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수학
고대 오리엔트
사회의 형태가 점차 발전되어감에 따라 초기의 수학도 실용적인 토대 위에서 발전해 갔다. 신석기 시대의 농경문화의 사회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몇몇 큰 강의 유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아프리카의 나일 강변, 서아시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메소포타미아), 남 중앙아시아의 인더스 강 유역, 동아시아의 황하 유역이었다. 강은 편리한 수송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배수, 치수, 관개 등으로 강 유역의 땅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광대한 사업은 전에는 서로 떨어져 있던 지역을 결합시켰고 또 그러한 사업에 따르는 공사, 제정, 관리경영 등과 더불어 그들 사회가 창조된 목적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지식과 그에 수반되는 수학의 발전을 요구했다. 따라서 초기의 수학은 주로 고대 오리엔트의 지역에서 농업이나 토목, 건축과 같은 일에 필요한 실용적인 과학으로서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일은 하기 위해서는 측량법을 개발해야 했고 또 거래의 목적이나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데 필요한 회계 업무의 발전이 필요했다.
방금 살펴보았듯이 초기 수학의 특징은 실용적인 산술과 측량에 있었다. 특별한 기교는 이러한 실용과학의 촉진과 응용 또는 교육을 통하여 우연히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추상화 경향이 발전하게 되었고, 또 어느 정도로는 과학 그 자체를 위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대수가 산술로부터 발전하였으며 이론 기하학의 시초가 측량으로부터 발전하였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이루어진 발견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이들 어려움의 한 가지는 당시의 사회 구조가 정적인 상태에 있었고 또 어떤 지역은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그 발견이 보존되는 데 필요한 종이 재료가 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영구적인 구운 점토판을 사용했고 이집트인들은 돌과 파피루스를 사용했는데, 다행히도 후자는 그 지역의 건조한 기후 덕분으로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나무껍질이나 대나무와 같은 썩기 쉬운 재료를 사용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의 과학과 수학에 대한 상당한 양의 지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반면에 고대 중국과 인도에서의 연구는 확실하게 전해진 것이 별로 없다. 따라서 헬레니즘 이전 시대의 수학을 주로 살펴 볼 이 장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 관심을 제한하게 될 것이다.
바빌로니아
1. 기원
19세기의 처음 50년 이래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한 고고학자들은 약 50만개의 점토판을 체계적으로 발굴해 냈는데 그 점토판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중 5만개는 노대 니푸르(Nippur)의 유적지에서만 파낸 것이다. 그 중에는 대단히 훌륭한 수집품도 많이 있었는데 주로 파리, 베를린, 런던 등의 대 박물관과 예일, 컬럼비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고고학 전시관 등에 소장되어 잇다. 이 점토판들은 크기도 다양해서 겨우 몇 평방 인치밖에 안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책의 크기만한 것까지 있다. 글자가 판의 한쪽 면에만 있는 경우도 있고 양쪽면 모두에 있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판의 가장자리 둘레에 있는 경우도 있다.
50만개의 점토판 중에서 약 300개가 수학에 관한 점토판으로 판명되었는데 수학에 관한 표와 문제가 적혀 잇다. 오늘날의 고대 바빌로니아인의 수학에 대한 지식이 바로 이들 수학판을 학문적으로 판독하고 번역해서 얻은 것이다.
바빌로니아 점토판이 발굴되고 그의 쐐기문자 원문을 해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들 판으로부터 당시의 생활상과 관심거리를 알게 되었고, 또 바빌로니아 역사가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점토판의 수학 원문을 보면 기원전 2100년경의 최후의 수메르인 시대로 연대가 추정되는 것이 있고, 그 다음 시대로는 기원전 1600년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바빌로니아 왕조인 함무라비 왕 시대의 것이 대단히 많고, 그 다음에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300년까지 이어지는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신바빌로니아 제국시대의 것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와 세레우시단(Seleucidan) 시대의 것도 이어진다.
2. 상업과 농업수학
가장 오래된 점토판조차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계산술을 보여주고 있고 또 60진법 위치 체계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졌음을 분명하게 해 준다. 이 초기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떤 판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 화폐, 영수증, 약속어음, 회계, 이익, 저당, 판매, 보증 등에 매우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상업을 하는 회사가 있었다고 기록한 판도 있고 무게나 크기의 체계를 다룬 것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달력은 아주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잇는데 그것은 그들의 일 년이 춘분에서 시작했다는 점이고 또 첫달이 황소자리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4700년 경의 춘분에 태양이 황소자리별에 있었으므로 바빌로니아인들이 이미 기원전 4000~5000년 경전부터 약간의 산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기하학
바빌로니아의 기하학은 거의 실제 측량과 관계된 것이다. 많은 구체적인 예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의 바빌로니아인들이 직사각형의 면적, 직각삼각형과 이등별삼각형의 면적(아마 일발 삼각형의 면적까지 포함한 것 같음). 측별이 평행인 변과 수직인 사다리꼴의 면적, 직평행 6면체의 부피, 더욱 일반적으로 특별한 사다리꼴 밑면을 갖는 직각기둥의 부피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또 원주는 직경의 세 배로 했고 원의 면적은 원주의 제곱의 1/12로 했는데 이는 π=3으로 생각하면 정확한 공식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원주를 360등분 하는 것도 틀림없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업적인 것 같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이 수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이 제안되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노이게바우어의 다음 주장이 가장 그럴 듯 하다. 초기 수메르인 시대에는 오늘날의 7마일쯤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 마일'이라는 커다란 거리 단위가 있었다. 바빌로니아 마일은 보다 긴 거리를 측정할 때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시간의 단위(즉, 1바빌로니아 마일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나중에 바빌로니아 천문학에서 천체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이루어지는 처음 기원전 1000년 동안에 종종 바빌로니아 시간-마일이 시간의 간격을 측정하는 데 이용되었다. 하루는 12시간-마일과 같았고 또 완전히 하루가 하늘이 한 바퀴 도는 것과 같았으므로 완전한 1회전이 12등분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편의를 위하여 다시 바빌로니아 마일이 30등분으로 나누어졌고 1회전이 (12)(30)=360등분되었다.
4. 대수
기원전 2000년까지 바빌로니아 산술은 잘 개발된 산문 형식의 대수로 발전하였는데 당시에 벌써 2차 방정식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3차 방정식과 4차 방정식까지 논의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표 제작자였으며 고등 기술을 가진 계산가였고 분명히 기하학보다는 대수에 더 강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이 다룬 문제의 깊이나 다양성 앞에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5. 플림프톤 322
지금까지 분석된 바빌로니아 수학판 중에서 가장 놀랄만한 것은 '플림프톤 322'(Plimlton 322)로 알려진 것이다. 이 이름은 그것이 컬럼비아 대학의 플림프톤 소장품의 목록번호 322라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기원전 1900년에서 기원 전 1600년 사이로 연대가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고어체로 쓰여셔 있는데 그것은 1945년에 처음으로 노이게바우어와 사크스(Sachs)에 의해 분석되었다. 직각삼각형의 변의 크기가 될 수 있는 {3,4,5}와 같은 세 개의 양의 정수의 집합을 피타고라스 3쌍(primitive Pythagorean triple)이라고 한다.
플림프톤 322에 대한 분석은 바빌로니아 수학판이 대단히 주의깊게 관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전에는 그러한 판이 단순히 상업적 목곡이나 기록으로 간단히 처리되어 왔다.
이 집 트
1. 기원과 연대
일반적으로 세평과는 달리 고대 이집트의 수학은 결코 바빌로니아 수학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빌로니아의 보다 진보된 경제적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또 바빌로니아는 지정학적으로 많은 대상(隊商)들이 다니는 길목에 위치했지만 이집트는 반고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나일 강은 흐름이 자주 바뀌는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과는 달리 광대한 토목공사나 관리상의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바빌로니아의 수학판이 최근까지 해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집트가 고대의 역사적 조사에 있어서 오랜 동안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 되어 왔다. 그것은 이집트인이 죽음을 경외하였고 또 그 지역이 매우 건조한 기후이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는 무덤과 화려하게 조각된 벽으로 이루어진 사원들을 짓게 했고 후자의 이유가 많은 파피루스와 그 밖의 물건을 썩지 않게 보존하도록 했다.
2. 산술과 대수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는 모두가 수치 계산인데 대부분 매우 간단한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문제가 실용적인 기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론적 성질을 띠고 있는 경우도 몇 가지 있다.
곱셈의 한 예로서 26과 33을 곱해 보자. 26=16+8+2이므로 33의 배수를 더하면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33
*2 66
4 132
*8 264
*16 528
858
별표를 달아서 표시한 33의 배수를 더하면 858이라는 답을 준다. 이제 753을 26으로 나누어 보자. 우선 배가를 계속해서 피제수 753을 초과하게 되는 바로 앞까지 제수 26을 계속적으로 배가해 간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26
2 52
*4 104
*8 208
*16 416
28
한편
753 = 416+337
= 416+208+129
= 416+208+104+25
이므로 위의 열에서 별표시가 붙은 항을 주시하면 몫이 16+8+4=28이고 나머지가 25임을 알 수 있다. 곱셈과 나눗셈의 이 이집트 방식은 곱셈표를 배워야 할 필요를 없애줄 뿐만 아니라 수판에서도 매우 편리했으므로 수판이 이용되는 기간에는 물론이고 그 외의 기간에서도 계속해서 이 방법이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린드 파피루스와 모스크바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는 실용적인 기원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빵과 맥주의 농도라든가 가축들의 먹이 혼합, 곡식의 저장과 같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 많은 것이 간단한 1차 방정식에 관한 문제인데 그것을 일반적으로 나중에 유럽에서 임시위치법(臨時位置法, rule of false position)으로 알려진 방법에 의하여 풀렸다.
χ+χ/7+24
를 풀기 위해서 χ에 임의의 편리한 값 하나를 가정한다. 예를 들어 χ+7이라고 하면 χ+χ/7+24=8이 되는데 8의 세 배가 24이므로 정확한 χ의 같은 3(7), 즉 21이 된다.
3. 기하학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 중에 26개가 기하학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땅의 면적과 곡물창고의 크기를 계산하는 데 필요한 측량 공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원의 면적은 직경의 8/9의 제곱과 같다고 했고 직원기둥의 부피는 밑면의 면적과 높이의 곱으로 구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면적은 밑변과 높이의 곱의 반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보인다.
모스크바 파피루스에는 정사각 피라미드의 절두체의 부피에 대한 정확한 공식의 한 수치 예가 나오는 데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고대 오리엔트의 수학에서는 이 공식에 대한 어떤 확실한 예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몇 가지 추축만으로 그 공식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벨(E.T. Bell)이 이 초기의 이집트의 예를 비유하여 "가장 거대한 이집트의 피라미드"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다음은 고대 이집트의 수학과 관계가 잇는 명확한 항목을 연대순으로 열거한 것이다. 이 항목 외에도 오늘날 우리의 지식에 기여한 많은 비문과 파피루스가 있다.
1) 기원전 3100년경
옥스퍼드에 있는 한 박물관에 이 당시로 연대가 추정되는 호화스러운 이집트 철퇴가 있다. 이 철퇴에는 전투의 승리를 기록한 이집트 상형문자로 씌여진 수백만개의 글자가 있는데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수가 나온다.
2) 기원전 2900년경
기제(Gizeh: 카이로 부근의 도시)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는 기원전 2900년경에 세워진 것인데 이는 틀림없이 어떤 수학적, 공학적 문제가 관계되었을 것이다. 그 피라미드는 13에이커의 땅에 평균 2.5톤의 무게의 돌이 이백만개 이상 조심스럽게 쌓여져 만들어진 것이다. 이 돌들은 나일 강가의 사암 채석장에서 옳겨 온 것이었다. 피라미드 안에 있는 어떤 방의 천장은 54톤이나 나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길이가 7피트이고 두께가 4피트나 되는 이 돌들은 6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채석장으로부터 운반되어 와서 지상에서 200피트가 되는 높이까지 올려진 것이다. 또 정사각형의 밑변의 상대 모차가 1/14000보다 작고 직각의 상대오차가 1/27000보다 작다. 그러나 이 인상적인 통계치에 함축된 공학기술은 그 작업이 10만명의 사람이 동원되어 30년 동안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상당히 감소된다.
3) 기원전 1850년경
이는 모스크바 파피루스의 근사적인 연대로서 모스크바 파피루스는 그것이 편찬된 것보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 25개의 문제가 실린 수학책이다. 모스크바 파피루스는 1893년에 이집트에서 구입되어 1930년에 편집자의 주석을 달아 인쇄되었다. 그것은 볼래 가로가 3인치이고 세로가 18인치였다.
4) 기원전 1850년경
추선과 가늠대로 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학 기구가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베를린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5) 기원전 1650년경
이는 린드(혹은 아메스) 파피루스의 근사적인 연대인데 그것은 실제의 편람 형태로 된 수학책으로서 필경가 아메스(Ahmes)가 그 이전의 작품을 신성문자로 베껴 쓴 85개의 문제가 수록되어 있다. 이 파피루스는 스코틀렌드의 이집트학 학자인 린드(A. Henry Rhind)가 1858년에 이집트에서 구입한 것인데 나중에는 대영박물관에 보존되게 되었다. 이 파피루스와 모스크바 파피루스가 고대 이집트 수학의 정보에 대한 주요한 근원이다. 린드 파피루스는 1927년에 인쇄되었다. 그것은 가로가 1피트이고 세로가 18피트쯤 된다.
6) 기원전 1500년경
시브즈(Thebes: 고대 이집트의 수도에 있는 태양의 사원 앞에 세워진, 현존하는 가장 커다란 오밸리스크(방첨탑, 方尖塔))가 이 시대로 추정된다. 그것은 높이가 105피트이고 밑면은 한 변이 10피트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고 무게는 430톤쯤 된다.
7) 기원전 1500년경
베를린 박물관에 이 시대로 추정되는 해시계가 하나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해시계이다.
8) 기원전 1350년경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기언전 1350년의 롤린 파피루스는 당시에 이미 큰 수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9) 기원전 1167년경
이는 헤리스 파피루스의 연대인데 그것은 라메시스 4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만든 문서로 그의 아버지인 라메시스 3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잇다. 당시의 사원의 재산에 대한 명부 작성이 오늘날 고대 이집트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운 실용적인 셈의 가장 좋은 예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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