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치운 2013. 12. 15. 12:14

타밀어+한국어+영어 
글쓴이: 김동렬 조회수 : 73 07.01.18 16:34 http://cafe.daum.net/gujoron/1GSR/44
지난 10월 말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BC69~AD 4)를 키웠던 진한 6촌장의 사로육촌 중 고허촌의 유적이 대량 발굴되면서 이들의 정체 규명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 왕궁에서 키워지다가 자력으로 만주지역에 고구려를 세우고,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난 지 반나절 만에 성인이 돼 보름 지나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사로육촌의 6촌장 손에 13년간 키워지고 나서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된다.

진한 6촌장 인도 타밀 출신 추정

필자는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 및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설화 속에 언어적 유사성 및 해양교류 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인도 남부의 타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혁거세의 설화에 나오는 주요 명칭들이 당시 타밀어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윷놀이와 제기 등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도 타밀어 명칭과 놀이 형태가 완전히 똑같다. 박혁거세의 대부 격인 6촌장이 타밀 출신이라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도 남부 및 스리랑카 북부 출신으로 토론토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의 타밀인들 가운데 타밀인협회 및 여성단체 관계자, 힌두교성직자, 교수, 교사 등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타밀어 사전 및 역사서 등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는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서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 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의 알평은 아리야판(Aryappan)과, 자산 진지촌의 지백호는 치빠이코(Chippaiko)와,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는 구레마(Kurema)와, 금산 가리촌의 지타는 치타(Cheetha)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은 호친(Hochin)과 각각 일치한다.

이들의 출신에 대해 학계에선 “이곳(서라벌)에 오래 전부터 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는 여러 역사서의 내용과 유물 등을 분석하여 박혁거세 및 6촌장 모두를 북방유목민출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박혁거세와 6촌 주민들이 북방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서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라고만 전해오는 6촌장 만큼은 허왕후나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당시 막강한 해상력으로 아시아 전체를 누비고 다니던 인도의 타밀 출신으로 추정된다.

둘째, 박혁거세의 탄생지 근처에 있는 우물 ‘나정’은 타밀어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을 뜻하는 ‘나중(nazung)’과 거의 일치한다. 타밀어의 나주쿠(nazukku)는 “땅을 파헤쳐 이랑이나 도랑을 만들다”(=make a shallow furrow)라는 뜻의 능동형 동사인데 그 수동형동사 ‘나중구(nazungku)’는 ‘이랑이나 도랑이 만들어지다’ (=be ploughed with shallow furrows)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이라는 뜻의 명사 ‘나중(nazung)’이 바로 박혁거세의 우물 ‘나정’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8월 문화재청은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경주 시내 우물 나정을 발굴한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발굴팀은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나정의 정중앙 8각형 건물지(한 변 8m, 지름 약 20m) 주변에서 이 8각형 건물지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도랑, 즉 구거 같은 대형 구상 유적을 확인했다. 이로써 박혁거세가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로 자리매김된 것이라고 문화재청측은 설명했다.  
 
알영 부인 이름도 타밀이름과 유사

셋째,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는 현재 타밀 나두주(州) 땅에 있던 당시 타밀인들의 촐라 왕국 바닷가 마을 ‘부르구나이(Purugunai)’와 거의 일치한다. 필자는 신라 4대 왕 석탈해의 고향이 동서양 무역으로 크게 흥했던 고대 국제도시 나가파티남(Nagapattinam)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도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부르구나이가 있다.

박혁거세의 후견인 6촌장들이 이곳을 출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신들의 고향 이름을 박혁거세의 별명으로 붙여 막강한 영향력의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부르구나이는 현재 벨란간니(Velankanni)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가톨릭 교회 ‘안네 벨란간니(Annai Velankanni)’가 들어서서 명소가 됐다.

넷째, 고구려의 주몽이나 가야의 김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나지만 혁거세의 알이 박에 견주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박은 우리말과 당시 타밀어가 그 발음과 뜻에서 똑같다. 박은 현대 타밀어로는 수라이라이(Suraikai)라고 불린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 등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인도에서 건너온 6촌장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 필수품 중 하나인 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타밀인들은 일년내내 무더운 날씨를 견디려고 박을 파낸 표주박 등으로 만든 물통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목을 축이곤 했다. 이 물통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리며 호리병박으로 만든 작은 물통은 수라이 쿠담(Surai Kudam), 호박으로 만든 큰 물통은 푸사니 쿠담(Pusani Kudam)이라고 칭한다.

다섯째, 신라 이전의 나라 이름인 ‘서나벌’은 당시 산스크리트어 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밭(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 ‘벌’의 옛말이나 거센말은 ‘펄’인데 고대 타밀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아울러 ‘서라벌’도 ‘아름다운(nice)’을 뜻하는 ‘서라(Sora)’가 ‘벌(Pol)’과 합쳐져 ‘아름다운 들판’을 뜻해 새 나라의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민속놀이 명칭도 거의 비슷

여섯째,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BC 53 ~?)부인은 아리영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Ariyam)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Kaththabarayan)왕의 부인 이름인 데 이를 신라 초대 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알영부인이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는 내용도 인도 힌두교 신화에서 지혜와 총명의 여신(Goddess of Learning and Wisdom) 사라스와티(Saraswati)가 백조(swan)의 부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 알영부인은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추앙받았다는 것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 타밀인들이 사라스와티를 숭배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힌두교와 관련된 것들이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는 데 이들 모두 힌두교와 관련 있다.

힌두교의 주요신 시바(Shiva), 부인 파르바티(Parvati), 두 아들 가네쉬(Ganesh)와 무루간(Murugan)을 각각 고대 타밀어로 ‘이비가지(Ibigaji)’ ‘정견(Chongyon)’ ‘뇌질주일(Noejil Juil)’ ‘뇌질청예(Nojil Chongye)’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펴낸 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개정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곱째, 박혁거세왕은 재임 17년(기원전 40년)에 알영부인을 대동, 6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고 전하고 있다. 즉, 삼과 누에로부터 얻은 실로 길쌈해서 삼베옷과 비단옷 등을 해입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곡식생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다. 또 제3대 유리왕은 추석 때 길쌈놀이를 실시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경악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은 농경사회의 주요 명칭들을 다음의 비교표로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새해 첫날 우리가 즐기는 윷놀이, 제기놀이,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당시 타밀어로 각각 ‘윷노리(Yuddh, Yuth Nori)’ ‘제기노리(Jegi Nori)’ ‘추불 노리(Chupul Nori)’ ‘ 팡이 노리(Pamgi Nori)’로 불리며 그 형태도 완전히 똑같다. ‘놀이’는 고대 타밀어로 ‘노리(Noori), 또는 노루(Nooru)’로 불렸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빌햐야들(Vilaiyattu)’로 불린다. 다음의 비교표를 보면 타밀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웃 사람으로 느껴진다.

 

고인돌 문화 인도에서도 발견

현대 타밀어에서도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난(나), 니(니)””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바나깜(반갑다)” 난, 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모땅(몽땅)””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등 거의 똑같은 단어와 어구들이 적지 않다.

이는 박혁거세 부부의 대부격인 6촌장들이 인도 타밀의 것을 한반도에 소개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 이전에 중국대륙을 통해 벼나 보리농사가 이미 도입됐다고 하더라도 농사 관련용어 및 민속놀이 등은 타밀출신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우리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박혁거세와 석탈해 등 신라 초기의 왕들의 난생설과 경주와 포항 등 신라지역에서 대거 발견되는 고인돌 등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인 한양대의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 등의 지리적 분포가 인도-동남아시아-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인도 문화의 영향을 시사했다. 김교수는 또 “신라주민은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중국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그리고 고구려에게 멸망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지적했는데 필자는 토착 농경인들을 이끌던 6촌장들이 타밀출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주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인도 남부 해안지대의 타밀인들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까지, 동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활발하게 진출하다가 대만 북쪽으로 흐르는 흑조 난류를 타고 북상, 급기야 한반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타밀인들은 사로 6촌 가운데 동해안과 접한 금산가리촌에 도착한 뒤 내륙으로 들어가 경주의 사로 6촌을 개척,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타가 통치한 영일만 부근 금산가리촌은 현재 동해안과 접한 경주시 감포읍과 양남면, 양북면 등 3개 지역 모두를 포함했다.

또, 필자가 인도 타밀 출신으로 간주하는 신라 제4대왕 석탈해의 알이 담긴 궤짝도 동해를 표류하다가 동해안의 아진포에 당도하는데 이 곳이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라고 석씨전국대종회가 밝히고 있어 이래 저래 금산가리촌은 당시 인도 타밀인들의 도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경주 덕천리 유적 발굴작업에서 출토된 목관묘 11기와 청동기 항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그리고 매장된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알려주는 오리모양 토기 11개와 말과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고리 등이 당시 인도 타밀의 역사적 유물들과 비교, 추적해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6촌장들은 물론 박혁거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

김정남〈타밀학회장·캐나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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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우리말의 유사성은 제가 늘 이야기 하는 건데 영어의 조상은 인도유럽어이고
인도유럽어와 타밀어의 유사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오. 

 

posted by 치운 2013. 12. 15. 12:08

질문 : 질문 : 타밀어와 한국어는 연관성을 가지는 가?
내용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주에서 살면서 가끔씩 드는 생각은 혹시 타밀어가 우리말과 비슷한 것들이 있어, 두 언어 사이에 연관성이 있지 않을 까 하는 것이다. 먼저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한국어 (엄마) : 타밀어 (엄마)
2. 한국어 (아빠) : 타밀어 (아빠)
3. 한국어 (나) : 타밀어 (난)
4. 한국어 (너) : 타밀어 (닌)
5. 한국어 (꼬마) : 타밀어 (꾸마르)
6. 한국어 (쌀) : 타밀어 (사듬)
7. 한국어 (이것) : 타밀어 (이더)

그리고 유사성을 가지는 지는 의문이지만 우리말로 ‘똥배’라는 말과 타밀어의 ‘톳배’라는 부분이 어쩐지 닮아 있다. 그 의미는 불룩 나온 배를 경멸하여 말하는 것이다.

 

두 언어의 유사성은 단순히 낱말들에 지나지않고 어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타밀어로 ‘잉거 뽀레?’는 한국어로 ‘어디로 가니? 이다. ‘잉거=어디로’와 ‘뽀레=가니?’ 의 조합이다. 거기다가 존경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잉거’등이 쓰여 우리말의 ‘~니까?’등과 같은 구실을 한다. 위의 타밀 문장을 존경의 표현으로 나타내면 ‘잉거 뽀렝거?’ 라고 표현 하면 된다.

아무런 학문적 근거 없이 단순히 발견한 몇 마디의 말과 문장으로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을 논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이렇게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이 의문에 대한 갈증을 해갈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올립니다.
 
http://blog.daum.net/laserjet/4025874?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laserjet%2F4025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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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1. 28. 11:28

[한겨레] [원문읽기] 국어의 자음 체계는, 특히 파열음 계열에서 영어, 독어, 불어 등과 같은 인도 유럽 계통의 언어가 이중 체계(二重體系)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삼중 체계(三重體系)로 되어 있다. 단모음의 수도 10개나 될 정도로 많다. 또, 국어 음운 구조의 특질로는 두음 법칙(頭音法則), 음절 끝소리 규칙, 모음 조화(母音調和), 동화 작용(同化作用) 등을 들 수가 있다.

두음 법칙이란, 첫소리에 둘 이상의 자음이나 유음 ㉠‘ㄹ’과 ‘ㄴ’음, ‘냐, 녀, 뇨, 뉴, 니’ 등의 소리가 오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두음 법칙은 알타이 어의 공통 특질의 하나로 꼽힌다. 이 중에서 중자음 ‘__[時], __[隙], __[米], __[女兒]’ 등은 중세 국어에서는 사용되기도 했지만, 임진란을 전후하여 모두 단자음으로 바뀌어 지금은 사라졌다. 따라서, 외국어에서는 ‘student, sketch, spring’ 등과 같이 여러 개의 자음이 첫소리에 올 수 있지만, 국어에서는 두세 음절로 나누어 발음하고 표기한다.

중세 국어에서는 ‘러울, 라귀, 락시’ 등과 같이 /ㄹ/ 소리도 첫소리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다. 현대 국어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본래 어두에 /ㄹ/음을 가졌던 한자로 ‘라, 로, 루’ 등은 /나, 노, 누/로, /랴, 려, 료, 류, 리/ 등은 /야, 여, 요, 유, 이/로 바꾸어 발음한다. 구개음화된 /ㄴ/, 즉 /냐, 녀, 뇨, 뉴, 니/ 등이 어두에 쓰이지 않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음절 끝소리 규칙이란, 자음이 음절 끝에 올 때에 터지지 아니하고 닫힌 상태로 발음되는 현상을 이른다. 따라서, 이들 끝소리는 단독으로 발음되거나 자음과 연결될 때, 또는 모음으로 시작되더라도 실질 형태소가 뒤따를 때에는 제 음가(音價)대로 발음되지 아니하고 대표음으로 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ㄳ, ㅄ, ㄺ’ 등과 같은 두 개의 자음이 음절 끝에 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넋, 값과, 흙 위’가 ‘넉, 갑과, 흑 위(→[흐귀])’로 발음되는 것이 그것이다.

모음 조화도 알타이 어의 공통 특질 중의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다. 국어에서 모음 조화란, 알기 쉽게 말하면 양성 모음은 양성 모음끼리, 음성 모음은 음성 모음끼리 결합하려는 현상이다. 이것은 발음하는 위치가 비슷한 모음끼리 결합시킴으로써 발음을 쉽게 하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음 조화는 15세기에는 엄격하게 지켜졌으나, 그 뒤 차차 약화되어 왔다. 현대어에서는 의성어, 의태어나 어간과 어미의 연결 구조 등에 남아 있을 뿐이다.

동화 작용에는 모음 동화와 자음 동화가 있다. 모음 동화는 흔히 ‘ㅣ’ 모음 동화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살리어→살리여’나 ‘손잡이→손잽이’와 같이 ‘ㅣ’ 모음의 앞 뒤의 모음이 ‘ㅣ’ 모음을 닮아 ‘ㅣ’ 모음과 비슷한 정설 모음(前舌)으로 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자음 동화에는 비음화(鼻音化)와 설측음화(舌側音化)가 있다. 비음화는 비음이 아닌 소리가 비음에 동화되어 같은 비음으로 변하는 것이고, 설측음화는 설측음이 아닌 말소리가 설측음을 닮아 설측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들 동화 작용은 발음의 편의를 좇아 변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ㅣ’ 모음 동화는 일반적으로 표준 발음법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음 동화는 표준 발음법으로 인정한다.

이 밖에, 국어의 음운상의 특질로는 음상(音相)의 차이로 인하여 표현 의미가 달라지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국어의 자음 중에서 파열음 계열은 삼중 체계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하였거니와, 모음 체계도 양성과 음성으로 구별되어,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음상의 차이가 어감(語感)을 다르게 만든다.

6차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상), 3. 언어와 국어 (3)국어의 특질 중에서 [되집기마당] 문장 부호 ㉠작은따옴표(‘ ’), 낫표(「 」) 가로쓰기에는 작은따옴표, 세로쓰기에는 낫표를 씁니다.

⑴ 따온 말 가운데 다시 따온 말이 들어 있을 때 씁니다. 예) “여러분! 침착해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⑵ 마음속으로 한 말을 적을 때 씁니다. 예) ‘만약 내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모두들 깜짝 놀라겠지.’ ⑶ 문장에서 중요한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드러냄표 대신 쓰기도 합니다.

예)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이만기/언어영역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posted by 치운 2013. 10. 30. 12:07

고구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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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즉고려때에도또는으로표기한것으

로보아 고대국어시절에도이와비슷한어휘가쓰였을가능성

이있기때문이다 의소릿값을추정해보자

의상고음은端幽로성모端/t-/는ㄷt)로반영되고

운부幽/-ə/는/-ioɡ -iˆoɡ -eə, iə, -iu/ 등으로재구하였다

핵모-ə는운미음-u와결부되어오u)로반영되므로 상고

음기층의고구려한자음은도tu)로추정한다

중고음은端篠로效섭의개구4등상성에속한다 성모端

/t-/는ㄷt)로반영되고 운모篠/-ieu/는/-ieu, -iɛ, -ieu,

-ieu/ 등으로재구하였다 핵모-e-는운미음-u와결부되어

(u)로실현되고 여기에개모-i-가결합되어 중고음기층의

고구려한자음은됴tiu)로반영되었을것으로추정한다

․鳥…「도tu)」(상고음기층의고구려한자음

烏」를「鳥」의오기로보면「鳥斯」는「도(tu-sɐ」가된다

즉‘猪’의고구려어를「도」로생각할수있다. 고대국어시절

부터발생한폐음절화현상에의하여어말모음이탈락하면 끝

소리「ㅅ」은「ㄷ」에중화되어고려때이미「돋」이쓰인것으로

추정한다

posted by 치운 2013. 10. 30. 11:58

한국어의 계통을 찾아서

손주일


1. 머리말


이 글에 우리는 한국어의 계통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추적해왔는가, 그리고 이 논의의 현재적 상황은 어떠한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어는 언제부터 있었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한국어의 형성사는 한국어의 기원적 성격을 밝히는 일과 그 역사적 형성 과정을 추적하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언어는 어디서 기원했는가? 우리는 대부분 이 문제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기원은 언어학적으로 구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학으로는 한국어의 系統을 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어의 선사의 모습은 의문에 쌓여 있다. 즉, 한국어는 그 계통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언어이다.

최근까지도 한국어는 유형적인 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이 있고 동일 어원을 가진 낱말이 발견되는 점에서, 알타이 계통설이 통속화되어 있고, 또 한국어와 일본어와의 동계설이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은 아직 해명되어야 할 너무나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가설 수준의 학설일 뿐이다.


2. 언어의 계통적 분류와 한국어


언어의 계통은 親族關係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고립된 언어의 계통을 밝힌다는 것은, 그것과 어떤 다른 언어(또는 언어군) 사이에 친족관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은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들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의 언어에서 분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언어에서 두 개 이상의 언어로 갈라지는 언어들은 서로 친족관계에 있다고 하며, 그 옛날의 한 언어를 共通祖語(Parent Language)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룰 때 語族이 된다.

지구상에는 3000~6000개의 언어가 있다고 하는데, 이들을 계통적으로 분류한 인구어족을 위시한 적지 않은 어족이 확립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그 계통이 밝혀지지 않은 고립된 언어들이 산재하여 언어의 완전한 계통적 분류는 난망한 실정이다. 아시아에서 그 계통적 분류가 어려운 언어로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꼽는다.


3. 우랄-알타어족과 한국어


필란드 학자 카스트렌(Castren)에 의하여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방대한 영역의 언어들을 포괄하는 우랄-알타이어족이 구성된 것은 19세기 중엽의 일이었다. 이 시기의 이론적 특징은 공통특징론인데, 이른바 교착성, 모음조화, 두음법칙, 말음법칙, 性?數의 결여 등이 곧 이 어족의 특징으로 거론되었다.

한국어의 계통에 관한 진술은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로니(Rosny 1864), 달레(Dallet 1874), 로스(Ross 1878) 등은 한국어와 타르타르어(Tartar, 대체로 우랄-알타이어에 해당) 사이의 유형적 유사성을 지적했는데, 다같이 구체적인 언어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피상적 관찰에 그친 것이었다. 한편 아스톤(Aston 1879)은 한국어와 일본어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양 언어를 비교 연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20 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어의 계통론이 추구하는 비교 대상은 주로 우랄-알타이어가 되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白鳥庫吉(1914~1916)은 595개의 이르는 한국어의 낱말을 알타이제어와 비교했는데, 특히 만주-퉁구스어, 몽골어, 튀르크어 등 알타이제어와 비교한 것이었다. 이 어휘 비교에서는 음운대응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의미와 형태가 유사한 낱말만이 비교되었으나 이 작업은 구체적인 비교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뿔리바노프(Polivanov 1927)는 최초로 음운과 형태면에 걸쳐 언급하면서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친근성을 찾으려했다. 그는 알타이제어의 *l2, *r2와 한국어 r의 대응을 다루었는데, 이러한 음운대응과 그 대응 예로 든 낱말의 비교는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小倉進平(1934)은 한국어와 우랄-알타이어 그리고 일본어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한?일 두 언어의 관계가 완전한 同系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좀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4. 알타이어족과 한국어


한국어의 계통은 알타이어족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편 람스테트(G.J.Ramstedt)는 필랜드의 몽골어, 알타이어 학자이다. 그는 토이기?몽골어(?만주어)-퉁구스어 간에 친근관계가 있다는 알타이어족설을 내놓았고, 나아가 구체적인 언어 사실을 들어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친근성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앞서의 공통특징론을 뛰어 넘어 외견상의 유형적 유사성이나 비슷한 낱말을 나열하지 않고, 일정한 음운대응을 관찰하고 또 문법 형태소를 분석하여 그 일치하는 것을 찾는 진정한 비교언어학적 방법을 구사했다. 람스테트(1952,1957,1966)의 '알타이어학 개설(I~III)'은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의 '한국어 어원 연구(1949)'도 이 방면의 기념비적 논문이라 할만 하다. 그런데, 람스테트(1950)는 "한국어를 용이하게 알타이어군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라고 언급하여 모순된 말을 한 것과, "한국어는 앞으로 더 연구를 요하는 불가사의한 언어이다.(람스테트의 편지 ; 포페 1950:572)"라고 말한 것을 참조하면 그가 행한 한국어의 계통 연구는 어떤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람스테트에 이어서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친근관계를 한층 깊이 있게 연구하려 한 것은 포페(N.Poppe)이다. 포페(1960)의 '알타이제어 비교 문법'은 음운론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국어의 낱말 82개가 비교 대상인데, 이 작업은 람스테트에서보다 훨씬 정밀화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알타이제어와 한국어의 관계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국어에 적어도 알타이어 기층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Poppe 1960:6)."라고 신중하게 말했다. 그는 '한국어의 위치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전제한 다음 한국어의 계통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1) 한국어는 알타이제어와 친근관계가 있을 수 있다. (2) 원시한국어는 알타이 통일체가 존재하기 전에 분열했을지 모른다.[즉 분열 연대가 대단히 이르다.] (3) 한국어에는 알타이어 기층밖에는 없다. 즉 한국어는 기원적으로 비알타이어인데 이것이 기층언어인 고대 알타이어를 흡수했던가 혹은 기층언어인 알타이어 위에 얹혔을지도 모른다. 이 진술은 한국어의 계통 추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대변해 준다.

최근 한국어의 계통에 큰 관심을 보여주는 외국인 학자가 있다. 밀러(Miller 1980:146)는 한국어는 일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언어는 알타이어족 중 퉁구스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이어서 한국어의 고지명에서 추출되는 낱말을 알타이제어 또는 고대 일본어와 비교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를 모두 고대 한국어의 변종으로 취급한다. 한편, 레빈(Lewin 1981)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언어를 모두 고대한국어archaic Korean로 보고 있다.


5. 국내학자들의 한국어 계통 연구


우리의 한국어 계통 연구는 해방 후에 알타이제어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람스테트와 포페의 영향이 컸다. 그 첫 연구는 분뇨어(糞尿語)를 중심으로 한일 어휘 비교를 꾀한 이숭녕(1956)부터라 할 수 있다. 그후, 이기문(1967)은 구체적인 언어 사실을 들어 한국어와 알타이어와의 관계를 개관했고, 이기문(1963), 송민(1965,1973,1974), 김사엽(1974), 이남덕(1977) 등은 한국어와 일본어와의 비교 연구에 깊이를 더했다. 김방한(1978)은 음운론과 형태론의 몇 가지 면에서 한국어와 알타이제어를 비교한 바 있으며, 김방한(1981)에서는 한국어의 저층에 잠정적으로 '원시한반도어'라고 부르는 어떤 미지의 언어가 있다는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알타이제어 중에서 만주어와 비교한 것은 이기문(1958), 박은용(1974,1975), 성백인(1978), 김동소(1981) 등이 있으며, 몽고어와의 비교에는 김형수(1981)가 있다.

한편 김방한(1976,1977)에서는 한국어에 길리야크어의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여 한국어에 있는 비알타이어적 문제를 제기했다.


6. 알타이제어와 한국어와의 관계


람스테트(1952)는 알타이어족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국어를 알게 되어 최초로 한국어까지 아우른 알타이어족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표1], [표2]와 같이 한국어의 위치를 다른 세 어군과 동등한 것으로 보았다.

 

     몽고인        北              퉁구스인

 

          西                                東  

 

           토이기인     南              한국인

 

                               [표1]

                                                           퉁구스인
                                    몽고인                   한국인
                                                      토이기인
                                                                [표2]


그는 한국어는 한편으로는 퉁구스와 한편으로는 토이기어와 친근성을 보여주고, 토이기어는 한국어와 몽고어와 친근성을 보여주며, 몽고어는 토이기어와 퉁구스어와 친근성을 보여주며, 퉁구스어는 몽고어와 한국어와 친근성을 보여준다고 하여 이와 같은 가설을 세웠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포페(1960)는,

"한국어의 언어재는 퉁구스제어와 가장 가깝다. (중략) 그런데 한국어는 상고중국어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은 한국어가 매우 일찍 분리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원시한국어가 알타이 공통조어에서 맨먼저 분리했을 것이다. 그 뒤에는 토이기?몽고?퉁구스 단일어 시대가 꽤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 오늘의 토이기어의 선조가 분리했을 것이며, 몽고?퉁구스 단일어가 얼마 동안 존속하다가 드디어 몽고어와 퉁구스어도 분리했을 것이다."

라고 하며, 다음과 같은 [표3]으로 나타냈다.

 


                                 알타이공통어

                      |                                    |

           토이기?몽고?퉁구스 공통어         원시한국어

            |                         |                     |

        先토이기어       몽고?퉁구스 공통어           |

       |         |                 |           |             |

원시토이기어   츄바슈조어    원시몽고어  원시퉁구스어      |

     |              |             |            |             |

  토이기어      츄바슈어      몽고제어    퉁구스제어    한국어

 

   [표3]


한국어의 위치와 분화 시기의 추정에 대한 포페의 논거는 비록 취약(상고중국어로부터의 차용)한 측면이 있으나 한국어가 맨먼저 떨어져 나왔다고 하는 그의 가설은 어느 정도 취신할 만하다.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전통적 3 어군과의 관계는 그들 3 어군들끼리의 관계보다는 그 친근성이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페의 견해만으로는 한국어의 위치가 확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알타이 공통조어 단계에 있어서의 상태와 그 분화 과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을 것이며, 중세국어가 신라어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라면 한국어의 위치는 좀더 미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7.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 한국어의 계통 연구에 대한 현황과 문제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와의 친근성을 전제로 하고 또 알타이어와의 비교 연구에 의해서 한국어의 계통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해 왔다. 둘째, 한국어에서 알타이제어와 공통된 요소를 발견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이러한 연구의 결과가 과연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친근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인지 의문이다. 셋째, 대부분의 연구가 한국어와 알타이제어 간에 일치의 추구에 주력해 왔으나, 앞으로의 연구는 비알타이어적 요소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 대안 중의 하나는 원시한반도어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넷째, 한국어에서 알타이제어의 요소가 발견되면서도 음운대응의 규칙성을 설정하기 어렵고 또 일치하는 어휘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해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이 방면의 연구 방법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알타이제어에서의 한국어의 위치와 그 분화 시기의 추정은 일단 한국어가 알타이 공통조어에서 가장 이른 단계에서 분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좀더 세밀한 뒷받침이 필요하다. 여섯째, 대부분의 서구학자들은 비교에 있어서 한국어에 관한 한 지나치게 현대어에 의존하는 결함을 지녔다. 이제는 우리 학자들의 고문헌과 방언 연구에 의한 성과를 통한 비교 연구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posted by 치운 2013. 10. 29. 11:33

한글과 모양이 같은(비슷한) 지구상 문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인 한글 창제에 관한 세종 신록에 “훈민정음은 고전(古篆)을 모방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 고전이 어떤 글자인지 구구 한 추측이 난무하다.

 

  지금부터 4000여년전 단군조선때 만들어 졌다는 가림다(가림토)문자 38자 중에 28자를 따와 한글을 만들었다고 하나 학계에서는 가림다 문자가 고조선에 만들어 졌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하나의 설로만 존재한다.

 

 또 일본의 고쿄기요히코라는 학자는 한글과 모양이 같은 일본의 신대 문자가 708년에 만들어졌고 한글이 1446년에 만들어 졌으니 한글은 일본의 신대문자을 모방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우리나라 가림토 문자가 나오고 또 신대문자가 708년에 만들어 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대지 못하자 신대문자 모방설을 철회 했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은 한글은 몽골의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파스파 문자는 몽고 승려 파스파(1235~1280)에 만든 문자로 몽골어뿐 아니라 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를 표기 하는데 쓰이었다.

  인도의 남부 구자라트 지방에 우리 한글과 같은  구자라트 문자가 있다. 구자라트 문자는  한글모양이 거의 그대로 쓰여 져 우리문자 자음은 7개가 모음은 10개 모두가 똑 같다.

 

여기에 우리한글과 모양이 같은 세계의 문자를 소개한다.

 

 

 

 1.가림다(加林多; 가림토加林土) 문자.

한단고기에서, 단군조선 제3대 단군갸륵 경자2년(B.C, 2181년)에 갸륵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한글과 똑같은 38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림토 문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학계에서는 고조선 때의 문자라는 확증이 없어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고증을 거처 고조선시대의 가림다 문자실체를 확인하고 훈민정음의 원조임을 증명해야 겠다.

 

 

2. 파스파문자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티베트 출신 승려 파스파(1235~1280)가 만든 몽골어 문자로. 몽골어뿐 아니라 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 등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이뤄진 표음문자이다.

 

세계 문자학계 에서는 이 문자가 훈민정음 창제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고 믿고 있다.

 

 

3.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한글이 1446년에창제되었으니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난후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했다.

 

 

 

4.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발음은 다르지만 한글 자음의 상당수인 ㄴㄷㅌㅇㅁㅈㅂ 과 모양이  같고,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등 10자는 한글의 모음 모두와 모양이 같다.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가서 세운 것으로 추

 

측대는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5.산스크리트(Sanskrit)어 

 

 범자(梵字)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나라 한글을 처음 배울때 배우는 가갸거겨....자쟈저쳐..더뎌...버벼...하혀...와  너무나 흡사하한,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로 되어 있으며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ㅎ"으로 끝난다.

 

  이상으로 우리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며 특히 우리말과도 상당수 단어가 똑같은 언어가 발견되어 아마 고조선 시대 때의 가림토문자가 실존했고 우리민족이 이동하여 인도의 인더스 문명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완벽한 연구를하여 우리민족과 뿌리와 주변으로 흩어 살고 있는 우리민족을  밝혀야 겠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4000년전 고조선시대의 가림토 문자의 실체를 찾아야 하겠다.

posted by 치운 2013. 10. 29. 11:17

한글에 관한 여러 이설

[편집]파스파 문자 기원설

 

(위) ’파스파 문자 ꡂ [k], ꡊ [t], ꡎ [p], ꡛ [s], ꡙ [l]와 그에 대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글 문자 ㄱ [k], ㄷ [t], ㅂ [p], ㅈ [ts], ㄹ [l].(아래) 중국어를 표현하기 위한 파스파 문자 ꡯ w, ꡤ v, ꡰ f의 파생과 그의 변형 문자 ꡜ [h](왼쪽) 밑에 기호를 덧붙인 ꡧ [w][23]와 유사한 중국어 표기용 한글 ㅱ w/m, ㅸ v, ㆄ f. 이 한글들은 기본자 ㅁ과 ㅇ에서 유래했다.

1966년 컬럼비아 대학게리 레드야드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훈민정음에서 언급한 고전(古篆)을 몽고전자(蒙古篆字)로 해석하며 한글이 파스파 문자에서 그 기하학적 모양을 차용했다고 주장했다.[24] 레드야드는 그 근거로 당시 조선의 궁에는 파스파 문자가 쓰이고 있었고, 집현전 학자 일부는 파스파 문자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들며, 한글의 기본 자음은 ㄱ, ㄷ, ㅂ, ㅈ, ㄹ라고 제시했다.

레드야드에 따르면 이 다섯개의 글자는 그 모양이 단순화되어 파열음을 위한 가획을 할 수 있는 여지(ㅋ, ㅌ, ㅍ, ㅊ)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는 전통적인 설명과는 다르게 비파열음 ㄴ, ㅁ, ㅅ은 기본자 ㄷ, ㅂ, ㅈ의 윗부분이 지워진 형태라 주장했다. 그는 ㅁ이 ㅂ의 윗부분을 지워서 파생되기는 쉽지만, ㅁ에서 ㅂ의 모양을 이끌어 내는 것은 불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즉 다른 파열음과 같은 방법으로 파생되었다면 ㅂ의 모양은 ㅁ위에 한 획이 더해진 형태(ㄱ-ㅋ, ㄷ-ㅌ, ㅈ-ㅊ의 관계처럼)여야 한다는 것이다.

ㆁ자의 유래에 대한 설명도 기존과 다르다. 많은 중국 단어는 ng으로 시작하는데 세종대왕 집권 시기 즈음의 중국에서는 앞에 나오는 ng는 [ŋ]으로 발음하거나 발음하지 않았으며, 이런 단어가 한국어로 차용되었을 경우에도 이는 묵음이었다. 또한 논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ng음의 모양은 ㄱ에서 가로 획을 제한 모양인데, 이는 모음 ㅣ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가로 획을 제한 ㄱ에 묵음이라는 뜻의 ㅇ을 더해 ㆁ을 만들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단어 중간 혹은 끝에서의 [ŋ]의 발음과 단어 처음 부분에서의 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다른 글자는 ㅱ이었는데 훈민정음은 이를 微(미)의 초성이라 설명했다. 이는 중국 방언에 따라 m 혹은 w로 발음되는데 한글에서는 ㅁ([m])과 ㅇ의 조합(이에 대응되는 파스파 문자에서는 [w]로 발음한다)으로 만들어졌다. 파스파 문자에서 글자 밑에 환형의 모양을 그리는 것은 모음 뒤의 w를 의미했다. 레드야드는 ㅱ자의 'ㅇ'모양이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 졌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증거로 레드야드는 ㄷ의 좌측 상단에 작게 삐져나온 형상(입술 모양으로)은 파스파 문자의 d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입술 모양은 티벳 문자의 d인 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레드야드의 이러한 기원설이 사실이라면 한글은 파스파 문자→티벳 문자→브라미 문자아람 문자를 거쳐 결국 중동 페니키아 문자의 일족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파스파문자는 세계의 다른 고대문자들처럼 상형문자일 뿐만 아니라 각 글자가 한가지의 음을 나타내지 않고, 그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권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한글과 같이 소리를 표기하는 문자와의 상관관계는 레드야드 혼자만이 인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2009년 국어학자 정광(鄭光)은 훈민정음이 36개 중국어 초성을 기본으로 하는 등 파스파 문자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았지만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서로 다르며,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라고 반론하였다.[25]

[편집]기타 한글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문자

생김새가 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있어서 한글 이전의 고대문자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연히 닮은 경우이거나 신뢰할 수 없는 출처를 근거로 하고 있다고 설명된다.

[편집]가림토신대 문자

송호수는 1984년 《광장(廣場)》 1월호 기고문에서 〈천부경〉과 《환단고기》〈태백일사〉를 참조하여 한글이 단군 시대부터 있었고, 단군조선가림다문(加臨多文)에서 한글과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26] 이에 대하여 국어학자 이근수는 《광장(廣場)》 2월호의 기고문을 통하여 과학적 논증이 없는 이상 추론일 뿐이며, 참조한 고서의 대부분이 야사임을 지적하였다.[27] 또한 가림토 문자는 《환단고기》의 저자로 의심되고 있는 이유립이 한글의 모(母)문자로 창작한 가공의 문자일 가능성이 높아[28] 이러한 주장은 역사학계 및 언어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신대 문자 중에서도 모습이 한글과 비슷한 것이 있어 이를 가림토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신대 문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마다 문자의 모습이 달라 일관성이 없고 언어학자들이 추정하는 고대 일본어의 음운 구조와도 맞지 않으며,[29] 신대 문자가 기록되었다고 하는 유물 거의 전부가 18~19세기의 것이고 에도 시대 전의 것을 찾을 수 없는바, 신대 문자라는 것은 고대 일본에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에도 시대의 위작이며, 특히 그 중에 한글과 비슷한 것들은 오히려 한글을 모방한 것임이 밝혀졌다.[30]

[편집]구자라트 문자

1983년 9월 KBS가 방영한 8부작 다큐멘터리 《신왕오천축국전》은[31]구자라트 문자를 소개하면서 '자음은 ㄱ, ㄴ, ㄷ, ㄹ, ㅁ, ㅅ, 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 자가 꼭 같았으며,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개천학회 회장 송호수[32]는 1984년 이를 인용하면서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구자라트 문자가 가림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33][34]

그러나 구자라트 문자는 문자 구성상 자모로 완전히 분리되는 한글과는 달리 모든 자음이 딸림 모음을 수반하는 아부기다이며, 데바나가리 문자에서 수직선을 제거한 데바나가리 파생문자로서 다른 인도계 여러문자와 친족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이는 구자라트 문자의 특정 글자체와 한글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에 대한 착오일 뿐이다. [35]

[편집]다른 언어에서의 한글 사용

한글은 2009년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의 공식 표기 문자로 채택되었다[36].

동티모르테툼어를 표기하는 데 한글이 쓰인다든가, 문자가 없는 민족의 언어에 한글을 도입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는 기사 등이 간혹 발표되었으나, 모두 개인적인 연구에 불과하다. (한글에 대한 오해 참조)

일본에서 간행된 책 중 오사카 대학 언어학 교수인 니시다 다쓰오(西田竜雄)가 저술한 《강좌 언어 제5권 세계의 문자》 한글 편 278쪽에 '한국어 외에 한글이 남미 볼리비아의 언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라는 기술이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옛한글 등을 부활시킨 표기법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개인 연구자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만든 인공어618-Vuro[깨진 링크]인공 문자井卜文(Jingbu Script) 등에서 일부 한글 또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문자를 개인 수준에서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편집]오해와 사실

이 부분의 본문은 한글에 대한 오해입니다.

•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한글이 아니라, 책 《훈민정음》(해례본)이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기록물 자체만을 등록 대상으로 한다.

• 실제의 한글은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현재의 한글은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보다 표현할 수 있는 발음 수가 적다.

•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원래 언어학적 명제가 아니고, 창제 당시에 '모든 소리는 기본 5음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한 철학적 표현이다.

• 한글 낱자는 모두 소릿값이 확정되어 있고 실제 한글 쓰임에서는 모아쓰기의 규칙도 정해져 있으므로, 한글로 표현되는 소리의 숫자는 본래 유한하며, 한글은 기본적으로 한국어에 맞추어져 있다.

• 현재 한글은 한국어 발음에만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의 훈민정음에서는 모아쓰기가 좀 더 다양하며, 아울러 《동국정운》에 따르면 실제의 한국어 발음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한자음도 훈민정음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 한글은 언어의 이름이 아니라 글자의 이름이다.

• 창제 당시의 이름인 '훈민정음'과 그 약칭인 '정음'도 본래 글자의 이름이었다.

[편집]한글 자모일람

[편집]방언 한글 자모

㄰ㄱㄲㄳㄴㄵㄶㄷㄸㄹㄺㄻㄼㄽㄾㄿ

ㅀㅁㅂㅃㅄㅅㅆㅇㅈㅉㅊㅋㅌㅍㅎㅏ

ㅐㅑㅒㅓㅔㅕㅖㅗㅘㅙㅚㅛㅜㅝㅞㅟ

ㅠㅡㅢㅣㅤㅥㅦㅧㅨㅩㅪㅫㅬㅭㅮㅯ

ㅰㅱㅲㅳㅴㅵㅶㅷㅸㅹㅺㅻㅼㅽㅾ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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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고문 한글 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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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복합원음와 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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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반각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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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0. 29. 11:06

한자(漢字)는 원래 우리글[韓字]이다

 

언어는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아마도 태초에 먼저 말이 있었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문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말과 글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면, 인류 역사에 문자가 발생하고 진화해온 과정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추측컨대, 문자는 아마도 먼저 그림문자의 단계를 거쳐 점차 추상화되고 소리의 변화와 결합하는 가운데 글자로서 완성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본래 음양일체로 두 개의 문자가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글만이 우리의 글이며, 한자(漢字)는 중국의 글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표의문자인 한자(漢字)는 원래 한자(韓字)이며, 표음문자인 정음(正音)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두개의 문자 가운데 하나였다.

한자에 담긴 우리 역사

 

한자(漢字)란 한(漢)나라의 글자라는 뜻이다. 이는 한나라 때에 이르러 해서라는 모양으로 완성된 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한족이 처음 만든 문자는 아니다. 한자의 원형은 우리 동방족(동이족東夷族)이 창제한 것이다.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큰 틀에서 볼 때, 한자는 처음에 그림문자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한자의 기원을 흔히 갑골문에서 찾는다. 갑골문이란 거북이나 소의 뼈에 새겨진 문자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로, 정사를 판단하기 위해 점을 칠 때 사용한 것이라 한다. 중국의 고대 은 왕조(BC 1600~BC 1122, 상商나라)의 도성이었던 유적지 은허에서 다량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갑골문이 처음 출현한 곳은 서요하 상류로 확인되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의 것으로서, 이곳이 동방족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갑골 점복은 처음에는 소 어깨뼈나 발굽뼈로 했으나 은나라 때부터는 거북 등뼈도 사용하였다. 이때 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자료를 제시한다. 나아가 갑골문 속에는 우리 민족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좬삼일신고좭 좬참전계경좭 좬천부경좭은 우리 삼성조 시대의 신교문화를 전해준 3대 경전에 속한다. 그런데 이 천부경이 갑골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더구나 고려말 충신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농은 민안부는 고려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으로 불린 충신으로서, 조선을 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도전 두문동 성수공사 5:328~9, 11:389 참조). 또 좬환단고기좭 좧태백일사좩에는 목은 이색 등이 천부경을 주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의 친구였으며 따라서 천부경을 이해하고 공유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갑골문의 모사본으로 알려진 이 천부경 글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에는 없는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것이 아니냐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자의 뿌리는 배달국 태고문자

 

그런데 은나라가 갑골문을 사용하고 있을 때, 단군조선에서는 전문(篆文)이라 하여 약칭 단전(檀篆)이라고 불리는 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이 당시 사용된 토기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자들이 최초에 창조된 것은 언제일까?

지금까지 동북아지역에서 갑골문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대 금문(金文: 고대 청동기, 토기, 갑골에 새겨진 원시 한자와 각화문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자취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갑골문이 은나라 때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림문자로 출발한 금문은 어쩌면 전자(篆字)에 비견되는, 전서(篆書)의 원형이었으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초의 금문연구서인 『금문신고(金文新攷)』(낙빈기, 산서인민출판사, 1987년)의 저자인 낙빈기(駱賓基)는 금문의 해석을 통해 신농과 황제 등 삼황오제시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였으며, 더욱이 이것이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였음을 고증하였다. 이런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중국내에서는 금서(禁書)로 분류돼 왔었다.

 

기록에 전하는 중국 고대문자의 시조는 5500년 전 동이족 태호 복희씨라는 설과 4700년 전 창힐이라는 설이 남아있다.

 

역(易)철학의 시조인 태호 복희씨는 배달국 제5대 환웅천왕의 막내아들이다. 복희씨는 중원으로 이주하여 동아시아문명을 실질적으로 개벽한 문명의 개조이며 한자의 뿌리가 되는 육서(六書)의 원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역사기록 의하면 그는 용봉(龍鳳)을 토템으로 하여 관명을 지었다고 하며 새로 만든 문자를 용서(龍書)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후대 황제 헌원 때 ‘창힐’이라는 인물이 새 발자국 모양을 따서 조적서(鳥跡書)를 만들었는다고 하며, 현재 그의 고향 섬서성 백수현 사관촌에 그 비석이 남아있다. 즉 복희씨의 용서와 창힐의 조적서 등이 후대에 갑골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秦)시황(BC221~210)이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문자를 통일하고, 이를 고대문자와 구분하여 소전(小篆)이라 칭했으며(앞에 밝을 명明자 참조), 다시 한대(BC140~ )에 이르러 한자(漢字,예서)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한자연구서이자 사전격인 고전 『설문해자(說文解字)』(BC100, 9353자)가 정리되어 나온다.

 

그러면 복희, 창힐시대에 동방 배달에는 어떤 문자가 사용된 것일까? 배달국 문자를 만든 인물은 초대 환웅천황 때 신지(神誌) 혁덕으로 전해온다. 그는 사슴발자국을 보고 처음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녹도글자가 경남 남해군 양하리 금산 중턱바위에 있다. 환단고기 대변설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후대에 더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된 바, 이것이 1942년에 <영변>지와 구한말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 실린 신지 전자(篆字)다. 배달국에서 만들어져 고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창성조적서비(鳥跡書碑)의 창힐문자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좬환단고기좭 좥삼성기좦에 의하면 창힐은 배달국 제14대 치우천황 때 문물을 배워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갑골문과 금문에 널리 전해오는 전자(篆字)는 기실 배달국의 녹도문이 전해져 여러 가지로 수정, 변형되어온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한자의 변천과정을 보면, 우리 것이 먼저고 우리가 중국을 가르친 스승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문명의 뿌리가 한민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도 모든 문물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가르치는 교육의 현장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배달혈통이 중국을 지배했었다

배달(倍達民族) 혈통이 중국에 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했었다.

- 중국의 삼황오제는 전부 동이족, 한국인이었다 ! -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와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때까지는 한족(漢族)의 존재가 중국에서는 없었음으로 중국의 상고사(上古史)는 동이족(東夷族)의 역사였고,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족이 북상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역사서(歷史書)인 사기(史記)의 저자(著者), 사마천(司馬遷)은 황제헌원 이전의 유명한 인물이 모두 동이족(東夷族)인 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기(史記)라는 책에서는 황제헌원(黃帝軒轅)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였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은 배달국(倍達國)의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 때, 강수(姜水,중국 섬서성)에서 소전(少典,벼슬이름)으로 있던 신농(神農) 아버지의 후손이 공손인데, 바로 공손의 후손이 황제헌원이다. 소호금천(少昊金天)은 배달국 시대에 산동 반도 지역에서 고도의 문명 국가를 통치했던 사람인데, 중국의 고사변(古史辯)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東夷系也)“”라고 하여 동이족(東夷族)임을 밝히고 있다. 전욱고양은 황제헌원의 손자이며, 제곡고신은 황제헌원의 증손자이다. 또한, 요(堯)임금은 황제헌원 및 제곡고신의 후손이다. 순(舜)임금은 고조선 단군 1세때, 고시(高矢)의 친형인 고수의 아들이다.

중국의 금(金)나라는 신라(新羅) 말 경순왕의 후손인 아골타(阿骨打)가 건국한 나라이며 김(金)씨가 세운 나라여서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 중국의 원(元)나라는 단군 4세 오사구의 아우 오사달의 후손인 홀필열(忽必烈)이 건국하였으며, 중국의 청(淸)나라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 그 후손이 다시 청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우임금(하夏나라의 시조). 탕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주周나라)도 역시 동이족(東夷族)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 서적인 서경(書經), 예기(禮記), 사기(史記)에 보면, 이들은 일상생활이나 대사(大事)를 집행할 때 언제나 삼신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지내며 생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禹)임금은 황제헌원의 후손이며, 전욱의 아들인 곤의 아들이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을 우리는 누루하치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누루하치의 성(性)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性)은 원래 김(金)씨에게서 분가(分家)해 나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도 당연히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性)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는가? 애신(愛新)각라(覺羅), 즉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청(淸)나라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 그 후손이 다시 청나라를 건국했는데, 누루하치의 성(性)인 애신각라(愛新覺羅)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강태공(姜太公)은 진주(晋州) 강(姜)씨의 후손으로 한족(漢族)에게 신교(神敎)를 전수해 준 사람이다.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을 만나 넓은 식견과 지혜로 문왕의 스승이 되어 문왕이 죽은 뒤에 무왕을 도와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일으킨 인물이다.

태호(太昊) 복희(伏羲)는 배달국(倍達國)의 5대 태우 환웅의 12번째아들이며, 우사(雨師)직책을 수행했다고 한다. 복희(伏羲)씨는 최초로 동양 철학을 체계화 했으며, 음양오행과 태극기의 팔괘를 처음 그려낸 사람이다. 주역(周易)의 역철학을 처음 만드신 분이며, 혼인제도를 처음 만들었고, 문자를 제정했다고 한다. 침구를 처음 시작해 침(針)을 만들었고, 금슬(악기)은 물론, 백초(百草)를 맛보아 의학을 처음 개발해 냈으며, 양잠을 처음 시작했다 한다. 양잠은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신 태호복희 때부터 시작했으니 바로 배달국 환웅시대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동이족은 상고시대부터 양잠을 시작해 각 시대의 조정에서 왕비들이 양잠의 책임자로 백성들의 양잠을 솔선 수범해 왔던 것이다. 특히 양자강 유역의 동이(東夷) 려(黎)족과 동이(東夷) 묘족의 양잠은 유명하여 그 전통이 지금의 항주 소주 인근에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태호복희는 풍산(風山) 출생으로, 풍(風)씨의 시조인데, 그 후 풍씨는 맥이 끊겨져 지금은 자손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중국 하남성 회양현에 그의 묘지가 있다. 중국인들은 동이족(東夷族)을 비하(卑下)하여 동이족인 태호복희의 형상을 사신인수(蛇身人首)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다고 한다.

염제(炎帝) 신농(神農)은 배달국(倍達國) 때의 사람이다. 신농(神農)씨는 온갖 풀맛을 보아 의약(醫藥)을 확립시켜 놓았으며, 백곡(百穀)을 정함으로써 천하만세에 농사법의 혜택을 많이 입혔다고 한다. 경농(耕農)과 의학의 창시자이며, 시장(市場) 제도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시장이란 사람들이 물물생산해서 교역을 하는 장소를 말한다. 염제 신농(神農)은 진주(晋州) 강(姜)씨의 시조가 되는데, 신농(神農)의 아버지는 배달국(倍達國)의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 때, 소전(少典,벼슬이름)으로 있었으며, 강수(姜水)의 감병관으로 임명받고 강수(姜水,중국 섬서성)에 정착했다고 한다. 호남성 영현에 그의 묘지가 있다. 중국인들은 동이족(東夷族)을 비하(卑下)하여 동이족인 신농(神農)의 형상을 인신우수(人身牛首)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다고 한다.

참고 자료:

1. 책 “개벽 실제상황”, 대원출판.

2. 증산도(甑山道)의 도전(道典).

3. 한민족의 뿌리와 단군 조선사, 김영주 지음.

4. 만화 환단고기, 제 1.2.3권.

5. 한국 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원.

6. 동양 문화사.

7. 한국 상고사의 쟁점.

자료 출처 : http://www.cyworld.com/yammo98

posted by 치운 2013. 10. 29. 11:03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동방의등불대한민국

2005/06/29 09:45

http://blog.naver.com/smilesunkr/120014680409

계백 장군충청도 사투리 썼다

올 가을 개봉 예정인 코미디 영화 ‘황산벌’에서 극중인물 계백 장군(박중훈 분)이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한다. 계백 장군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까. ‘황산벌’은 실제 백제어로는 어떻게 발음됐을까. 필자는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인 ‘백제어’를 찾아나섰다. 충청도 부여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2003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제어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필자는 지난해 방영되었던 KBS의 ‘태조 왕건’을 시청하면서 후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황산곡(黃山谷)의 격전 장면이 틀림없이 나오려니 하고 은근히 기다렸다. 태조 왕건 하면 우선 이곳 전투부터 떠오를 정도로 역사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유서 깊은 개태사(開泰寺)가 자리잡고 있는 황산곡(黃山谷,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天護里)이다.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과 격전 끝에 승리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혀 있다.

태조 왕건은 승전 기념으로 격전지인 황산곡에 ‘나라를 크게 열다’라는 뜻을 담은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곳은 ‘천호산’이라 불리며 산 아래 마을은 지금도 ‘천호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백제 장군 계백은 왕건보다 3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660년) 계백이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 지 여부에 대해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관계가 있는 그의 출생지와 생활 근거지(주소지)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백제어에 관한 이모저모도 종합적으로 밝혀야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막연한 아득한 옛날 한반도의 언어, 그 중에서도 특히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백제어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아닐 수 없다.

백제어와 마한어의 차이

백제(BC 18~AD660년)의 북으로는 고구려·예맥이 있었고, 서남으로는 마한이, 동남으로는 신라가 있었다. 정남으로는 가라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엔 일본이 있었다.

그동안 백제는 마한의 터전에 건국한 나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격히 말해 백제는 고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래서 ‘위례홀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는 건국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와 가라어 지역의 ‘벌(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홍성찬

고대 경기·충청과 호남의 언어 달라

마한어는 현재의 충남·전라도 지역에만 분포해 있었다. 충북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마한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온조 비류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백제어의 기원을 증언하는 횃불의 존재이다. 이를 근거로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앞에서 제시한 ‘위례홀’과 쌍벽을 이루는 ‘미추홀’의 별명이 ‘매소홀’(買召忽)인바, 이 별칭의 첫글자 ‘매(買)’가 ‘매홀(買忽=水城, 요즘의 수원)’ 등과 같이 ‘수(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중부 지역의 남단인 청주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인데, ‘매(買)’가 어미일 경우에는 강을 뜻하는 ‘천(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예로 경기도 이천(利川)시의 옛이름은 남천(南川)인데 백제시대엔 남매(南買)라고 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조수 간만(干滿)의 이름에도 화석처럼 박혀 있다. 예를 들면 한반도 중부지역의 남단인 어청도에선 음력 초하루를 ‘일굽매’라고 부르는데, 남부지역의 북단인 흑산도에선 ‘일곱물’이라고 한다. 열이틀은 어청도에선 ‘세매’, 흑산도에선 ‘서물’이다.

이처럼 ‘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분포되었고 마한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어는 부여계어를 쓰던 ‘위례홀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백제 역사는 공주·부여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제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이른바 경기도 ‘한홀’(漢城) 시대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한홀’(현재의 경기도 광주)은 백제 시대 전기·중기(BC 18~AB475년)의 중심이었다.

‘백제 역사=공주·부여시대’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사람은 고려의 김부식이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 1-3 지명에 의거하여 그려진 삼국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황해·경기·강원 영서·충북) 지역을 장악한 장수왕 63년(475년) 이후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 백제의 역사가 상당 부분 묵살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삼국사기’가 애써 감춘 사실들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사기’의 본기와 열전에 그 단초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백제의 전기·중기 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과 국내성이었으며 남쪽 경계는 살수(청천강)였다. 따라서 백제의 중기 말(475년)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의 전·중기 판도를 그린 결과 중부지역이 오히려 백제의 소유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지역인 황해도, 평안남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영서지방 언어는 백제어였음에 틀림없다. 강원도 영동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 무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은 겨우 77년간만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토착어는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의 전기·중기어로 봄이 타당하다.

지명은 가장 보수성이 강한 언어다. 경기·충청지방의 지명들이 고구려어도, 마한어도 아닌 백제어(위례홀어)와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잠시 지명의 보수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고장이었던 ‘바빌론’을 비롯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와 ‘우르크’, 아수르왕국의 수도 ‘아수르’ 등의 옛 지명이 5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라크 전역에서 지명으로 쓰이고 있어 얼마 전 이라크전쟁 보도 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백인들이 점령하기 이전 인디언 지명과 하와이 원주민의 지명이 그대로 쓰인다.백제어와 일본어 매우 유사

백제어 중 수를 세는 어휘인 밀(3), 옻(5), 나는(7), 덕(10)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밋(3), 잇즈(5), 나나(7), 도우(10)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를 세는 단어가 주변 국가로 수출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우리와 일본이 일(1), 이(2), 삼(3) 등 중국의 수사체계를 빌려 쓰고 있음이 좋은 본보기이다. 다만 우리는 고유의 수사체계를 아울러 쓰고 있지만 일본은 둘 다 차용하고 있음이 다르다. 이처럼 고대 일본이 백제어의 수사체계를 차용할 정도였으니 다른 어휘의 차용이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백제어가 현대 일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실증한다.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를 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한홀⇒고마(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소부리(현재의 충남 부여)’와 같이 언어권이 다른 곳으로 세 번이나 천도하였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언어는 상당기간 존속하는데, 백제어는 망국 후 적어도 1세기 남짓은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어의 실질적인 존속기간을 약 800년 정도로 추산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본다.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다. 전기 백제사회도 단일 부족국가에 의한 단일 언어사회였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다. ‘달(達)’은 산(山), ‘단(旦)’은 계곡(谷), ‘매(買)’는 물(水), ‘파혜(波兮)’는 고개(嶺)를 뜻한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는 ‘홀’이 ‘비리>부리’로, ‘달’이 ‘뫼’로, ‘단’이 ‘실(實)’로, ‘매’가 ‘믈(勿)’로, ‘파혜’가 ‘고개(古介)’로 달리 쓰였다. 고대 호남지방 언어인 ‘바달(波旦-현대의 바다)’에 해당하는 전기 백제어는 ‘나미’로 서로 달랐다. 바다를 뜻하는 현대 일본어는 ‘우미’다.

전기 백제어의 수사 체계는 독특했다. 백제 지명에서 ‘밀’(密=3), ‘옻’(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과 같이 기본수 네 개가 발견된다. 이 수사들은 ‘셋, 다섯, 일곱, 열’이라는 현대 한국어 단어와는 전혀 뿌리가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오히려 일본어와 연결된다. 백제가 한반도 내의 전기 영토를 상실한 것처럼 전기 백제어의 상당부분이 한반도에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신라어에 비해 백제어는 중기에 이르러 상당히 다르게 형성됐다. 일반적으로 정치단위가 하나라고 해서 언어적인 면에서도 단일한 것은 아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일은 흔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두 국어로 쓰는 스위스가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사례를 중기 백제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왕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언어였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의 언어가 부여계어이고 피지배층의 언어가 마한어임을 알 수 있다.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전남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 옮긴 도읍지 공주 시대로부터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어는 이 후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백제사 668년 중 185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의 문화는 백제 문화를 대표할 만큼 찬란하다. 언어는 곧 문화발전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발달한 문화는 언어의 발달을 수반한다.

특히 성왕 때 ‘소부리’로 천도한 이후 122년간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는 곧 언어의 발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를 기록한 문헌이 전해졌더라면 백제 말기 언어의 참모습을 알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장 수준의 자료는 아니지만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단어들이 전·중기의 것들만큼이나 이 시기에도 남겨졌다.백제어 억압한 통일신라

나라가 멸망한 후 백제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수도가 함락된 뒤 백제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벌였다. 거의 100여 년이나 끈질기게 지속하였으니 그 저항정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저항정신 속에 언어도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에 소중한 우리말을 빼앗긴 적이 있다. 이후에 한국어는 되살아났지만, 백제어는 백제 멸망 100여 년 뒤 소멸되고 만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언어 통일을 위하여 전국의 고을 이름을 한자(漢字) 지명으로 개정했다. 신라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백제어 억압 정책’은 백제어의 소멸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외세에 의해 언어탄압을 받지 않은 일본의 언어에 고대 백제어의 잔재가 매우 많이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백제어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역사 자료를 토대로 후기 백제어 단어들을 정밀 분석해보자.

● 고마 : 공주의 옛 이름을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적고 ‘고마’라 불렀다. 이 이름이 ‘용비어천가’(1445)에 나오고 ‘일본서기’(720)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고마’는 ‘북쪽’이란 뜻이고 ‘나리’는 현대 한국어 ‘나루’로 변하였다.

● 소부리 : 소부리(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소부리주>소부리군’으로 쓰이다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 지금의 부여로 고쳤다. 백제 성왕은 천도하면서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남에 있는 부여’란 의미로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라 고쳤다. 경덕왕은 남부여에서 ‘부여’만 따다가 소부리를 부여로 바꾼 것이다. 현재도 부소산 기슭 마을은 ‘소부리’라고 불린다. ‘소’는 ‘동쪽’이란 뜻(샛바람의 새)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 벌판’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은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사벌국(沙伐國)’의 ‘사벌’과 같은 말이고,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과 같은 말이다.이 말이 변해서 오늘의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어형 변화 과정으로 따져볼 때 ‘고마’가 줄어 ‘곰’이 되었듯이 ‘부리’가 줄어 ‘벌’이 된 것이니 ‘소부리’가 ‘사벌’ 또는 ‘셔벌’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 ‘서울’의 본 뿌리는 ‘소부리’이다.

‘님’의 기원은 백제어 ‘니리므’

● 구드래나루: 고지도에 한자로 ‘龜巖津’(구돌나루)이라 적혀 있다. 소부리에서 은산 및 정산(定山) 방향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구드래나루’라 부른다. 백제 시대에는 이곳이 나루라기보다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사신의 배들이 군산포(白江口)를 거쳐 강을 따라 올라와 입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빈을 맞는 항구였다면 ‘구드래나루’는 그에 알맞은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백제를 ‘구다라’로 불렀다. ‘구드래’와 ‘구다라’는 비슷하다. 따라서 동일어로 믿을 수 있다. ‘구드래’는 ‘굳+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백제어는 유기음이 없기 때문에 ‘大’를 ‘근’(>큰)이라 하였다. 따라서 ‘굳+으래’는 다시 ‘그우+ㄷ+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그우>구’(大)로 변한 것이고 ‘ㄷ’은 사잇소리이다. ‘으래’는 전기 백제어로 왕을 일컫던 ‘어라+하’의 ‘어라’에 해당한다.

‘어라’는 지금까지도 즐겨 불리는 민요의 마지막 대목인 ‘어라 만수’(왕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구드래’의 본말은 ‘근어라’이며 ‘대왕(大王)’이란 뜻이다. 따라서 ‘굳어라’가 일본어로는 ‘구더라’ ‘구다라’로 변하였고, 우리말로는 ‘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이 말은 ‘근어라(大王津)’란 뜻이다. 백제의 선진 문화가 후진 일본 문화의 밑거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들이 백제국을 ‘구다라나라(대왕국)’로 높여 불러온 겸손을 이해할 수 있다.

● 부소산 :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三角山)이었다. 그런데 兒의 고음이 ‘·’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를 적은 것이다. 이 ‘부·’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가 침투한 것이다.

● 니리므 : 전기 백제어로 왕을 부를 때 지배층은 ‘어라하’라 하고, 백성은 ‘건길지’라 불렀다. 그러나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님’이 됐다. 이처럼 현대어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백제표준어, 충남방언으로 계승된 듯

나라 잃은 언어는 결국 쇠퇴하여 한 지역의 방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백제어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았다. 그렇다면 백제어를 계승한 방언은 지금 어느 지방의 방언일까. ‘표준 백제어’를 계승한 현대어는 바로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으로 추정된다(충남 공주 부여 논산 서천 보령과 전북 익산 방언).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백제어는 부여계어의 단일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중기에 이르러 호남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선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혼용되어 단일 언어사회에 가깝게 됐다.

그러나 백제 후기에도 왕족과 귀족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명할 정도로 부여계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상류층은 여전히 부여어계 백제어를 구사했다. 마한어를 토대로 부여계어가 혼합된 형태의 백제어는 주로 피지배층이 사용했다.

즉 상류층은 백제 멸망 때까지도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여어계 언어를 계승, 사용한 것이다. 이들 상류층의 언어는 후기 백제의 수도, 즉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수도권 계백 장군의 영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삼충사 소장. 백제 표준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호남 방언은 마한어에서 주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충남 공주-부여 방언은 호남 방언과 언어학적 특징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따라서 충남 공주-부여 방언이 후기 백제의 수도권 표준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계백 장군은 제2품(달솔)의 고관, 즉 상류층 귀족계급으로 백제의 수도인 부여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계백장군은 수도에 거주하는 백제 상류층이 사용한 언어, 즉 백제 표준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계백 장군이 굳이 현대 한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호남 사투리가 아닌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다만 부여어계와 마한어가 백제의 영토 내에서 혼합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호남 방언도 수도권 백제 표준어의 특징들을 상당부분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벌 전투를 백제 표준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누르리모이부리에서 산화한 패장 계백은 어떤 인물일까. 이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열전의 기록뿐이다.

이 전투에서 맞서 싸운 신라 장군 김유신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10권 중 3권에 나누어 자세히 기술하였으나 계백은 열전 제7의 13인 중 맨 끝에 소개하였는데 그나마 짤막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계백이 생포했다가 돌려보낸 화랑 관창에 관한 내용이 배나 길다. 승자에 비해 패자의 모습은 이렇듯 초라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생지(生地)와 가계를 확실히 밝히며 서울(서라벌)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계백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살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백제 사람이라는 것과 벼슬길에 나아가 달솔이 되었다고 적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階伯, 텏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를 동음이자로 표기한 것을 보면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성씨는 기록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백제 인물들이 ‘장군 允充(윤충) 殷相(은상), 좌평 成忠(성충) 義直(의직) 興首(흥수) 忠常(충상) 常永(상영), 달솔 自簡(자간) 助服(조복)’ 등과 같이 성씨 없이 이름만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 ‘삼국사기’엔 신라왕은 박·석·김(朴·昔·金) 3성으로 불렀지만 백제왕은 성씨 없이 온조, 다루, 기루, 개루 등과 같이 이름만 적혀 있다. 백제에서는 왕처럼 백성들도 이름만 불렀을 것이다.

백제인은 두 자 성씨, 두 자 이름

계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 열거한 다른 이름들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계백의 의미도 알 수 없다. 신라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밝아누리’, 유리(儒理)는 ‘누리’, 소지(昭知)는 ‘비지(毗處)’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백성 이름도 황종(荒宗)을 ‘거칠부(居漆夫)’, 태종(苔宗)을 ‘이사부(異斯夫)’, 염독(厭獨)을 ‘이차돈(異次頓)’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이름은 신라처럼 한자어로 표기한 별명이 없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백제 왕명 중에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는 무령왕뿐이다. 무령왕은 부모(왕과 비)가 국빈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중에 왕비가 일본 규슈(九州)의 북쪽 한 섬에서 해산하였다. 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세마(斯麻=嶼)’라 불렀다고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사마(斯摩)로 적혀 있고,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적혀 있어 믿을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백제어 ‘세마’ 또는 ‘사마’에서 기원하여 ‘섬(島)’이라는 현대 한국어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고마(熊)’가 변하여 ‘곰’이 된 것처럼 끝 모음을 잃고 단음절로 줄었다. 백제는 왕성이 ‘부여(扶餘)’씨이고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장수 은솔(西部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 별부장(別部將) 사탁상여(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경우 귀실, 사탁, 흑치는 성씨이며 복신, 상여, 상지는 이름이다. 역사서에 이들의 성명이 ‘복신, 상여, 상지’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성씨가 두 자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때 계백은 성명이 아니라 오로지 이름일 뿐이며 그도 두 자로 된 별도의 성씨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은 한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 반면 현대 일본인은 계백 등 고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두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계백 장군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가 거주하였던 곳은 어디였을까.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계백의 출생지와 거주지가 어느 문헌에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여러 모로 탐색하여 짐작할 뿐이다. 역사서는 귀실복신을 서부 달솔이라 지칭하였으니 그가 서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계백도 예외가 아니다. 계백의 벼슬이 달솔이었으니 품계로 따지면 제1품인 좌평(佐平) 다음가는 높은 자리이다. 이러한 그의 벼슬로 미뤄보아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 사람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더구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러 왕이 그를 구국의 선봉장으로 삼았다면 그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누르리모이부리 전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황산벌(黃山之野)은 어디였을까.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했듯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 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라 명명한 것이다.

한자 黃, 等은 음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黃等也山’에서 ‘等也’ 두 자를 줄여 ‘누르모이(黃山)’가 됐다. ‘누르’는 곧 ‘느르(連)’와 동음이어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 ‘느르모이(黃山)’는 ‘連山’으로 다시 한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다.

이들 여러 지명 중에 어느 곳이 당시의 결전장이었을까. 본래 싸움터란 일정한 곳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싸우다가 다른 장소로 밀려가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곳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굳이 지정한다면 ‘누르미, 누르기, 황산리’ 일원이 아닐까. 전해 내려오는 ‘황산벌 싸움’의 지명 ‘黃山, 누르모이’와 같기 때문이다. 상당히 넓은 이 벌판은 계백 장군의 지휘사령부에서 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하던 사령부는 황산성(黃山城)에 위치해 있었다. 누르모이 싸움의 요새였던 이 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93보(步)이고 성 안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필자는 소년 시절 황산성에 있었다는 이 샘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수량이 많고 깨끗해서 물맛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황산벌 성터는 남저북고(南低北高)의 지형을 갖추고 있어 북쪽은 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멀리서 움직이는 적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위치로 서쪽으로는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성)가 아련히 보인다. 이 성터 지휘대에 올라서서 구름처럼 몰려든 신라군과 맞서 싸우며 계백장군은 한두 번쯤 서울 소부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한반도 서부와 일본을 호령하던 ‘700년 제국’ 백제의 멸망을 예감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논산시 관동은 화랑 관창에서 유래

현재 논산시 연산면 북쪽 3리 황산성(일명 城隍山石城)의 동쪽 산자락에는 관동(官洞)이라는 산골이 있다. 이 산골의 이름은 신라 화랑 관창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제7에 화랑 관창(官昌 또는 官狀) 이야기가 나온다.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백제를 침공할 당시 관창은 부장(副將)이었다. 신라 군사가 느르뫼벌에 이르러 백제군을 네 차례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품일 장군이 아들 관창에게 홀로 백제군에 진격하여 용맹을 떨치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은 관창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백제군을 여러 명 죽였다. 그러다 사로잡혀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 장군이 관창의 갑옷을 벗기게 하였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계백은 어린 소년의 용감함을 어여삐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선비가 많다. 소년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는 어떠하랴” 하며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내가 아까 적진에 돌격하여 장수의 목을 베고 영기(營旗)를 꺾지 못하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다시 쳐들어가서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외친 후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뒤 재차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맹스럽게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이번에는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말이 관창의 머리를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자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라고 외쳤다. 이를 본 모든 군사가 분개하여 목숨 받쳐 굳게 싸우기로 결의한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해 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화랑 관창이 죽은 곳이 이후 ‘관창골(官昌洞)’로 불렸으며 후대에 ‘창’이 생략되어 ‘관골(官洞)’이 되었다가 현재엔 관동이 됐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忠谷里) 마을 북쪽 산기슭에 1340여 년 전에 사망한 계백 장군의 묘가 있다. 최후의 결전장에서 직선으로 거의 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계백은 비록 패했지만 5000의 군사로 5만 군사와 싸워 네 번을 격퇴시킨 충장(忠將)이었다. 그가 전사한 후 어떻게 여기에 묻히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전사한 장군을 누군가 남몰래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에서 이곳 부근에까지 밀려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이곳 충곡리에서 전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곳은 백제 서울 소부리 쪽으로 후퇴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백제 충신 계백의 무덤이라는 전설로 인하여 이곳은 지금도 충곡(忠谷)이라고 불린다. 지명이 지닌 역사적인 증거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묘가 가짜일 수도 있다 하여 의심해왔다. 의심을 풀기 위하여 1966년 여름 실제로 묘를 파 보았는데 증거물은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묘는 계백 장군의 묘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우선 묘 속의 길이가 12척이요, 넓이가 6척이나 되며 석회로 천장을 다섯 층이나다진 것 등은 상고(上古)시대의 무덤 규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충곡이라는 지명이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조선 영조 18년(1692년)엔 충곡서원이 창건되어 계백 장군을 배향(配享)하였다.

최근 논산시가 계백 장군 묘의 봉분을 장군 묘답게 키우고 묘역도 넓혔다. 묘소에 충혼비도 세웠다. 아울러 부근에 계백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앞의 넓은 광장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000 결사대 최후의 순간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계백의 벼슬은 달솔이었다. ‘달’은 백제어로 ‘높다(高)’는 뜻이다. 또한 ‘달’은 ‘아사달(阿斯達=九月山)’, ‘부사달(夫斯達=松山)’, ‘소물달(所勿達=僧山)’ 등과 같이 산(山)의 뜻으로도 쓰였다. 달솔(達率)은 대솔(大率)로 다르게 적기도 하였다.

고유어 ‘한’을 한역하면 ‘大’이다. 대전(大田)을 ‘한밭’, 대천(大川)을 ‘한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솔’은 고구려의 벼슬이름 중에서 ‘욕살(褥薩)’의 ‘살’에 해당한다. 이 ‘살’, ‘솔’이 변하여 후대의 ‘슬’이 되었다. ‘벼살’이 ‘벼슬’로 바뀐 것이다.

계백 장군은 장졸 5000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 소부리를 출발하여 ‘두락모이(石城)’를 지나 ‘가디나이(恩津)’를 거쳐 ‘누르리모이(黃等也山)’에 당도했을 것이다. 도착하자 세 진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맞섰다. 아마도 당시의 세 진영 중 제1영은 현 관동리의 서쪽산 위에 축성한 석성 ‘누르모이잣(黃山城)’이고, 제2영은 이 제1영에서 정남을 향해 왼쪽(남동쪽)에 있는 흙성 ‘누르재잣(黃嶺城)’이며, 제3영은 오른쪽(서남쪽)에 있는 흙성 ‘오이잣(外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령탑인 제1영을 중심으로 양팔을 벌린 듯이 두 진영이 펼쳐 있어 적을 품안에 끌어들여 섬멸할 수 있도록 설치됐다. 계백은 5000 결사대를 작전에 알맞게 3개 진영에 분산 배치하고 주성인 제1진영에 올라 총지휘하여 10배가 넘는 5만여 신라군을 네 차례 격퇴했다. 그러나 싸움이 계속되면서 기진맥진한 백제군은 신라군의 다섯 번째 진격을 맞아 ‘누르리모이부리’ 마지막 싸움에서 마침내 전멸한 것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계백은 후기 백제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고마·소부리’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화 속 계백 장군은 공주·부여 지방 방언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치운 2013. 10. 22. 12:13

잃어버린 우리의 글 -- 녹도 문자 ( 鹿圖文字 ), 가림토 (加臨土) 문자, 갑골문자 (甲骨文字), 한자 (漢字)

고대 한국 사람들이 사용했던 글자이다.

녹도문자(鹿圖文字)

고대 우리민족의 국가였던 배달국 시대의 제1세 배달 환웅(B.C 3,898~3,804년 재위) 시절에 사슴의 발자국의 모습을 보고 만든 글자이다.

                                   

                                     << 경남 남해군에서 발견된 녹도 문자 >> 

 

 

  

                         << 평북 연변군 묘향산의 비석에서 발견된 녹도 문자 >>

 

 

<< 중국 만주지방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져 있는 녹도 문자 >>

이것은 이집트 상형문자(B.C 3,000년경),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 B.C 3,000년경)보다 800년이나 앞서는 세계 최초의 문자였던 것이다.

영어의 알파벳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는데BC 1200 년경의 페니키아에서 표음문자로 사용된 알파벳으로 발전하였다가,,,그리스가 번창할 때 ( BC 800년 ~ BC 30년경 ) 그리스식 알파벳으로 변형되었다가,,, 로마가 전 유럽을 지배할 때인 BC 753년(건국) ~ BC 275년(이탈리아 통일) ~ AD 476 년(서 로마 멸망) ~ AD 1453년(동 로마 멸망) 의 시기에 라틴 알파벳으로 발전하여 대부분의 유럽의 나라에서 알파벳을 사용하게 되었다.

창힐 문자

녹도문자(鹿圖文字)는 주로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다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B.C 2,707년 즉위)시절에 중국 산동반도 출신의 창힐이라는 사람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녹도문자를 배워갔고, 녹도문자를 계승 발전시켜 창힐문자를 창안했다.그리고 중국에 창힐문자를 널리 보급시켰다. 이로써 중국에서 최초로 문자가 생기게 된 것이다.

골각(骨刻) 문자

중국의 산동성 주변에서 발굴한 문자가 새겨져 있는 수백개의 동물( 소, 사슴, 코끼리 )의 뼈 조각들을 연구한 중국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2008년 10월에 발표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서는 BC 2,500 ~ BC 2,000 년경에 이미 문자를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 중국의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서 발굴된 골각( 骨刻 ) 문자 >>

 

그리고 이 문자를 발굴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창러 골각( 昌樂 骨刻 ) 문자라고 이름을 붙였다.

뼈에 새겨진 글자들은 세로로 잘 정열된 글자들이었으며점(占)을 치는데 사용했었던 갑골문자(甲骨文字)와는 달리 전(占)을 친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함께 출토된 유물도 있었는데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었다.

 당시 이 발표에 참석했던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족 (東夷族)의 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중국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은 <<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족 (東夷族) 문자 계열에 속한다 >>고 지적하면서 <<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중국의 최고 학자들도 자신들의 한자(漢字), 갑골문자(甲骨文字) 가 동이족(東夷族)의 문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한국(韓國)에서는 한자(漢字)를 한국인들의 조상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

갑골문자(甲骨文字)

갑골문자(甲骨文字)는 당시 중국 산동성에 살았던 동이족(東夷族)족들이 사용하였던 창힐문자를 발전시켜은(殷)나라 시대 ( BC 1600 ~ BC 1046 ) 에 이르러서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발전했는데,갑골문자는 은(殷)나라의 수도였던 은허(殷墟 ; 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으로 발견된 후 주변지역을 발굴하면서 수많은 갑골문자들이 발견되었다.

이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중국에서는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하고 있는실정이다.갑골문자(甲骨文字)는 다시 한자(漢字)로 발전했던 것이다.

 

                             

                           << 중국 산동성에서 발견된 창힐문자가 그려진 비석 >>   

    

                                                << 중국에서 발견된 갑골문자 >>

중국 사람인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에 보면 은(殷)나라는<동이족>의 국가라고 하고, 은(殷)나라를 건국한 <설>이라는 임금도 <동이족>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은(殷)왕조는 동이족이 통치하였던 국가였으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은(殷)나라가 동이족의 국가인데 거기서 나온 문자인 갑골문자(甲骨文字)도 중국의 것이 아니고 동이족(우리나라 민족)의 문자인 것이다.

한자(漢字)

중국이 체계화된 한자(漢字)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진시황 (秦始皇)의 진(秦)나라 ( BC 221 ~ BC 206 년 ) 때부터 이며 한(漢)나라때 ( BC 202 ~ AD 220 년 ) 문자의 체계적인 정비와 함께 문자를 통일하여 사용하였으며그래서 중국의 문자를 한(漢)나라의 문자(字)라는 뜻으로 한자(漢字) 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림토(加臨土) 문자

배달국의 녹도문자(鹿圖文字)는 고조선 시대에는 가림토 문자로 계승 발전되었고 다시 조선 시대의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한글)으로 발전 계승되었던 것이다.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지금으로부터 4200년여전인 BC 2181년경의 고조선 시대때 제3세 단군이었던 가륵단군이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1363년 (고려 공민왕 시절 ) 이암(李巖)이라는 사람이 저술한 단군세기란 역사책에 나온다.

어떤 학자들은 영어의 알파벳이 지금으로부터 3000년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가림토(加臨土) 문자 38자 중에는 X, M, P, H 및 I, O 등 영어의 알파벳과 유사한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한국의 가림토(加臨土) 문자가 영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도 말한다.

또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중국의 갑골문자, 한자(漢字) 에도 영향을 주었고,일본의 초기 신대문자, 몽고의 파스파 문자,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터키어, 티벳어 만주 퉁구스어 등이 단군시대의 가림토(加臨土) 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일본의 고대 문자 = 신대문자(神代文字)

고조선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일본(日本)으로 건너가서 신대문자(神代文字)가 되는데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가림토(加臨土) 문자와 아주 비슷한 신대문자(神代文字)가 새겨진 명문(銘文)과 비석(碑石)들이 많이 남아 있다.일본 역사책( 일본서기 )에서 일본역사의 초창기를 신대(神代)라고 부르는데, 신대(神代)시대에 일본으로 전파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神代文字) 문자 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말은 있었지만 자신들의 글이 없어서 한자(漢字)의 소리나는 음을 그대로 빌려서 사용하다가초기 일본의 글이라 할 수 있는 만요(萬葉) 가나의 형태로 나타난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만요가나는 5세기경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명에 적힌 인명표기이다.이러한 만요가나는 나중에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로 발전해 나간다.

헤이안 시대 (8세기~12세기) 에는 사실상 만요(萬葉) 가나로 모든 일본어의 음절을 표기하게 되었는데, 문자의 사용이 광범위해지면서, 사실상 오늘날과 거의 유사한 히라가나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또 나중에는 가타가나 글짜도 사용되게 되었다.

인도 문자

고조선 시대때에 이미 인도 (印度)와 교류가 있었는데 가림토 문자가 인도로 건너간 것은 BC 2000 년 ( 또는 BC 2100 년 ) 경이라고 보여진다. 옛날 기록을 보면 우임금 시대 때, 고조선의 제후였던 순임금의 부친 유호(有戶, 고수)씨는 월식생성(인도/印度)의 땅으로 들어가 인도(印度)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인도(印度)의 남부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너무나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 말도 같은 말이 많을 정도이다. 이 지역은 배달국 (또는 고조선)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중국의 산동성, 만주 일대, 요하강 일대, 그리고 한반도에서 이 가림토 문자가 적혀있는 비석들이 발견되는데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鳴馬山) 중턱에 자리한 바위 (가로 1.8m,세로 3.4m)에서 가림토로 추정되는 문자 다수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중국 산동성 환태시에서 발굴된 가림토 문자를 연도를 측정해본 결과 BC 1850 년경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 가림토 문자 38자의 모습 >>

가림토(加臨土)문자는 세종(世宗)대왕이 1443년에 제정한 훈민정음의 표음부호와 거의 비슷하다.가림토 정음(正音)의 기본부호 38 글자였는데,, 세종대왕이 제정한 훈민정음은 28 글자이다.즉 가림토(加臨土)문자에서 10글자를 빼고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었던 것이다.

이 가림토 문자는 한자(漢字)의 뜻을 전하고자 만들어진 표음(表音)글자로써도 사용되었다.

중국의 배운 학자들은 사석에서 한자(漢字)는 중국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한국 사람 ( 동이족/東夷族 )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또 삼황오제 ( 三皇五帝 ) 도 중국 사람이 아니고,,, 한국 사람 ( 동이족/東夷族 )이라고 말한다.그런말을 들은 한국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꼭 한마디를 하는데,,,한자(漢字)는 중국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고,,,,, 삼황오제 ( 三皇五帝 )도 중국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현스럽게,,,, ㅂ ㅅ 같이,,,,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되기 마련이니까,,,,,언젠가는 그렇게 판명될 것이니까,,,,

지금 우리가 우기면서 싸워봐야 힘든 싸움이 될 것이지만시간이 지나고,,,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저절로 해결 될 것이니까,,,,,그때까지 <<아리랑 >>의 노래를 잊지 말고 부르고 있으면 만사가 해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