 집단인 지두우를 분할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자 거란족은 큰 위협을 느끼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파장도 있었다.

문자명왕 시대에 가장 특기할 사항은 494년 부여의 자진 투항이다. 그런데 부여는 이미 346년 모용선비의 침략을 받은 이후부터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부여 지배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져왔다. 고구려는 부여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실위족에게 철을 공급하며 회유책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물길족의 반란도 진압하는 등 고구려의 북부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고구려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550년대였다. 유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돌궐이 고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침략해왔고, 고구려가 돌궐을 막는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와 화해하고,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견제하게 했다. 그 대가는 한강유역의 포기였다. 대신 돌궐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고구려는 돌궐과 첨예한 이권을 걸린 거란족 지배문제에 있어서 기득권을 잃지 않았다. 1992년 몽골공화국에서 현장 조사를 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몽골공화국 동부지역에서 여러 개의 고구려 성으로 보이는 유적과 고구려 유물흔적을 찾았다고 한다. 좀 더 정밀한 검증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두우 분할, 또는 돌궐과의 전쟁, 실위에 대한 영향력 확대, 초원길을 통한 서방국가와의 교역 등에 이권(利權)이 걸린 고구려가 이곳까지 진출하여 기지를 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구려는 요서남부지역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고구려는 520년대에 중원세력의 전진기지였던 대릉하 주변의 조양을 공격하여 포로를 잡아왔으며, 거란족을 시켜 만리장성을 넘어 현 북경 일대를 수시로 공격 약탈을 감행하기도 했다.

6세기 이후 요서지역에 중원세력의 거점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나라의 요서지역의 거점은 유성군 751호 뿐이었고, 이곳과 가까운 북경 북쪽의 어양군은 1현에 3,925호, 북평군은 1현에 2,269호로 각기 1만 명 남짓에 불과했다. 반면 이 보다 남서쪽인 상곡군은 6현 38,700호, 탁군이 9현 84,059호로 인구가 많았다.

요서 일대에 중원세력의 거점이 없었다는 것은 645년 고구려를 공격해온 당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세민은 군량 운송 책임을 받은 위정(韋挺)에게

posted by 치운 2013. 10. 24. 12:34

지도를 중심으로 살펴 본 고구려 영토

김 용 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 역사이해와 지도.

2. 고구려 역사 전개와 영토의 변화

3. 고구려 영토의 몇 가지 문제

4. 고구려 영토 지도 어떻게 이해할까

1. 역사 이해와 지도

『신당서(新唐書)』〈양관(楊綰)〉전에는 양관이 출세하기 전 홀로 공부를 하면서 좌우에 지도와 역사서를 놓고 공부했다(左右圖史)는 말이 있다. 이 말에서 유래된 좌도우사(左圖右史)는 역사를 공부할 때에 인간의 삶의 궤적을 시간은 물론 공간적인 이해도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역사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면서 겪었던 이야기다. 어떠한 공간에서 활동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지역의 변화가 촉구되기도 하지만, 지리적 조건과 그 변화에 의해 인간의 삶은 큰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지리적 인식을 함께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현행 초중고의 역사교육은 역사 교과서와 함께 사회과부도를 공부하도록 하고 있고, 교과서에도 상당량의 지도가 삽입되어 역사 이해를 돕고 있다.

글보다 그림이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데 보다 효과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잘 그려진 지도 한 장은 한편의 논문 이상으로 더 강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던져 줄 수 있다. 특히 현대는 이미지와 감성의 시대다. 영상매체와 접한 빈도가 높은 젊은 세대일수록 두툼한 분량의 책을 독서하기 보다는 사진과 그림이 많이 삽입되어 읽을 량은 적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을 선호한다.

따라서 근래에 출간된 역사 서적들도 과거에 비해서는 지도를 비롯한 시각 자료를 더 많이 삽입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들에게 지도 한 장을 그리는 것은 매우 고된 작업이다. 지명 고찰의 어려움이 덜한 조선시대 보다 상대적으로 지명 고증이 덜된 고대사 분야는 더욱 그렇다. 고대 국가의 영토는 지금처럼 국경선이 철책으로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잦은 전쟁, 불철저한 지역 지배, 인구의 이동 등으로 국경의 변화가 매우 잦았다. 따라서 시점에 따라 영역의 표시는 큰 차이가 날 수도 있다.

한국 고대사에서 지도를 통한 역사 이해의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역시 고구려다. 일반인들이 고구려에 대해서 갖는 첫 번째 이미지는 대체로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한 대제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고구려사에 대한 첫 이미지는 고구려를 특정한 시각에서만 바라보게 하는 단점도 있다. 더불어 한국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가 곧 민족의 영광이라고 해석하는 민족주의적 분위기는 연구자들의 관점마저 흐려놓게 만들기도 한다.

현행 국사교과서는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남쪽은 남양만에서 포항을 잇는 선까지 서쪽은 요하 주변, 북쪽은 송화강 이남, 서쪽은 흑룡강성 일대의 대부분을 제외시킨 지역만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지도는 과거 일제시기의 식민사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새롭게 지도를 그려내는 것에 부담을 가진 연구자들이 다시 지도를 그려내는 것에 소홀했기 때문에 한번 그려진 지도는 그간의 새로운 연구 성과들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북한 손영종의 『고구려사2』는 길림성, 흑룡강성 전역과 요서북부, 그리고 연해주와 흑룡강 이북의 넓은 시베리아까지를 고구려 영토로 그리고 있다. 또한 윤내현의 『열국사연구』는 고구려의 영토를 오늘날의 동북3성과 내몽고 동부 일대를 다 포함한 거대한 영역으로 그렸다. 이러한 지도는 고구려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갖는 독자들의 요구에 맞는다. 따라서 이것이 고구려 영토를 제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 다르게 그려진 지도는 독자들의 역사 이해에 혼동을 초래하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고구려를 과장되게 이해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고구려의 역사 자체가 과장된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영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고구려 역사 변천에 따른 영토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posted by 치운 2013. 10. 24. 12:22

http://blog.daum.net/enteruri/15522413


일찌기 도올 김용옥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고전 번역학 박사학위를 강조했었다.

또 '상고사의 재발견'을 쓴 재야 사학자 이중재씨는 고전 5,000권을 읽으니 문리가 트이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학을 위해 한문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 했었다.

 
 

 

사기 등 25사 한국인에게는 역사가 없다:김종윤
삼국사기,삼국유사 고조선:유엠뿌진(소련학자)
단군과 화랑의 역사와 철학:안호상 조선전:이민수 역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이상시 참과 거짓의 역사:정용석
고조선 연구:리지린(북한학자) 의병군인가 반란군인가:정용석
한국상고사의 제문제:한국정신문화연구원 중 원:정용석
실증한단고기:이일봉 실크로드는 신라인의길(1.2):정용석
한국고대사신론:윤내현 처음으로 밝혀진 한민족사:이중재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윤내현 새 가야사와 삼국열전:이중재
인류시원사:김재환 상고사의 새발견:이중재
영광과 통한의 세계사:안재세 산해경(상.하):이중재
동북민족원류:손진기 고대조선사와 근조강역연구:김종윤
되물한국사:유왕기 기란 물과 빛과 소리:이중재
제정신을 차려야 나라가 산다:안창범 한민족 우주철학사상:이중재
대륙에서8,600년 반도에서 600년:이병화 숨겨진 우리역사를 찾아서(1.2.3.4.5):오재성
대조선민족사:한정호 조선무속고:이능화
고조선 연구:문정창 다물 그 역사와의 약속:강기준
산운 장도빈전집 권Ⅱ(통사Ⅱ) 역사의 연구:아놀드 토인비
현대물리학과 한국철학:김상일 겨레역사 6천년:안호상
원시불교사상:김동화 한겨레의 뿌리 얼:송호수
고대한사:전만섭 한겨레의 뿌리 길:송호수
환웅천황과 한국고유사상의 탄생:안창범 위대한 민족:송호수
상고연구 자료집:김효신 통곡하는 민족혼:안원전
육당 최남선 전집Ⅱ(한국사Ⅱ):최남선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이중재
금문의 비밀:김대성 한국.슈메르 이스라엘 역사:문정창
환국역사개론:황상기 한국고대문화의 기원:이형구
한 사상과 민족종교:이을호 외 환단고기:임승국 역
부처님이 계신다면:탄허 규원사화:북애자
신채호 역사논설집:신채호 신단실기:이민수 역
한국고대사:문정창 단군조선 47대사:고동역 역
한국인의 발자취:김병모 맥 이:박문기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2.3):서희건 숟가락:박문기
지중해문명과 단군조선:박용숙 동이조선전 관계자료 주석:박성봉
금관의 비밀:김병모 원문 동이전:김재선.팽구선
이것이 개벽이다(상.하):안경전 한글 동이전:김재선 외
한사군은 없었다:김종서 새로 밝혀진 새고려사:이중재
고구려건국신화는 없었다:김종서 고조선 제국사:김종서
단군신화는 없었다:김종서 주석 조선상고사(상.하):신채호
중국고대사강:김상기 백두산 민족에게 고함:권태훈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권태훈 한국고대사 연구평(이병도 저):문정창
쌍어속의 가야사:강평원 광개토대왕훈적비문론:문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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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의 비밀:김봉태
동방의 태양 한민족:박영만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박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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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사:정명악 월간 민족지성 86년 11월호
신화와 문명의 시작:김정환 동방학지 15호
수운과 화이트헤드:김상일 신동아 87년 2월호
심당전서:이고선 한국구비전승의 연구:성기실
중국사료에 의한 조선역사 연구:정두옥 다물의 역사와 미래:임승국
동국통감:서거정 한국어의 계통:김방한
아방강역고:정약용 한국미술의 기원:박용숙
알타이.우랄문화의 뿌리를 찾아서:장명하 시간이 없는 지구:콜린 윌슨
요해 한민족의 비서:다물민족 연구소 시경과 성: 원형갑
중국민족사:임혜상 통일과 웅비를 향한 겨레의 역사: 육군본부
대학. 중용. 맹자. 시경 새국사사전: 이홍식
부도와 한단의 이야기:지승 스님 한국상고사: 윤희병
만화한단고기:한재규(최근 출간)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김병호
상주사:임승국 중국북방이족과 조선상고사: 라동현
상주사:윤내현 역사는 슈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박정식 역
한국신화와 원초의식: 전규태 신들의 문명:
왜 우리 신화인가: 김재용, 이종주 공저 한국미술의 기원: 박용숙
한국사학: 한국정신문화연구소 중국정사 조선전 역주: 국사편찬위원회
역사산책 11월호: 범우사 한반도에 기가 모이고 있다: 이충웅
한역사 한사상: 조한범 상식밖의 한국사: 남경태
한국적 신화: 윤성범 한국인의 도와 미풍양속: 손인수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주강현 한국종교 이야기: 최준식
진리의 문: 임균택 한국상고사: 박병식 저, 최봉열 옮김
삼일신고: 최동환 한경대전Ⅱ, 한철학사상사: 임균택
시경의 수수께끼: 원형갑 천부경: 김형탁
한국상고사: 이강민 한국의 집지킴이: 김광언
고대중국인 이야기: 하야시 미나오, 이남규 옮김 시경의 수수께끼: 원형갑
한국과 중국: 전해종 고구려 유적답사: 서길수
역사의 이론과 서술: 전해종 선화봉사 고려도경: 김종윤, 정용석
한민족의 고유사상에 관한 연구: 송호수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한순근
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송호수 중국정사 백제전 연구: 유원재
일본은 한국이더라: 김향수 한민족 그 불사조인 이유: 김선기
역사로 기록된 고조선 이야기: 김성구 창조의 비밀: 김영길, 조덕영
홍수 이후: 김성일 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한 고찰: 이민수 단군학연구 제4호: 단군학회
떠오르는 태양 생명의 땅 한반도: 이일봉 하나되는 한국사(2002년 개정판): 고준환
새로운 한국사: 윤내현 외 우리민족.우리역사: 김득황
한국신화의 비밀: 조철수 한민족 르네상스: 김용운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Ⅰ,Ⅱ: 주강현 21세기 우리문화: 주강현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서정곤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세계최고의 우리문화유산: 이종호 신토불이 우리문화유산: 이종호
신라고분연구: 최병현 고신라왕릉연구: 이종선
고구려 해양사연구: 윤명철 백제.백제인.백제문화: 박종숙
살아있는 한국사 Ⅰ,Ⅱ,Ⅲ: 이덕일 일본고대왕실: 안동준
한국사 연구논문집(고대편): 고대한일관계사: 김석형
한배달(창간호 외): 한배달 한국의 불가사의: 김한곤
신라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장한식 태고사학: 곽춘근, 천사연출판사, 2003년
수메르.이스라엘 문명을 탄생시킨 한민족: 정연규 뺏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 권진욱 역(글쓰기 안내서)
로마문화 왕국신라: 요시미즈 츠네오 고구려사: 신형식
신라사: 신형식 만주원류고: 출판사 홍익재
수수께끼의 고대문명: 김진영,김진경 공저 한국사 시민강좌 제2, 27집
한국변경사 연구: 양태진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논문집: 백산자료원(1994년)
백산학보 제16, 63호 신동아 2002년 1월호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 동아출판사(1989년) 예수: 볼트만, 삼성출판사, 1977년
시간이 없는 지구: 진현서관 임종한 역, 1979년 한국전통사고: 김성준,호국정신선양회,1990년
한국과 고대일본왕실: 안동준,백악문화사,1978년 북방영토론: 유정갑, 법경출판사, 1991년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연구: 이만열,문학과 지성사, 1990년
중국정사조선열국전: 김성구, 동문선, 1996년 초고대문명: 맹성렬, 넥서스, 1997년
중국의 천하사상: 윤내현 외, 민음사 발해사: 박시형, 이론과 실천, 1989년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뜨인돌, 2002년 중국통사(상.하): 부락성, 우종사,1982년
한민족의 뿌리: 이홍규ㅡ박경숙 공저, 한민족학회 동이한족 오천백년왕통사: 안동준,1978년
한국의 불가사의: 김한곤, 도서출판 새날, 1994년 한국종교사: 김득황, 1978년
태평양에 침몰한 환상의 대제국과 아틀란티스: 제임스 처치워드, 지방훈 역, 부름, 1983년
국조단군 제1. 2집: 단군정신선양회, 1986년 동방견문록 하멜표류기
중국고대사의 전개; 이춘식 중국정사 조선전 역주 1. 2: 국사편찬위원회
호태왕비와 고대조일관계 연구: 박진석, 연변대학 출판사, 1993년
역사: 헤로도투스 고대한중사관계사의 연구: 한국사연구회, 1987년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최준식 동방견문록 하멜표류기
중국고대사의 전개: 이춘식 민족종교와 한국문화: 유동식

(논 문)
일본말의 뿌리는 우리말이다: 박병식, 1991년6월
수메르어, 국어고어문법범주 대조분석: 조철수, 언어학 제19호, 1996년
백두산, 북방도 한국의 영토: 김덕형, 자유 1971년 1월호
대륙사관과 만주대륙: 김득황, 월간 자유 1979년 5월호
한국사의 재발견과 조선: 임승국, 월간 자유 1979년 5월호
발해 효정공주 무덤관련: 정인갑, 백산문화, 1989년, 발해사연구 논선집
한사군과 백제강역고: 임승국, 월간 자유 1971년 10월호
게르만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166호, 2003년
한반도의 백제, 중원대륙의 백제: 월간 자유, 1980년 6월호
중국문헌에 나타난 동북관: 이성규
실크로드와 한국어: 이기문, 1991년2월22일

임나신론: 김인배,김문배
고대로 흐르는 물길: 김인배
단재 신채호전집(상): 신채호기념사업회
활이바꾼 세계사:


1. 단군조선 사기연구: 문정창, 박문당, 한뿌리 2. 알타이 인문연구: 박시인, 청노루
3. 대배달민족사: 이유립 4. 하나님 사상과 불교의 기원:
안창범(자택: 064-752-4906, 016-698-4906)
5. 신교총화: 김교헌 6. 동방사 논총: 김상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7. 조선역사: 이창환, 1934년 8. 조선세가보: 윤재구, 서계수 공저, 1938년
9. 대동사강: 김 황, 1928년 10.조선사략: 김종한, 1924년 11. 동사년표: 어윤적, 1915년
12. 중국사전사화: 서량지(대만학자) 13.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 김봉태, 대구 대문사, 2000년
14. 한국의 원시사상: 박용숙, 문예출판사, 1985년 15. 극이동을 예측한다: 존 화이트
16. 세계의 종말(바로 그날): 모리스 샤틀랭 17. 정역 연구 주역 정의: 이정호
18. 대한만년 정통사: 이미수, 성동문화, 1992년 19. 환단제국사: 신승오, 도서출판 바라
20. 고조선 연구: 손보기 21. 초고대 문명에의 초대: 박균, 드라이브사, 1983년
22.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김성호, 푸른숲, 2000년(푸른숲: 02-364-7871)
23. 사 림: 임승국, 진경출판사, 1986년 24. 표준동양삼국 역사도표: 이상시
24. 시간이 없는 지구: 임종한 역, 진현서관, 1979년 25. 예수: 볼트만, 삼성출판사, 1977년
26. 한국전통사고: 김성준, 호국정신선양회, 1990년
27. 국사개정의방향: 박시인, 주류출판, 1982년 28. 한민족의뿌리: 이홍규,박경숙, 한민족학회
29. 인간의 역사: 제이콥 노보로스키, 삼성사, 1976년 30. 우리역사 일만년: 김정권, 한배달
31. 만주원류고: 출판사 홍익재, 영인본 32. 백산학보: 제3, 4, 13, 14, 16, 30, 31, 63, 66호
33. 월간 자유: 1976년 3, 4, 5, 9월호, 1980년 6월호, 1981년 1, 10월호
34. 고대한일관계사: 김석형 35. 아 고구려(우리의 옛땅 그 현장이야기): 조선일보사, 1994년
36. 고가연구: 양주동, 일조각, 1970년 37. 서역삼만리: 조선일보사-
38. 한민족 제1집- 한겨레의 뜻: 손보기, 교문사, 1989년
39. 허상과 실상(김정권의 상고사강의): 김정권, 배달사상사, 역사문화신서2
40. 우리말 어원연구: 최창열, 서울 일지사, 1986년
41. 환인.환웅.환검은 곧 하나님이다: 윤성범, 서울 청담문화사, 1976년
42. 한민족 그 불사조인 이유: 김선기, 서울 지문사, 1982년
43. 한국어의 기원: 김승곤, 건국대학교출판부, 1984년
44. 조선사화: 문일평, 청구사, 1945년 45. 한국과 일본고대왕실: 안동준, 백악문화사, 1978년
46.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논문집: 백산자료원, 1994년
47.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 리더스다이제스트, 동아출판사, 1989년
48. 조선상고사감: 안재홍 49. 일본말의 뿌리는 우리글이다: 박병식, 1991.6월
49. 태평양에 침몰한 환상의 대제국과 아틀란티스: 제임스 처치워드, 지방훈 역, 1983년
50. 중국정사 조선열국전: 김성구, 동문선 51. 단군기행: 박성수, 1988년
52. 호태왕비와 고대조일관계 연구: 박진석, 연변대학출판사, 1993년
53. 한국변경사 연구: 양태진, 법경출판사, 1989년
54. 단재신채호 전집: 中, 단재신채호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55. 한국신화의 비밀: 조철수, 김영사, 2003년 56. 21세기 우리문화: 주강현, 한겨레신문사
57.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서정곤, 한겨레신문사, 2003년
58. 세계최고의 우리문화유산: 이종호, 컬처라인, 2001년
59.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뜨인돌, 2002년
60. 살아있는 한국사 1,2,3 : 이덕일, 휴머니스트, 2003년
61. 한국의 불가사의: 김한곤, 도서출판 새날, 1994년 62. 광개토대왕비 연구: 이형구, 박노희
63. 동방학지 제54, 55, 56 합집(1987년): 북연에 대해서 1 (지배선)
64. 영토문제 연구 창간호: 고려대 민족문제 연구소: 1983년
(천관우. 홍일식-광개토대왕의 영역에 대하여)
65. 매몰된 역사를 복원한다: 임길채, 범우사, 2002.3년
66. 삼국사기 연구: 신영식 67.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 전호태, 풀빛
67. 고대로 흐르는 물길: 김인배, 세종서적, 1992년
68. 한민족의 대륙관계사: 백산학회, 1996년
69. 新元史: 경인문화사 70. 예수의 세계: 엔도 고샤꾸
71. 태고사학: 곽춘근, 천사연출판사, 2003년
72. 중국민족사: 임혜상 73. 중국민족사: 왕동령
73.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 탄생 100주년 기념논문집: 단재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74. 백제정치사 연구: 노중국, 일조각, 1988년
75. 위대한 백제왕국: 김택수, 고려서적, 1994년
76. 백제와 대화일본의 기원: 홍원탁, 구다라 인터내셔날, 1994년
77. 백제의 대화왜와 일본화과정: 최재석, 일지사, 1990년-헌책방 있음
78. 고구려의 정치....: 이옥-
79. 언어속에 투영된 한민족의 상고사: 정연규, 한국문화사, 2000년
80. 고구려역사 유적답사: 서길수
81. 한민족의 고유사상에 관한 연구: 송호수
82.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한순근 0. 정일영의 고대사 著
83. 치우학회 창간호
84. 민족정기 2호, 신동아 87년 2월호, 월간 민족지성 86년 11월호, 한국사학 6, 12
한국학보 35, 41집, 한국사론 4, 12, 13, 한국사논총 4집, 백제연구 2(1971), 특집호(1982)
사학연구 37(1983), 한국사연구 41(1983), 85. 우리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산책 1991년 11월호, 범우사
86. 한국민족의 원류: 김정학, 1984년
87. 공간의 역사: 김용운.김용국, 전파과학사, 1985년
88. 한국민족 문화의 연구: 손진태, 을유문화사
89. 알타이 우랄 문화의 역사를 찾아서: 장명하, 대륙연구소, 1995년
90. 한국종교 이야기: 최준식, 한울, 1995년
91. 진리의 문: 임균택, 서진출판사, 1990년
92. 단군문화기행: 윤이흠
93.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박성래
94.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강길운, 새문사, 1990년
95, 단조사고: 박은식 , 한국통사
96. 조선상고사감: 안재홍
97. 한국신화와 무속연구: 김열규, 일조각, 1982년
98. 조선전사: 정명악
99. 중국사료에 의한 조선역사 연구: 정두옥
100. 심당전서: 이고선
101. 동이문헌의 고전적 연구: 전해종
102. 한일고대 관계사의 쟁점: 강길운
103. 해동춘추: 박장현
104. 한국의 집지킴이: 김광언, 다락방, 2000년
105. 고대중국인 이야기: 하야시 미나오, 이남규 옮김, 솔 출판사, 1998년
106. 한국적 신화: 윤성범
107. 한경대전 2: 임균택
108. 한국구비전승의 연구: 성기실
109. 고대동북아시아의 민속과 문화
110. 한국의 국경연구: 양태진
111. 과학이 파헤친 세기의 거짓말: 이종호, 새로운 사람들, 203년
112. 풍류도와 한국의 도교사상: 유동식
113. 한국민속학 개설: 이두현 외
114. 토기/청자: 최건 외
115. 수메르어 격체계 대조분석: 박기용, 언어학 제19호, 1996년
116. 잃어버린 과거에의 여행: 변봉혁 역, NHK 취재반, 1984년
117. 수학의 영웅들: 김용운, 전파과학사
118.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 노중평
119. 환단제국사(상.하): 신승오, 나라누리, 2002년
120. 우리민족 엘람의 역사: 신승오, 바라, 2001년
121. 찾은나라 고조선사: 신승오, 바라, 2001년
122.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과연 조작된 것인가- 소위 문헌고증학에 대한 삼국사기
비판의 정체: 최재석
123. 백제왕실의 남천과 지배세력의 변천: 노중국, 한국사론 제4집
124. 기자신고: 윤내현, 한국사연구 41, 1983년
125. 백제의 중국관계에 관한 소고: 최근묵, 백제연구2, 1971년
126. 백제 대외관계에 관한 일시론: 이명규, 사학연구 37, 1983년
127.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와 무녕왕릉: 백제연구 특집호, 1982년
128. 고대사상의 대륙관계-고구려를 중심으로: 백산학보 4, 1968년
129.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 서영수, 역사학보 115, 1987. 9월
130. 중세 동북아세아 연구: 이용범, 동국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총서 제2집, 1976녀
131. 현대한국 역사학의 동향: 일조각, 1982년
132.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신형식, 1984년
133. 한국사연구: 신형식, 1977년
134. 삼국사기연구: 신형식, 1981년
135. 중국정사 조선열국전: 김성구, 동문선, 1996년
136. 세계속의 동과서: 무하마드 깐수, 문덕사, 1995년
137.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역사회 고대사분과, 일조각, 1994
138. 민족정론: 안호상, 이항녕, 한승조(1982년)
139. 인류의 백만년사: 이정기(1982년)
140. 환국정통사: 김덕전(1986년)
141. 한국민족사: 신천식, 김호일(1985년)
142. 고구려 역사: 리지린, 강인숙, 사회과학출판사, 논장, 1988년
143. 중세 동북아사 연구: 지배선, 일조각, 1997년
144. 고구려 영역 확장사 연구: 공석귀, 서경문화사, 1998년
145. 백제의 화북 진출과 그 배경: 방선주, 한국고대사 논선집, 한국인문과학원, 1998년
146.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지명비정의 재검토(광개토왕비 신연구): 이도학, 서라벌
군사연구소 출판부, 1999년
147. 중국남북조사 연구: 김종완, 일조각, 1997년
148. 중국고대제국 성립사 연구: 이성규, 일조각(1984년)
149. 사기-중국고대사회의 형성: 이성규, 서울대출판부(1987년)
150. 단군을 찾아서: 이형구, 살림터(1994년)
151. 단군과 고조선: 이형구, 살림터(1999년)
152. 단군 그 이해와 자료: 윤이흠, 서울대출판부(1994년)
153. 단군학 연구(창간호): 단군학회(1999년)

출판사: 온누리, 인간사, 을유문화사, 진경출판사, 가나출판사, 아세아출판사(문화사),
한뿌리, 집문당, 탐구당, 명문당

* 회남자, 자치통감, 설원, 백호통, 시경, 죽서기년, 관자, 수경주, 신이경, 춘추좌씨전
(논 문)
1. 수서와 당서의 백제사료에 대한검토: 김선욱, 백제연구 17, 1986년
2. 주서 백제전 연구: 유원재, 백제연구 19, 1988년
3. 위조의 백제침입 기사: 유원재, 백제연구 23, 1992년
4. 중국정사의 백제관: 유원재, 한국고대사 연구 6, 1993년
5. 동이전 백제관계 기사의 정리연구 백제논총 1: 박성봉, 백제문화개발,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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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백제의 요서경략에 관한 고찰: 이문수, 한사대논문집, 1980년
8. 중국 료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 김세익, 력사과학, 1967년
9. 백제의 대외관계에 대한 일시론: 이명규, 사학연구 37, 1983년
10. 백제대륙 진출설의 제문제: 강종훈, 한국고대사 논총 4, 1992년
11. 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연구의 방향-중 고문헌에 나타난 중국관-: 이성규
12. 상고조선어와 알타이자매언어 재료간의...역사비교언어학적 연구: 정연규
13. 수메르어, 국어고어 문법범주 대조분석: 조철수, 언어학 제19호, 1996년
14. 게르만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년
15.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한 고찰: 이민수, 한사대논문집, 1980년
16. 백제군의 화북진출과 그 배경: 방선주, 백산학보 11, 1971년
17.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 김상기, 백산학보 3, 1967년 김철준, 1975년
18. 조선. 선비의 선(SOYON)족 기원고: 주채혁, 백산학보 63호, 2002년
19. 상고사에 대한 나의 생각: 유봉영, 백산학보 16, 1974년
20.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형식
21. 고구려의 삼족오에 대하여: 이형구
22. 한민족 정통성 회복: 송호수
23. 기자 위저 조선사: 천관우 24. 한국북방학회 창간호
24. 실크로드와 한국어: 이기문, 1991년2월22일
25. 백두산, 북방도 한국의 영토: 김덕형, 자유 1981. 1월호
26. 대륙사관 만주대륙: 김득황, 자유 1979. 5월호
27. 한국사의 재발견과 조선: 임승국, 자유 1979. 5월호
28. 발해 효정공주 무덤관련: 정인갑, 백산문화, 1989년 발해사연구 논선집
29. 한사군과 백제강역고: 임승국, 자유 1981. 10월호
30. 한반도의 백제. 중원대륙의 실체: 임승국, 자유 1980. 6월호
31. 선진문헌에 보이는 동이의 성격: 이성규, 한국고대사연구소, 한국고대사논총 1(1991년)
32.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이선복 외, 소화(1997년)
33. 백제의 화북진출과 그 배경: 방선주, 한국고대사논선집, 한국인문과학원(1998년)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 김봉태, 대구 대문사, 2000년
한국의 원시사상: 박용숙, 문예출판사, 1985년
초고대 문명에의 초대: 박균, 드라이브사, 1983년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 김성호, 푸른숲, 2000년(푸른숲: 02-364-7871)
사 림: 임승국, 진경출판사, 1986년
표준동양삼국 역사도표: 이상시
국사개정의방향: 박시인, 주류출판, 1982년
만주원류고: 출판사 홍익재, 영인본
한민족 제1집- 한겨레의 뜻: 손보기, 교문사, 1989년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논문집: 백산자료원, 1994년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 리더스다이제스트, 동아출판사, 1989년
중국정사 조선열국전: 김성구, 동문선
호태왕비와 고대조일관계 연구: 박진석, 연변대학출판사, 1993년
단재신채호 전집(상): 단재신채호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영토문제 연구 창간호: 고려대 민족문제 연구소: 1983년
(천관우. 홍일식-광개토대왕의 영역에 대하여)
고대로 흐르는 물길: 김인배, 세종서적, 1992년
한민족의 대륙관계사: 백산학회, 1996년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 탄생 100주년 기념논문집: 단재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동방학지 제54,55,56 합집(1987년): 북연에 대해서 1(지배선)
백산학보: 제3, 4, 12, 13, 14, 16, 30, 31, 32, 47, 62, 63, 66, 67호
월간 자유: 1976년 3, 4, 5, 9월호, 1980년 6월호, 1981년 1, 10월호
신동아 87년 2월호, 2002.1월호
월간 민족지성 86년 11월호
한국사학 6, 11, 12
한국학보 5, 23, 35, 41집
한국사론 4, 12, 13
한국사논총 4집
백제연구 2(1971), 특집호(1982)
사학연구 37(1983)
한국사연구 41(1983)
우리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산책 1991년 11월호, 범우사
한국사 시민강좌 1, 3, 11, 20, 21
한국고대사 논총 1
단군학연구(창간호): 단군학회(1999년)

알타이 우랄 문화의 역사를 찾아서: 장명하, 대륙연구소, 1995년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강길운, 새문사, 1990년
세계속의 동과서: 무하마드 깐수, 문덕사, 1995년
고구려 역사: 리지린, 강인숙, 사회과학출판사, 논장, 1988년
고구려 영역 확장사 연구: 공석귀, 서경문화사, 1998년
백제의 화북 진출과 그 배경: 방선주, 한국고대사 논선집, 한국인문과학원, 1998년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지명비정의 재검토(광개토왕비 신연구): 이도학, 서라벌 군사연구소 출판부, 1999년
중국남북조사 연구: 김종완, 일조각, 1997년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사계절(2000년)
중국고대제국 성립사 연구: 이성규, 일조각(1984년)
사기-중국고대사회의 형성: 이성규, 서울대출판사(1987년)
단군과 고조선: 이형구, 살림터(1999년)
단군을 찾아서: 이형구, 살림터(1994년)
단군 그 이해와 자료: 윤이흠, 서울대출판부(1994년)

1. 김정호의 “전남의 옛지도”: 광주향토문화진흥원
2. 미국의 대외정책론: 노암 촘스키
4. 태고사의 수수께끼: 알렉산더 고르보프스키
5. 구운몽: 김만중
6. 조선왕조시대의 전국지역 특산물: 류영박(교모문고?)
7. HISTORY OF KOREA: 존 로스(JOHN ROSS) 해제: 명지대 사학과교수 정성화
8. 한국카톨릭대사전: 카톨릭출판사, 1985년
9. 청구도: 김정호, 서울경원문화사, 백산자료원, 2001년 영인본
10. 안창호 평전: 안병욱 외, 청포도, 2004년
11. 질병을 치료하는 약용식물의 효능과 재배법: 성환길
12. 날조된 역사: 도서출판 모티브, 2004년-알라딘
13. 유배지에서 만난 한국역사: 전인봉, 어진소리, 1999년
14. 조선시대의 조선시대사 한사경: 김택영, 태학사, 2001년
15. 장지연과 그 사상-장지연 연구논총 위암 장지연의 사상과 활동: 천관우,
민음사, 1992년
16. 한국의 고지도: 이찬, 범우사, 1997년
17. 입당구법 순례기: 원인, 김문경 역주, 도서출판 중심, 2001년
18. 독립신문(축쇄판): 남문서점
19. 시일야방성대곡: 이광석, 경남언론문화연구소, 1994
20. 아방강역고: 이민수 역, 범우사, 1995년
정해렴
21. 유리원판으로 보는 풍물(1891-1930): 포토라인, 1998년-서동도서관
22. 연려실기술
23. 동국문헌비고(1908년 간행)
24. 천상렬차분야지도: 권근,태조4년 1395
25. 심재온 기증유물특별전 목활자로본 옛 인쇄문화: 국립진주박물관,2004
26. 산청화계리 심씨기증 고서적의 성격: 이상필
27. 한국학자료총서 江北日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031-709-8111 매점:
740번), 1994
28. 오주연문장전산고: 훈민정음에 있음
29. 주시경전서 6권: 김민수, 탑출판사, 1992
30. 청해이씨기증고문서, 여산송씨기증고문서: 경기도박물관
31. 매천야록 원문역주본, 역주 매천야록: 황현, 알라딘
32. 장서각 제9집(국조정토록): 알라딘
33. 구산선문 최초가람 실상사: 선우도량출판부, 2000.3판
34. 파란눈에 비친 100년 전의 한국(코리아스케치): 국립민속박물관
(02-720-3138), 신유문화사 제작(02-338-6273)
35. 정감록 원본
36. 가뎡잡지(1906-1907)
37. 황성신문(1898-1910)
38. 판소리: 김한영,김득수, 백문사, 2000.3쇄
39. 한국기독교의 역사 2: 한국기독교사 연구회, 기독교문사, 1989
40. 토정가장결(뎡감록비결 에 있음): 규장각
41. 은봉전서: 안방준-은봉야사별록(김종윤)
42. 주시경의 저서: 국어문법, 국어운전음학
43. 조선대동신사보(1913)
44. 월인석보: 서강대학교출판부, 1995.3쇄
45. 동국정운: 간송문고, 건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46. 홍무정운
47. 대동운부군옥: 알라딘
48. 한국지명총람 1.2: 한글학회
49. 보한재집(동국정운 序): 신숙주
50. 고등한문독본: 박은식, 1910
51. 반계수록: 유형원
52. 이천만동포에 고하노라: 청하서림 검색
53.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도집
54. 해동역사 권10 세기 10 신라: 한치윤(한진서)
55. 광주이씨소장고문서: ‘승정원 사초’ ‘도성대지도'-서울역사박물관
56. 육사 어머니의 문집: 이원성(육사의 6촌)
57. 청구영언: 김천택
58. 비변사 등록유초 59. 옥총
60. History of Corea : London 1891년: 존 로스 John Ross:스코틀랜드출신
61. 삼도수군통제영 여수동사: 여수문화원 ,1993-姑蘇洞, 姑蘇臺, 蘇洞 검색
62. 먼나라 꼬레: 경기도박물관
63. 동의보감: 허준
64. 세계인물 대회고록: 방기환 외2, 한국출판공사, 1989
65. 백범일지 친필영인본: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