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치운 2013. 10. 25. 11:48

2. 고구려 역사 전개와 영토의 변화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서기 668년까지 705년이란 장구한 역사를 지속해왔다. 긴 시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변화를 겪어왔다. 반드시 앞선 시대보다 뒷시대가 더 큰 영토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 초기에는 한 동안은 대외팽창정책을 펼치며 영역이 확대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왕 명

년 대

세력 확대

진출 방향

1대 추모왕

37

비류국

홀본 부근

32

행인국

동쪽 방향. 백두산? 동남

28

북옥저

동쪽 방향. 간도 또는 함경북도

2대 유리명왕

bc 9

선비

서북 방향. 천산산맥? 요하인근?

ad 14

양맥

서쪽 방향. 천산산맥 주변

3대 대무신왕

22

(부여국왕의 종제)

북쪽 방향. 부여국의 일파

26

개마국, 구다국

동쪽 방향. 개마고원?

37

낙랑국

남쪽 방향. 평안남도?

5대 모본왕

49

(상곡, 태원)

서쪽 방향. 기습 작전

6대 태조대왕

55

요서 10성

서쪽 방향. 요서지역?

56

동옥저

남동 방향. 함경남도, 강원북부

68

갈사국

북쪽 방향?. 부여국의 일파

72

조나

고구려 인근?

74

주나

고구려 인근?

98

(책성 지역 巡狩)

동쪽 방향

105

(요동군 공격)

서쪽 방향

118

(현도군 공격)

서쪽 방향

고구려 초기 대외 팽창 과정을 다음 도표를 통해 살펴보자.

고구려가 건국한 홀본 지역과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 지역은 압록강 물줄기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산지가 많아 농사짓기에는 그리 좋은 곳은 못된다. 반면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다. 고구려는 서기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국내성 일대를 국가의 중심지로 삼아 사방으로 영역을 확대해갔다.

고구려가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딛고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핵심지대가 있다. 그것은 평야가 많은 요동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황해안의 비옥한 반달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강력한 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힘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구려가 이곳으로 돌진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먼저 주변의 작은 세력부터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위 표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추모왕 시기에는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고구려 인근과 백두산 동쪽 산간지대의 약소국부터 공략을 시작했다. 2대 유리명왕은 서쪽 지역으로 진출을 했는데, 특히 선비족을 굴복시킨 것은 특별히 기억할 만하다. 유리명왕 시기까지 고구려는 평지보다는 주변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왔다.

이렇게 실력을 다진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 시기부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서기 21년 고구려에게 조공을 하라는 압력을 가해온 부여국을 선제공격한다. 전쟁은 고구려의 패배로 끝났지만, 부여왕이 죽음으로써 부여는 내분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전쟁 후에는 고구려가 부여국과의 경쟁에서 앞서는 결과를 낳았다. 부여의 약화는 고구려로 하여금 갈사국, 개마국, 구다국 등 주변의 소국을 통합하는데 가속도를 붙게 했다. 고구려는 발전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서기 37년 낙랑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7년 후에 후한이 살수 이남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영역 확대에 제동을 걸었다.

고구려가 주변의 군소 국가들의 통합을 완료하고 핵심지대로 본격 진출을 모색한 것은 6대 태조대왕 시기였다. 이때 고구려는 동옥저, 갈사국, 조나, 주나 등 주변 소국들의 통합을 완성하여 대체로 동해안에서 남만주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서쪽의 후한과 격돌했다. 고구려는 후한이 가진 평야지대를 차지해야만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서기 49년 5대 모본왕은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이르는 장거리 기습작전을 수행했고, 후한으로부터 막대한 물건을 받은 후에야 무력시위를 중단한 바가 있었다. 이후 55년 태조대왕 시기에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태원 공격은 약탈을 위한 기습 공격일 뿐, 영토 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요서 10성 기록인데, 아직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신뢰하지는 않고 있다.

고구려는 2세기 초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거듭 공격한다. 후한은 고구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고구려가 잡아간 포로 1명당 비단 40필을 주는 조건으로 고구려와 화해를 추구한다. 당시 고구려는 영토를 적극적으로 지배하려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재물과 사람을 약탈하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었다.

태조대왕은 후한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후방에 배후기지를 건설하게 된다. 그 결과 주목하게 된 곳이 현재 연변자치주 일대인 책성지역이다. 서기 98년 태조대왕은 무려 6개월간 이곳에 머물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다. 책성 지역은 고구려 5개 지방의 장관인 욕살이 머무는 동부지역의 중심지로 확실한 영토가 된다.

태조대왕 시기 고구려는 부여보다 앞선 국력을 자랑하며 동북방의 숙신의 조공도 받는다. 반면 고구려는 서쪽의 후한, 북쪽의 부여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함에 따라 122년 이후 오랫동안 적극적인 대외 경략에 나서지 못하게 된다.

도리어 197년 왕의 동생인 발기와 소노부의 공손씨 정권에 투항 사건 등으로 인해 고구려의 서부지역 영토는 축소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요하 주변과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이르는 동방의 핵심지대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

이후 고구려는 238년 위나라가 요동에 위치한 공손씨를 공격할 때에 원군을 파견하는 등 요동 방면으로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도망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고구려는 259년 위나라 대군을 침입을 양맥곡에서 대파하지만, 여전히 요동 전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이후 서쪽 보다는 북쪽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70년에 즉위한 서천왕은 숙신과 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는 곧 새롭게 요서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와 부여 쟁탈전쟁을 벌이는 결과를 낳았다.

300년에 즉위한 미천왕은 요동진출을 모색하는 한편, 313년 중계무역기지로 전락해버린 남쪽의 낙랑군, 다음해에 대방군을 완전히 동방지역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미천왕은 319년 우문선비, 단선비, 서진 등과 함께 대릉하 주변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연합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고구려의 발전을 막은 것은 모용선비였다. 모용선비는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를 몰아내고, 단선비를 격파하고 342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적의 주력군이 오는 길을 잘못 탐지하여 수도를 함락당한 고구려는 왕모와 전왕(前王)인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겨 할 수 없이 모용선비에게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용선비가 우문선비를 물리치고 황하 일대로 남하하여 강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고구려는 뒷날을 기다려야 했다. 도리어 고구려는 371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국천왕이 살해당하는 등 시련을 연속으로 겪어야만 했다.

고구려가 다시 대외팽창에 나선 것은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이후 부터다. 그는 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하여 금관가야를 멸망에 이르게 했으며,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거듭 격파하여 한반도의 패자로 군림했다. 또 동북 방면에서는 동부여의 굴복을 받고 64개성을 점령하였고, 숙신족을 정벌하였으며, 서북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일파인 비려를 격파하고 서요하 상류인 염수(鹽水)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모용선비이 세운 후연을 적극 공격하여 이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시기 고구려는 엄청난 팽창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들이 있다. 고구려가 백제의 58개성을 점령하고 신라 수도에 주둔군을 배치하는 등 적극적인 남방 경영에 나섰지만, 백제의 수도가 여전히 한강변의 한성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했지만, 후연 땅에 고구려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다. 또 신라도 완전히 병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완전히 자국의 영토로 삼는 공간과, 단지 항복과 충성 맹세를 받고 인질과 노획물을 얻어감으로써 정복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을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 구별했기 때문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백제, 가야, 신라, 후연을 직접 통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고구려 중앙정부에 복종하는 제후국이 다스리는 지역이면 만족했던 것이다. 또 제후국으로 삼지도 않지만, 반드시 격파해야 할 외부의 공간도 구별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 개념은 고구려의 천하관으로 나타난다. 광개토대왕릉비문과 중원고구려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천하관이 나타난다. 고구려 천하관에는 고구려가 지켜야 할 천하와 그 외의 천하가 구분되어 진다.

신라 등의 제후국은 고구려가 지켜야 할 천하 즉 제국의 범주에 포함시켜 보았다. 후연이 멸망한 후 탄생한 북연에 대해 고구려가 종족의 예를 베푼 것은 북연을 제후국으로 인정했음을 뜻한다. 고구려는 북연을 제후국으로 인정했기에 요서 방면으로 경략을 멈추었다. 북연은 고구려에게 있어서 중원의 여러 세력들과 충돌을 방지하여 변방의 완충지대라는 의미가 있었다.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는 요동에서부터 한강에 이르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고구려는 이를 국가의 핵심지대로 삼고, 동쪽의 책성 지역, 북쪽의 부여 지역을 강력한 배후기지로 삼아, 전통의 압록강 중류 지역과 함께 다중 거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제국의 주변지대에는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거란, 북연, 신라, 숙신과 같은 제후국을 거느렸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국의 기본 틀을 완성한 것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4대 강국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435년 북연이 척발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어 북위와 대릉하 연안에서 대면하게 되었으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백제가 부흥하여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이를 먼저 탐지하고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를 남쪽의 웅진으로 몰아세웠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아산만에서 대전을 거쳐 포항에 이르는 선까지 남하했다.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인 충주 지역에 국원성을 세우고 남부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고구려 제국의 지배는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백제는 곧 국력을 회복해 고구려에 반기를 들었고, 신라도 서서히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으로 성장했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남쪽인 평양성으로 천도하는 등 남진 정책의 추진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북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5세기 고구려는 거란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북방의 유목제국인 유연(柔然)과의 우의를 바탕으로 양국 사이에 낀 대흥안령 일대에 거주하는 유목민 집단인 지두우를 분할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자 거란족은 큰 위협을 느끼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파장도 있었다.

문자명왕 시대에 가장 특기할 사항은 494년 부여의 자진 투항이다. 그런데 부여는 이미 346년 모용선비의 침략을 받은 이후부터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부여 지배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져왔다. 고구려는 부여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실위족에게 철을 공급하며 회유책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물길족의 반란도 진압하는 등 고구려의 북부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고구려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550년대였다. 유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돌궐이 고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침략해왔고, 고구려가 돌궐을 막는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와 화해하고,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견제하게 했다. 그 대가는 한강유역의 포기였다. 대신 돌궐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고구려는 돌궐과 첨예한 이권을 걸린 거란족 지배문제에 있어서 기득권을 잃지 않았다. 1992년 몽골공화국에서 현장 조사를 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몽골공화국 동부지역에서 여러 개의 고구려 성으로 보이는 유적과 고구려 유물흔적을 찾았다고 한다. 좀 더 정밀한 검증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두우 분할, 또는 돌궐과의 전쟁, 실위에 대한 영향력 확대, 초원길을 통한 서방국가와의 교역 등에 이권(利權)이 걸린 고구려가 이곳까지 진출하여 기지를 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구려는 요서남부지역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고구려는 520년대에 중원세력의 전진기지였던 대릉하 주변의 조양을 공격하여 포로를 잡아왔으며, 거란족을 시켜 만리장성을 넘어 현 북경 일대를 수시로 공격 약탈을 감행하기도 했다.

6세기 이후 요서지역에 중원세력의 거점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나라의 요서지역의 거점은 유성군 751호 뿐이었고, 이곳과 가까운 북경 북쪽의 어양군은 1현에 3,925호, 북평군은 1현에 2,269호로 각기 1만 명 남짓에 불과했다. 반면 이 보다 남서쪽인 상곡군은 6현 38,700호, 탁군이 9현 84,059호로 인구가 많았다.

요서 일대에 중원세력의 거점이 없었다는 것은 645년 고구려를 공격해온 당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세민은 군량 운송 책임을 받은 위정(韋挺)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