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치운 2013. 12. 11. 11:10

http://www.koreli.com/index.htm

 터키의 역사  

수도 : 앙카라(Ankara)
면적 : 780,580km2
인구 : 약 7,150만명(2000년 인구조사기준)
언어 : 터키어 (1928년 이후 라틴 문자를 채택)
종교 : 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교도
인종 : 터키인, 쿠르드인,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1. 터키의 기원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남부에서 기원한 터어키 민족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혹은 돌궐족)
이며,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어키의 Teoman Yabgu 왕국을 중국인들은 "흉노"라고 불렀음.
터어키 민족은 중세기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함.


2. 고대국가 시대

터어키 국토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연계하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여 왔음.

- BC 6000년 : 차탈회육(CATALHOYUK)
- BC 3000년 : 청동기 시대로 도시국가(트로이)생성.발전
- BC 2000-1500년 : 청동기 시대로 도시국가 생성, 발전
- BC 1500-1200년 : 히타이트(Hittite) 시대
- BC 1200-220년 : 동부 Urartus 왕조와 서부 Phrygian 왕조가 융합, 중부에는 히타이트 도시국가 잔존
- 4세기부터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 융성

튀르크(돌궐)족은 기원전 220년 이후 수많은 국가를 이룩하였는데 이중에는 그 영토가 1,800만㎢ 이상에 걸친 경우도 있었음. 10-11세기경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 셀죽 건설


3. 오스만제국 시대(1281-1922)

오스만터키는 1281년 성립된 이후 1354 년 유럽에 진출, 여러나라를 정복하였으며, Sultan Mehmet 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정복함으로써 오스만터키의 팽창정책은 절정기에 들어섬.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로, 이디오피아, 중앙아프리카, 예멘, 크리미아가 국경으로 되었고,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며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음.
오스만제국은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1912-1913년 발칸전쟁으로 영토가 그리스의 Maritsa강지역까지 축소됨.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패전국인 독일측에 가담, 1920.8 연합국측과 체결한 Sevre 강화조약에 의해 콘스
탄티노플의 背後地와 아나톨리아 고원만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Mustafa Kemal Pasha의 영도로
실지회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923.7 연합국측과 Lausanne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현재의 영토를 보유하게 됨.

4. 공화국 시대(1923-현재)

- 1923년 10월 : 케말파샤, 군주제를 폐지하고 터어키공화국 선포
- 1965년 10월 : Demirel의 정의당, 총선에서 승리, 보수정부 수립, 1971년까지 집권
- 1971년 3월 : 근로자 파업, 학생 및 노동자 소요의 파동으로 군부가 개입, Demirel 사퇴 Demirel 수상 사퇴이후 1973.10까지 군부 감시 하에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실시


- 1980년 9월 : Kenan Evren 터어키군 총참모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무혈 군사혁명을 주도, 국가
안보 회의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의 일부 조항을 잠정 폐지시키는 동시에 국회와 정당
을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 금지.
- 1982년 11월 : Evren 국가안보회의 의장, 국민투표로 정권 장악.
- 1983년 12월 : Ozal의 조국당 집권(군사정부 수립후 3년만에 민정 이양) 이후 정도당(DYP), 조국당
(ANAP), 공화인민당(CHP) 등이 정파 이익에 따른 상호 연립내각의 구성과 해체를 반복함으로써 빈
번한 정권 교체.
- 1996년 6월 : 이슬람계 복지당(Welfare Party : RP)이 주도하는 Erbakan 내각 성립.
군부의 개입으로 97.6 Erbakan 내각이 붕괴한 후 1997.7. 조국당(ANAP)이 주도하는 Yilmaz 내각 출범.
- 1998년 11월 : Yilmaz 정권이 부패 연루 혐의로 국회의 불신임에 의해 퇴진한후 99.1. 민주좌익당(DSP)
의 Ecevit 주도하 제56차 내각 출범.
- 1999년 4월 : 총선 실시후 민주좌익당 Ecevit 당수를 수상으로 한 민주좌익당(DSP),국가행동당(MHP),
조국당(ANAP)간 3당 연정하 제57차 정부 출범 2000.5월 임기가 만료되는 Demirel 대통령의 연임을
위한 헌법개정을 추진하였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어 현행 헌법 규정에 의거 Ahmet Necdet Sezer
전 헌법재판소장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


- 출처 : 터키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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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2. 11. 11:06

쿠르드족 [ -族 Kurd ] 
 사회과학 > 민속학 > 민족학 
 
 
 
요약
이란어 서북계에 속하는 민족. 터키·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북이라크에 사는 쿠르만지와 이란·이라크에 걸쳐 있는 쿠르디의 두 방언 그룹으로 크게 나뉜다. 음성·형태면에서는 옛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쿠르드말은 고유문자가 없고, 문헌은 지역에 따라 아라비아·아르메니아·라틴·키릴 문자로 표기한다.
 
 
 
본문
이란어 서북계에 속하는 민족. 터키·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북이라크에 사는 쿠르만지와 이란·이라크에 걸쳐 있는 쿠르디의 두 방언 그룹으로 크게 나뉜다. 음성·형태면에서는 옛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쿠르드말은 고유문자가 없고, 문헌은 지역에 따라 아라비아(페르시아)·아르메니아·라틴·키릴 문자로 표기한다. 인구는 약 2000만 명에서 25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터키에는 터키 인구의 19%, 이란 전체 인구 중 10%, 이라크 전체 인구 중 23%가 쿠르드족이며, 그 외 시리아, 소련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BC 2000년쯤 수메르 비문(碑文)에는 이미 반호수 동방민족으로서 카르다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BC 1000년쯤에는 쿠르티에로 알려졌으며, BC 5세기의 그리스 군인·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카르다카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현재 터키에서는 퀴르트, 아랍권에서는 쿠르드, 이란에서는 코르드라 한다. 거주민의 대부분은 산악지대에서 양·염소 등의 목축이나 과수·보리·쌀 재배에 종사한다. 지연적(地緣的) 성격이 강한 부족(아시라)을 이루어 족장 아가는 의식·재판의 집행, 구성원으로부터의 벌금, 아하티라는 세금 징수, 외래자 접대 등을 하고, 그 지위는 장남이 상속한다. 쿠르드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이슬람기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를 믿었다. 이슬람화 이후 그들의 대부분은 수니파였으며, 신비주의교단(타리카)에서는 카디리야의 영향을 받았다. 시아파는 1/3쯤 된다. 처음에는 아랍계·페르시아계 왕조 아래의 부족군이었으나, 10세기에는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하는 마르완왕조(983∼1085), 아제르바이잔의 라와드왕조(10세기초∼1071)를 창립하였다. 17세기에는 오스만왕조와 사파비왕조 사이에 국경이 정해지면서 쿠르드지역이 분단되고, 부족장에 의한 봉건 영주적 지배 아래 작은 국가들이 떼지어 들어서 19세기까지 그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부족제는 19세기말 터키에서 305종의 부족이름이 확인된 것으로 알 수 있다. 16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통치를 받던 쿠르드족들은 제 1 차세계대전 직후 패전국인 오스만제국 분할을 위해 1920년 맺어진 세브르조약에서 독립국가 창설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 조약은 터키의 반발로 국제적으로 비준되지 못했고 이를 대체한 23년 로잔조약에서는 쿠르드국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터키공화국과 팔레비(파흘라비)왕조의 이란이 성립되고 이 두 나라와 소련령 카프카스·아르메니아·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시리아 등으로 분할된 상태가 굳어지자 각지에서 독립운동과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란에서는 제 2 차세계대전 뒤 마하바드에 쿠르디스탄인민공화국이 세워졌으나 1년도 못되어 무너졌다. 1979년 이란 혁명 때 여러 정당이 결성되었는데, 그중 이란쿠르드민주당(KDPI)을 중심으로 쿠르디스탄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라크에서는 1919년 영국 통치 아래 쿠르디스탄독립선언이 발표되었으나 곧 탄압받았다. 공화제 발족 뒤 헌법으로 아랍·쿠르드의 평등이 인정되어 쿠르드어 출판물도 공인되었지만, 88년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악명 높은 화학무기까지 동원해 쿠르드족 마을의 80%를 파괴하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터키에서는 1923년 근대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아타튀르크(케말파샤)가 쿠르드 언어와 문화 말살정책을 펴면서 쿠르드족을 박해했다. 이때부터 터키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구심점 없이 지지부진하던 쿠르드독립운동은 84년 쿠르드노동자당(PKK)과 반군 지도자 A. 오잘란이 등장하면서 무장유혈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다. 터키 군사정권은 쿠르드어의 비공식사용마저 금지시켰다가 91년 해제했다. 99년 오잘란이 체포되었지만 쿠르드족의 항의시위는 계속되었고, 이란·이라크로 거점을 이동하여 반군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2003년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에도 쿠르드족과, 인근 종족 및 나라 간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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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2. 11. 11:05

최강의 용병 구르카(Gurkha)

 

2차 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 작은 체구의 동양인들이 용병으로 배속된 일이 있었다.
그들을 본 영국장교는 "저따위 야만인들이 이런 전쟁에서 뭘 할 수 있어! 참호나 파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영국군 장교는 자신의 막사를 나오며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막사 바로 앞에 금방 잘린 듯한 독일군 병사들의 목 십여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장교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용병들이 밤사이에 몰래 나가서 잘라온 것이였다.  그들이 바로 네팔 구르카 출신의 전사들이었다.

 

 

태평양전쟁중, 총알이 거세게 날아다니는 치열한 전투속에서 구르카족 한명의 하사관이 날아오는 총알 사이를 뚫고 일본군 참호로 돌진하였다. 
잠시후, 그 하사관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별다른 상처없이 참호속에 있던 일본군 24명을 쿠크리 나이프로 썰어서 나왔다고 한다.  그 시체중 어떤것은 머리부터 가슴까지 철모채로 잘려있었다고 한다

 


구르카족의 역사
본래 구르카 족은 네팔의 중부 및 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강건(剛健)한 농경민으로 목축도 겸하고 있다.
원주지는 인도 중부였으나, 힌두교도라는 이유로 14세기경 이슬람교도에게 쫓겨 북쪽 네팔로 이동, 그곳의 지배 민족이었던 네와르족(族)을 정복하고 이들과 혼혈(混血)하게 되었다.
파리어(語)를 사용하며, 힌두교의 네팔 전파에 공헌하였다.
1767년 네팔 전역을 정복하고 나라야왕국을 건설하였는데, 그후 이 왕국의 쇠퇴를 틈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보낸 원정군을 격퇴한 것도 구르카족 병사들이었다.


구르카족이 전쟁터에 참여하게된 계기
히말라야 산속에 살고있던「구르카」족이 영국군에 복무하기 시작한 것은 멀리 181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를 정복한 영국군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네팔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단지 싸우기 위해 태어난 민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네팔의 소수 산악부족 구르카와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잘 훈련된 군대와 최신식 소총을 박살내어버린 이 '야만족'들의 무기는 어이없게도 활과 돌팔매, 그리고「쿠쿠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네팔 전통단검뿐이었다.

"강한 적은 친구로 만들어라"라는 말이 있고, 이 전투 이후의 영국군이 바로 그런 대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영국은 바로 부족들과 계약을 해서 청년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갔다고 전해진다. 이 사납고 호전적인 타고난 전사들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영국군으로 영국군의 용병에 고용해 버린 것이다.
구르카 전사의 전설은 이때부터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세계의 전쟁터에 참여하게 되는 구르카 용병들
1차대전에서 구르카 용병들은 세포이군단(영국군에 배속된 인도인 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이래, 2차대전에서는 총 25만의 대병력으로 확충된 구르카 용병들이 영국군의 일원으로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구르카족 용병들의 쿠크리에 목숨을 잃은 독일군의 수는 웬만한 대공급의 피해와 맞먹는다 할 정도로 악명을 높이게 된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게 된 구르카 용병들. 태평양의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맞서 싸우게 된다. 영국군과 싸운 일본군은 정글전은 당연히 자신들의 독무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국군 지휘관들조차 "일본군을 잡으러 정글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어를 잡으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실토했으니까.....

그런데 일본군이 이처럼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이 정글전의 우위를 여지없이 뒤집어 버린 것이 바로 구르카용병들이다. 쿠크리 한자루를 들고 소리없이 정글속을 누비고 다니며 귀신같이 일본군의 목을 따가는 구르카 용병들은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때,  버어마전선의 「임팔」전투에서 구르카대대의「디마푸르」중사는 쿠크리 한자루로 24명의 일본군의 목을 잘라 영국 최고훈장인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은 영연방 최고의 영웅이 되기도 했다.
"쿠크리에 얻어맞은 일본군 병사는 머리에 쓴 철모와 두개골이 어깨뼈까지 두쪽으로 쪼개져 있기가 일쑤였다." 이들 구르카와 함께 싸운 어느 영국군 병사의 술회다.

태평양전쟁 종결후 한국전쟁에 참전하게된 구르카대대.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 1개 사단을 전멸시켜 버리는 분전을 과시하게 된다.  어쩌면 그들이 적이 아닌 아군이라는 점에서 다행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구르카가 온다!"는 말 한마디에 포트스탠리를 수비하던 아르헨티나군 전체가 손을 들고 투항해 버렸다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구르카용병들이 강한 이유라면?
원래 구르카족은 그 한사람 한사람이 군사훈련을 시킬 필요도 없이 투사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알다시피 네팔은 지금도 세계 최빈국중 하나이다. 한 양동이의 물과 한줌의 땔감을 구하기 위해 맨발로 눈덮인 히말라야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그들의 일상생활은 세계 각국의 특수부대원들이 받고있는 고도의 군사훈련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것이며,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의 심폐기능과 체력은 도저히 후천적인 군사훈련으로 얻어질 수 없을만큼 뛰어난 것이다.

거기다 이들이 열살을 전후하여 성인식을 치르면서 한자루씩 소지하게 되는 쿠크리 단검은 그들의 용기와 명예의 상징이다. 이 칼을 빼어들면 반드시 피를 묻혀야 한다는 그들의 계율은 그들의 적이 이 칼에 대해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원초적인 공포심리를 가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쿠크리를 한번 보여달라고 간청하는 영국인 동료를 위해 칼을 뽑아든 구르카 병사가 그 칼로 자기 손가락에 상처를 내서 피를 묻힌 후에야 다시 칼집에 꽂았다"
.......... 한번 칼을 뽑으면 피를 볼때까지 절대 칼집에 넣지 않는다라는 구르카족의 어찌보면 섬뜻하게 들릴 유명한 이야기다.

이런 무서운 구르카족이 오늘날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 바로 영국군에 입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2~3년에 한번씩 영국군의 모병장교가 현지를 방문할 때는 네팔 전역의 구르카 청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사내아이들은 열살을 전후할 무렵부터 영국군 병사가 되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신체를 단련하기 시작한다. 한달 급료가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고향에서의 거의 일년치 수입에 해당하고, 장기 복무를 마치고 나면 영국 시민권을 얻을수도 있는 이 기회야 말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며 출세인 것이다.
토속신앙과 결합된 불패의 신념, 거친 환경속에서 잘 단련된 신체, 거기에다 고도의 현대무기와 군사훈련이 결합되면 그야말로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인간병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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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2. 4. 15:45

우선 유목민들의 고향은 우크라이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북방초원전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유목민의 계통을 따지자면 몽골, 투르크 양 계통의 민족을 중심으로 계통표를 만들어야 합니다.(여기에 퉁구스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중요 유목민들을 설명하자면

스키타이 : 기원전 8세기경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유목제국 오늘날의 투르키스탄과 남시베리아에서 이동하여 남러시아에 등장. 사카인의 일부로 추정,다른 사카인들은 지금의 텐산산맥일대에 잔류. 현지에 거주하던 키메르인을 격파함. 도망치던 키메르인을 추격하던 중 데르밴드 통로를 통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일대에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여기서 오리엔트를 최초로 통일한 아시리아제국과 접촉.(유목세력과 정주세력 최초의 접촉, 후에 2500년간 계속될 양 세력의 전쟁을 예고)
스키타이는 오리엔트를 휩쓸어 오리엔트 정주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줌. 그들은 막대한 약탈품을 얻었고 우크라이나에서 볼가강에 이르는 광대한 남러시아 초원을 지배.

사르마트 : 기원전 4세기에 등장한 스키타이와 흡사한 종족, 3세기 후반 볼가강을 건너 스키타이를 격파하고 남러시아 초원을 장악

흉노: 투르크, 몽골족이 섞여 있는 유목민의 집단으로 기원전 9세기부터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함, 기원전 3세기 후반 모든 유목집단 들이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대흥안령산맥에서 신장위구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고 중국을 압박함.
서쪽으로는 월지를 격파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쫓아내었고 쫓겨난 월지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알렉산더 제국의 후예 박트리아를 붕괴시킴. 중국과의 끝없는 전쟁 끝에 약화되고 분열되어 중국 전한 말기 일부가 발하슈호 방면으로 이동함. 하지만 이들은 기원전 1세기경 중국군의 기습을 받았고 지도자를 잃은체 서쪽으로 모습을 감춤. 전멸되었다고 생각되었으나 400년뒤에 훈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갑자기 등장함.

선비 : 투르크계 민족으로 흉노를 차츰 대체하여 300년경 중국의 약화를 틈타, 남하하여 북중국을 지배함.

타브가치: 투르크계통의 작은 민족으로서 선비의 남하 때 동참하여 북중국을 통일함.
북위를 세움, 북중국을 타브가치의 제국으로 불리게할 정도로 이름을 떨침.

고구려 : 유목민은 아니고 농경민의 국가에 유목적인 요소를 공유한 만주에 자리잡은 세력. 기원에 관해서는 온갖학설이 난무함. 투르크계는 확실히 아니고(투르크계통인 전연,후연과의 대립) 몽골적인 요소도 갖고 있지만 퉁구스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함. 퉁구스계통인 말갈과의 깊은 관계. 전승을 감안해볼 때 유목민과 토착민이 골고루 섞였을 가능성이 있고 혼혈적인 민족이 독창적으로 변화해갔을 가능성이 있음. 한민족의 계통을 설명해주는데 매우 중요하지만 어떤 종족으로 봐야하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한민족이 몽골에 가까운지 퉁구스에 가까운지 혼혈적인지는 아직도 논쟁거리)

유연: 선비의 이동이후 몽골초원을 장악한 몽골계통의 민족. 타브가치와 끊임없는 대립
결국 돌궐의 공격으로 멸망.

돌궐 : 투르크 계통, 유연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와 대립 서쪽으로 진출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굴복시킴. 당의 거센공격과 내부분열로 붕괴되었다가 다시 일어나지만 투르키스탄으로 진출한 이슬람세력과의 교전에서 패배하고 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를 막지못함, 위구르의 공격으로 소멸.

훈족 : 흉노의 후예로 400년 만에 볼가강을건너 유럽에 모습을 드러냄. 사르마트의 후예 알란을 격파(일부 알란은 스페인으로 도주하여 카탈로니아인의 기원이 됨,또다른 알란인들은 오늘날 그루지아일대의 오세트인의 기원이 됨)하고 게르만 계통인 고트족을 격파하여 동고트를 복속시키고 서고트를 밀어냄. 서고트의 이동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 발생. 헝가리 초원으로 진출하여 고트계통의 게피대까지 정복하고 동, 서로마를 공격 유럽세계를 공포에 빠트림. 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훈은 후에 유럽의 사가들이 흉노를 통칭하는데 쓰임. 아틸라 사후 게피대와 동고트의 반란과 동로마의 공격으로 우크라이나로 철수되었다가 분열됨.

에프탈: 몽골적인 요소가 강한 종족으로 유연과 비슷한 시기 등장하였으나 서쪽으로 진출하여 인도와 사산조페르시아를 공격하는등 막강한 세력을 떨침. 그러나 돌궐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흩어짐.

아바르: 6세기에 유럽에 갑자기 등장함. 몽골계통으로 에프탈이나 유연의 도주세력으로 추정됨. 훈족의 잔여를 통합하고 헝가리까지 진출하여 동로마를 공격 유럽에 새로운 공포를 주지만 프랑크의 압박과 동로마의 공격등으로 쇠퇴하고 소멸함.

불가르 : 우크라이나로 도망친 훈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민족으로 투르크계통, 아바르와 함께 유럽에 진입하였으며 아바르가 소멸된 이후에도 계속 동로마를 위협함. 후에 기독교화되었고 수적으로 우세한 슬라브문화에 흡수되어 오늘날의 불가리아가 됨. 일부는 볼가강 중류와 카마강일대에 잔류하여 대불가리아를 세웠으나 칭키즈칸 몽골인들에 의해 파괴됨.

하자르 : 7세기초 볼가강 일대에서 출현하여 다케스탄과 카프카스,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전역을 지배하던 거대 유목제국, 훈족의 후예로 추정되며 아바르, 불가르와 함께 유럽으로 가지 않고 남러시아를 지배. 상당히 문명화되었지만 그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었다가 러시아와 동로마의 압박으로 11세기초 소멸.

마자르 : 오늘날의 아조프해 북방인 레베디아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투르크 계통의 핀-우구르계 유목민 9세기말 하자르의 약체를 틈타 페체넥의 공격을 받고 서쪽으로 급속히 이동하여 헝가리에 진입, 유럽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공포의 대상이 됨. 뒤에 기독교화되었으며, 헝가리라는 이름의 유럽국가가 됨.

페체넥 : 하자르의 약체를 틈타 남러시아를 장악하고 불가르와 연합하여 동로마와 마자르를 공격하지만 동로마의 반격과 오구즈와 킵착의 배후 공격으로 궤멸됨.

오구즈 : 투르크멘족 계통으로 서방으로 진출하여 페체넥을 붕괴시키지만 킵착의 공격을 받아 동화됨.

킵착: 오브강일대에서 유목하던 투르크계 유목민 키맥의 일부였지만 서쪽으로 이동하여 페체넥과 오구즈를 무너뜨리고 남러시아를 장악함. 뒤에 몽골에 복속되어 킵착칸국의 구성원이됨.

다시 동쪽으로 돌아와서

위구르: 투르크꼐통의 유목민으로 8세기 중엽 등장하여 돌궐을 무너뜨리고 초원의 지배자가 됨. 소그드문화를 받아들이고 문명화되짐나 키르키즈의 습격을 받아 몽골초원일대에서 동투르키스탄(오늘날의 신장위구르)으로 철수함

거란: 위구르 지배의 붕괴이후 세력을 키운 몽골계통의 유목민으로 몽골초원과 만주를 지배하고 송을 압박함, 뒤에 세력이 약화되어 금의 공격을 받고 멸망. 뒤에 있은 몽골제국의 금나라 공격에 적극 동참함.

발해 : 고구려-퉁구스적인 국가로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함. 하층민은 대부분 퉁구스 계통의 말갈인. 유목국가라기보다는 사실상 정주국가였으며 거란의 공격을 받고 멸망함. 퉁구스 계통의 말갈인들은 거란에 복속되거나 연해주 북방으로 도주.

여진(금): 말갈의 후예로 연해주 일대에서 원시적인 삶을 살던중 거란의 약체화를 틈타 거란을 무너뜨리고 북중국까지 정복하여 최초의 퉁구스 제국인 금을 세움. 몽골계통의 유목민과는 적대적이었고 결국 몽골제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 일부는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동만주에 잔류하다가 후에 명을 무너뜨리고 청을 세움

몽골제국 : 몽골계통의 유목민이 중심이되었지만 계속된 유목민들의 흡수로 거의 모든 유목민들이 복속되어 거의 모든 투르크, 몽골계통의 유목민을 지배하에 둔 진정한 통일 유목제국.

 

질문2)에 관해서는

핀란드의 핀족 : 핀족은 우랄어족의 일파로 이들의 원거주지는 우랄산맥 서쪽 볼가강 일대로 추정되며 기원전 500년경 발트해 지방으로 진출하여 농경을 배운뒤 주로 해상을 통해 핀란드로 이주하였습니다. 종족상으로는 거의 확실한 코카소이드(백인)입니다.

헝가리의 마자르족: 위의 글을 참조하세요.

터키의 투르크족 : 먼저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는데 터키는 문화적으로는 투르크문화를 상당수준 가지고 있지만 종족상으로는 그리스인에 가깝습니다.
터키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방은 기원전부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그리스문화권이었고 동로마 치하에서도 변함은 없었습니다. 다만 11세기말 셀주크 투르크의 침공으로 아나톨리아가 이슬람화되면서 이슬람적인 투르크문화가 섞여들었고 차츰 주민 스스로도 투르크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 지배층인 투르크인들이 그리스인들에게 빨려 들어간 겪이었고 유전학상으로 터키인은 그리스인에 가깝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기원은 발하슈호의 북방의 초원지대로 이들은 앞서 설명한 오구즈의 일파(투르크멘족)로 알려져 있습니다.이들은 11세기 이동을 개시하였는데 일부는 앞서 설명한데로 유럽으로 갔다가 키맥 계통인 킵착의 공격을 받고 격파되었으나 이란방면으로 진출한 일부는 이란에서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획득하고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아나톨리아 정복이 오늘날 터키(또는 투르키에)라고 불리는 나라를 형성하게 했습니다. 실재로 터키는 서구식 발음이고 실재로는 투르키에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라프족 : 라프족은 사메라고도 불리우며 이들의 조상은 볼가강 유역에서 서진했고 기원전 1000년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진출했습니다. 그 뒤 핀인과 계르만 계통의 노르웨이, 스웨덴 인들의 압박으로 일부만이 남게되었습니다. 이들 역시 우랄어족으로 알려져있으며 핀인과 관련이 있는 종족입니다.


사모예드족 : 이 민족은 저도 잘 모르는데 분명한 것은 라프족이나 핀족과 동일한 우랄어족의 일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사회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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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2. 4. 15:32

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곳에 있던 수메르의 도시국가였다. 지금은 텔 엘 무카이야르이다. 구약성서에는 아브라함의 고지(故地), ‘칼데아의 우르’라고 한다. 1854년 당시 쐐기문자의 해독자로 유명한 영국의 롤린슨(H.Rawlinson)의 부탁을 받은 주이라크 영국 영사인   J.E. 테일러가 발견하였으며, 1922년부터 영국의 C.L. 울리가 중심이 되어 본격적으로 발굴하였다. 우바이드기(期)에서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는 각 시대의 유적 ·유물이 밝혀졌으며, 최고(最古) 주민은 BC 4000년경까지 소급된다. 우바이드기 후반에 2.4 m 두께의 홍수층(洪水層)이 있는데, 울리는 이것이 수메르지방 일대를 덮치고 뒤에 길가메시 서사시에 반영된 대홍수라고 생각하였다.

  번영기는 초기 왕조시대(BC 2800∼BC 2400?)이며, 수메르 왕명표(王名表)는 홍수 뒤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키시 ·우루크왕조에 이어 우르 제1왕조를 든다. 왕명표에 있는 앞의 둘은 가공 연대인 데 대해, 우르 제1왕조는 4왕이 177년간 통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 왕명표에 있는 메스 안니 파다의 이름을 새긴 각명(刻銘)이 발견되었으므로 왕조의 존재는 확실해졌다. 우르는 일찍부터 원격지 무역을 하였고 크게 번영하여, 수메르 지방의 도시국가 중에서 지도적 지위에 있었다.

【왕묘의 발굴】 울리는 ‘왕가(王家)의 묘지’로 일컬어진 지구에서 약 2천기(基)를 발굴하였으며, 왕묘(王墓)는 그 중 16기이다. 모두 지하에 석조로 만들어졌으며, 호화로운 부장품과 다수의 순사자(殉死者)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왕 슈브 아드 묘에는 정교한 금 ·은세공과 보석을 여기저기 박은 머리장식품 ·빗 ·귀걸이 ·가슴장식품 등을 여왕의 시체에 장식하였고, 28명의 성장(盛裝)한 시녀를 매장하였다.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하프, 7현금(七弦琴), 2마리 당나귀가 끄는 썰매, 황금그릇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또 메스 카람 두그의 묘에서 출토된 황금단검과 투구, 다른 묘에서 발견된 스탠더드(標幟) 등 모두가 수메르문명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 ‘왕묘’는 이전에 이미 파헤쳐졌으나, 죽음의 수갱(竪坑)에서는 6마리 소가 끄는 2대의 수레와 병사 ·시녀 ·마부 ·악사 등 63명의 시체가, 또 죽음의 대수갱에서는 74명의 순사체가 발견되었다. 울리는 이것들을 BC 3200년 이전의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현재는 초기 왕조시대 후반으로 여기며, 왕묘 성격에 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우르 제3왕조】 BC 2370년경 수메르 지방은 셈계(系) 아카드인(人) 사르곤 1세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그러나 181년 동안의 사르곤왕조가 끝나자 수메르는 부흥하였으며, 이윽고 우르 제3왕조(BC 2113∼BC 2006?) 밑에서 번영을 되찾았다. 초대 우르남무는 시벽(市壁)을 재건하고 궁전과 월신(月神) 난나르를 위하여 웅대한 지구라트(聖塔)를 조영하였다. 역대 왕들은 주위에 신전을 건립하여 넓은 성역(聖域)을 만들었다. 제2대 슐기는 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함무라비법전》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다수의 점토서판(粘土書板)이 발견되어 당시의 경제생활과 교역활동을 전해준다. 그러나 이 왕조도 5대 107년 간 계속되다가, 엘람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posted by 치운 2013. 12. 4. 15:30

홍산(紅山)문화의 후예: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꽃잎.낙엽 퍼옴 lczhu77@hotmail.com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 만주『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요서의 신석기 홍산(紅山, 4000-3000 BC)문화를 공유하고,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알타이계통 언어권의 홍산문화는 한장(漢藏) 언어권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은 고대 연(燕, 1027-222 BC)나라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夏家店)하층(下層) 문화(2000-1500 BC)에서 찾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같은 지역의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 출현한 유목문화가 전파되면서, 하층문화가 본격적 청동기인 상층문화 형태로 전환되었다.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요하 유역에 이르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융합했고, 한반도로 전파되면서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역에 청동기시대를 전개했다. 기원전 400년경, 연나라는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전파했다. Janhunen은 연나라가 애당초 (漢族의) 중국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Di Cosmo는 소위 연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한족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사기(史記)는, 서주의 무왕(武王)이 소공(召公)을 북연(北燕)에 봉해주었다며, 남연(南燕)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석을 달았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에 걸쳐 등장한 전연(前燕), 후연, 서연, 남연, 북연 중 유독 「북연」만을 한족(漢族 馮氏)이 세웠고, 나머지는 모조리 모용 선비(慕容 鮮卑)족이 세웠다. 홍산-하가점 문화를 이어 받은 연나라는 소공의 북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 연나라의 성격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 1. Barnes (1993: 135)
 
홍산문화와 『선비-퉁구스』 원시 알타이 언어 공동체

정복왕조의 본고장 만주


洪 元 卓 (서울대 교수)

흉노족의 본고장인 몽골 초원

몽골초원은, 돌궐(터키)족의 선조이며 아마도 몽골족의 선조일 가능성도 있는 흉노의 본고장이다. Fagan (2004: 201)은 “초원지대는 마치 펌프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비가 충분히 올 때는 목초와 가축들이 잘 자라 유목민들을 흡수하지만,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유목민들을 주변지역이나, 이웃나라로 내몰게 된다. 기원전 9세기경, 초원지대의 기후가 갑자기 춥고 건조해졌는데, 몽골고원의 목초지가 제일 먼저 이러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8세기경, 가뭄이 초원지역 유목민들을 중국대륙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한족에게 격퇴되었고, 연쇄반응적인 민족이동이 일어나, 일부 기마(騎馬)유목민들은 당시 켈트족 세상이었던 유럽의 동부 변경인 다뉴브강 유역에까지 몰려가게 되었다.” 1

몽골고원은 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반부를 구성하며, 만주의 서쪽 경계로부터 시작하는 초원은 군데군데 높은 산들에 의해 단절이 되기도 하면서 헝가리 평원에까지 도달한다. 언뜻 보면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이 서로 만나서 유라시아 대초원을 절단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가타이의 이밀강(江) 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초원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산산맥의 북쪽 끝자락과 타르바가타이 준령 사이의 중가르 관문은 카자크 초원지대로 통하는 중앙아시아의 최남단 통로이다. 알타이산과 타르바가타이 사이의 이르티쉬 계곡 역시 서쪽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몽골고원의 돌궐-몽골 기병들은, 바이칼호(湖)로 흘러 들어가는 오르콘 강둑에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초원을 거쳐, 헝가리 평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달려갈 수 있었다. 이 초원의 통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밀고원을 넘어가는 천산산맥 남쪽의 실크로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교통로 이었던 것이다.
 
발카쉬호(湖) 서쪽의 (터어키쉬) 초원지대는 평균 고도가 해수면에 가깝지만, 몽골 초원은 평균 해발 1500미터로, 한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가고 한 겨울에는 영하 42도까지 내려간다. 고비는 건조한 초원지대로, 내몽골과 외몽골을 가른다. 북쪽의 목초지는 바이칼호와 흑룡강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들의 유역과 알타이산맥의 동쪽 경사지로 구성되어있다. 알타이지역은 여름의 한낮에는 섭씨 40도를 상회하며, 일조량이 18시간에 달한다. 바이칼호 주변지역은 몽골 초원지대가 시베리아 삼림지역으로 바뀌는 접경지대에 해당된다. 황하(黃河)에 의해 말편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오르도스 평원에 접하면서, 남쪽의 대마군산(大馬群山), 서쪽의 만주 등을 경계로 하는 내몽골도 수많은 유목민들을 부양하였다. 2 돌궐-몽골 족들은 양고기를 주식으로 했고, 염소, 낙타, 소, 말, 등을 길렀다.

    
 
▲ 2. Barnes (1993: 109)
 
선비-퉁구스 족의 본고장인 만주대륙

만주는, 북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남으로는 칠노도(七老圖)-연산(燕山) 산맥 등을 경계로, 몽골초원과 분리된다. 샤라무렌강(西拉木倫)-노합하(老哈河) 유역으로부터 서요하(西遼河) 유역에 걸쳐 만주 서부의 목초지대가 펼쳐지는데, 이 지역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기슭과 눌루얼후(努魯兒虎) 산맥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여기가 바로 동후(東胡)라 칭하는 선비족의 본고장인데, 문화적으로는 몽골에 가까웠다.

송화강 유역의 평원지대는, 동쪽의 울창한 삼림을 보면서 시베리아 끝자락으로부터 한반도 북변 산악지대까지 내려가는 도중, 남서쪽의 요하(遼河)유역 평원과 연결되어, 소위 동북평원을 형성한다. 만주의 중부 평야와 동부 산림지역에 살던 이른바 동이(東夷)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돌궐말로 돼지를 “통구즈”라 부른다는 사실을 근거로 “퉁구스”의 어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Janhunen(1996: 221)에 의하면, 이는 언어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접근방법이다.

홍산문화-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문화- 하가점 상층문화

신석기 홍산(紅山)문화(4000-3000 BC)의 유적은 요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3 홍산문화는 황하(黃河)중류-위수(渭水) 유역의 앙소(仰韶)문화와, 황하 하류 유역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킨 종족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들이 이룩한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유물로는 각종 의례용 도구를 포함하여, 점토로 빚은 인체조형물, 옥으로 만든 동물형상, 염료를 칠한 통형관(筒型管) 등이 발견되었고,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전통과 양과 돼지를 포함해 가축들을 길렀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竪穴式) 움집과 함께 저장고, 불을 때는 화로 등도 발견되며, “Z”자 모양의 문양, 빗살 문양, 칼끝으로 판 문양으로 장식된 적색 혹은 회색의 (회전판 위에서 완성된) 사질성(沙質性) 토기와 채색토기 및 토기제조용 가마, 수수를 수확할 때 쓰는 조개로 만든 칼 등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과 제사를 행했던 공공건물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를 보면 사회적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중국본토 문화유적의 조각품들을 보면 다분히 추상적으로 정형화 되었지만, 홍산문화의 조각품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 모양을 하고 있다.

홍산문화는 즐문(櫛紋)-인각(印刻)문 토기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반지, 칼, 손잡이 등과 같이 소형 동제품을 사용하는 초기 청동기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로 이어진다. 4 Barnes(1993: 109)에 의하면,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 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고, 사슴을 사냥하며 살았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 Nelson, 1995: 148-9)은 옛 연나라 (燕, c. 1027?-222 BC) 문화의 근원을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찾았으며, 궁극적으로는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곽대순(1995: 179)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나라 문화를 일으켰고, 일부는 그 자리에 남아 연나라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를 (서주-동주 시대) 연(燕)문화의 전 단계로 이해한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 2. Pottery with Incised Designs
excavated at Xin-le 新樂
 
곽대순(1995: 178)에 의하면, 연나라 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 사이에는 과도기적인 연계성이 존재한다. 하가점 하층의 채색토기에 그려진 동물 가면 문양은, 그 출현시점이 매우 이르고, 상당히 발전된 형태이었다. 상(商)나라 도철(??-전설상의 흉악하고 탐식하는 야수) 문양의 근원이 된 이 괴물 문양의 전통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00년경까지, 연나라에 존속 되었었다고 말한다. 곽대순은, 서주(西周, 1122-771 BC)시대의 연나라는, 주나라와는 크게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신탁(神託) 갑골(甲骨)에 이미 연(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시 연나라는 상(商, 1766-1122 BC)나라 때 이미 존재해 있었고, 그 문화적 전통이 서주 시대의 연나라에 이어져 보존되었다고 주장한다.

    
 
▲ 3. Sherds of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from the Han River Basin Area (Am-sa-dong)
 
유목민 생활 형태는 기원전 1000년경 알타이와 천산 산맥 주변지역에서 출현하여 소위 알타익-스키타이 시대를 전개했다. 스키토-사이베리안 사람들의 초기 유목문화는, 특히 기원전 6세기 이후에는, 장례 때 매장된 청동과 철제 무기류, 기마용 도구, 동물 형상의 공예품, 금과 보석 등 부장품의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몽골고원 초원지대로부터 새로운 유목문화의 도래는, 기원전 3세기경,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스키토-사이베리안과 전혀 다른 집단인 흉노제국의 팽창과 함께 일어난다. 5

Barnes(1993: 157-8)는, 하가점 상층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려 넣은 동제품이 (비록 기마전투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이지만) 동아시아에서의 기마전통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이라고 말한다. 6 Barnes는 하가점 상층문화 발생시기를 전후로 유목문화가 등장했고, 이 새로 생긴 유목문화의 전파가 하가점 하층문화(2000-1500 BC)를 상층문화(1100-300 BC)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 3. Sherds of Comb-Patterned (Chul-mun) Pottery from the Han River Basin Area (Am-sa-dong)
 
Barnes(1993: 153)는, 홍산문화 시대에 이미 그 흔적을 보인 청동기는, 같은 지역의 하가점 상층문화 시기에 와서 아주 본격적으로 다양한 품목들을 보여주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의 스키타이 유물과 유사한 동물문양의 청동제품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하가점 상층문화는 유라시안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유목민들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 상층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되면서 기원전 700년경부터 한반도에 본격적 청동기시대를 연 것으로 보았다. Barnes는 또, 고대 연나라가 남부만주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문화적으로 융합했고, 기원전 400년경에 한반도에 철기시대를 전개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빗살-민무늬 토기, 비파형-세형 동검, 북방형-남방형 고인돌

기원전 1300년경 까지는 요동과 요서 지역의 청동검들이 칼날과 손잡이가 분명하게 분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7 그러나 하가점 상층 유적지에서 발굴된 비파형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동검과 달리,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되었다. 한반도의 비파형 동검은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유래하며, 후에 세형동검으로 바뀌어 철기시대 초까지 사용된다. 하가점 상층에서는 하층과 달리 민무늬 토기가 발견된다. 8 한바도를 비롯한 만주의 여타 지역에서는 민무늬 토기가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용이 되었는데, 하가점 상층문화는 뒤늦게 (곽대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하 유역방향으로부터 민무늬 토기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다. 9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전체를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특이한 유물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요동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길림성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밀집된 형태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지역은 한반도이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시대 말기쯤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말기쯤 나타난 것 같으나, 이 두 형태의 고인돌은 그 분포지역이 상당히 중복된다. 고인돌의 축조는 기원전 300년경에 중단된 것으로 생각된다.10

돌을 사용하는 매장 방법, 토기의 형태, 청동제품 등의 유사성은 만주를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으로 연결시킨다. Di Cosmo(2002: 67)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으로부터 상층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실상은 하가점 상층문화와 북쪽의 몽골고원과 바이칼 주변지역 사이의 연관성이 완전히 구명될 때까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흑룡강, 눈(嫩)강, 송화강, 요하 등을 연결하는 만주대륙의 물길(水路)이 이들 전 지역에 철 제조 확산 과정을 포함하는 천연의 교통로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Nelson(1995: 252, 14)에 의하면, 동북지역에서 청동 제품이 상당히 일찍 발견되는데, 특히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 제품들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상나라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조차도 동북지역의 문화를 중원문화의 어설프고 야만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Nelson은 홍산문화는 중원의 문화와 분명히 다르며, 단지 그들이 문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중원문화에 결코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소공(召公)의 북연(北燕, 1027 BC), 한족(漢族 馮氏)의 북연(409-36), 선비족(慕容 鮮卑)의 남연(南燕)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武王)은 소공에게 북연(北燕)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봉해주었고 (c. 1027-1025 BC), 그가 연 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각주(註)에는, 이 봉토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연나라, 즉, 남연(南燕)이 존재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소공의 연나라 수도는 오늘날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연나라가 진시황제에게 멸망되기 90년 전인 기원전 311년, 연은 진개(秦開)를 시켜 동호(東胡=鮮卑)를 공격하고, 동북방으로 영역을 대폭 넓혔다 한다. 12 한 고조(r. 206-195 BC)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노관을 연왕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후에 흉노한테 도피를 했고, 흉노는 그를 동호왕으로 임명했다. 연나라에 관한 기록에 “동호”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사기 각주에 나타난 남연이라는 존재, 후세에 선비족들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국명을 “연”이라 부른 사실, 한족들한테는 모반을 한 자들로 보이는 공손연 (237년), 안록산 (756년), 사사명 (759년) 등이 한족과 차별성을 내세울 때 자신들을 연왕이라고 불렀던 사실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Janhunen(1996: 224)은, 고대의 연나라는 애당초 중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원시 투르코-몽골족이 바로 초창기의 연나라를 구성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구사하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모두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옛 전통을 공유하며 홍산문화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한족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말 한다면, 선비-퉁구스족은 홍산문화의 후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13 중국대륙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른, 요서의 신석기 홍산문화 유산의 상속-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범“선비-퉁구스” 계통의 역사-문화 공동체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5 (2005. 1. 22.)
정리: 강현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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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2. 4. 15:28

 http://blog.paran.com/lssblog3/8673859 
 
훈족은 투르크 아닌 몽골계

출처-국정브리핑 http://www.news.go.kr/warp/webapp/news/view?section_id=sn_sec_7&id=c35046e9af18b59a46a671d5


자존심 상한 유럽이 동방 아닌 유럽계로 설정
사상 최고의 기마군단으로 서유럽을 초토화시키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케 한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라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외이기는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고대사를 규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왜 한국인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훈족이 우리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훈족이 누구냐는 연구가 서양에서조차 300여 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이며,

 

둘째는 훈족을 흉노 중에서도 몽골계가 아니라 투르크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투르크계와 몽골계는 유사한 면이 있으면서도 차이점이 많기 때문에 한국 학자들로서는 민족이 다른 투르크의 역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고대 유럽 휩쓴 ‘훈족’은 한민족(2004.03.02), 사상 최강의 훈족(2004.04.19), 5세기 동양은 광개토태왕, 서양은 아틸라가 패자였다(2004.04.23) 참조).

 

〈서양인들의 자존심이 걸린 훈족의 원류〉

 

훈이 흉노에서 연유했다는 것은 1750년대에 프랑스의 드 기네(Joseph de Guignes, 1721∼1800)가 처음으로 제시하였지만 처음부터 정설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훈족이 누구냐는 것은 아시아 및 유럽 고대사의 이해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훈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럽인들은 아전인수격으로 훈족을 해석했다.

 

훈족의 기원을 놓고 아시아 흉노계를 비롯해서 몽골계, 투르트-몽골 혼합계, 투르크-몽골-만족 혼합계, 피노 우그리아계, 게르만계, 카프카스(코카서스)계 등 매우 다양하게 논쟁을 벌였지만 훈족을 연구하기 시작한 초창기의 유럽 학자들은 훈족을 흉노가 아니라 유럽계 유목민 즉 서양인으로 설정했다.

 

유럽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유목민은 ‘스키타이’라 불리는 유목민들이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7세기부터 러시아 대평원의 패권을 장악했던 기마민족으로 앗시리아의 에사르하돈(Esarhaddon, 기원전 681∼669년 재위) 연대기에 처음 나타난다. 앗시리아인들은 그들을 아쉬쿠즈(Ashkux 또는 Ashkuzai),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들은 사카(Saka)라고 불렀으며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Skythai 또는 Skythes)라고 불렀다. 그러나 스키타이들은 스스로를 스콜로텐(Skoloten) 혹은 슈크(Shk)라고 불렀으며 이란인 계통으로 추정된다(밀러는 남부 러시아의 스키타이 비문들을 분석하면서 지역에 따라 적게는 10퍼센트에서 많게는 60퍼센트까지, 다양한 이란적 요소가 발견된다고 발표했다).


훈족의 진격. 초창기 훈족을 연구한 학자들은 서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만든 훈족을 동양계로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므로 스키타이의 후예로 설명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목민답게 주위 민족들과 수많은 전쟁을 벌렸는데 학살과 약탈을 당연시했던 고대인들의 기준으로도 야만족이라고 비난받았다. 실제로 훈족과 칭기스칸의 몽골족이 공격적인데다가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행동으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잔인함에 관한 한은 스키타이가 이들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다.

 

스키타이족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 알려진 지식의 상당부분은 헤로도투스(Herodotus, 기원전 484?∼ 기원전 425?)와 로마의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n, 기원전 64∼ 기원후 21?)이 남긴 17권의 『지리서』의 증언에 의지한다. 헤로도투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 전사들의 야만스런 풍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스키타이 전사는 최초로 죽인 적의 피를 마신다. 또한 전투에서 살해한 적병의 머리는 모두 잘라 앞으로 가져온다. 전사들은 그 목의 수에 따라 전리품을 나누어 받으며 머리가 없으면 분배를 받지 못한다. 1년에 1명의 적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수치이며 부족회의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적의 목은 스키타이 전사의 무공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처리를 했다. 두개골의 눈썹 아랫부분을 톱으로 잘라내고 나머지 부분을 깨끗이 소제한 후 소의 생가죽을 입힌 다음, 안쪽에 금을 입히고 술잔으로 사용한다. 중요한 손님이 오면 이들 두개골을 보이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또한 머리의 양쪽 귀를 중심으로 둥글게 자른 다음 머리를 흔들어 두개골에서 두피(頭皮)를 떼어 낸다. 소의 늑골을 사용해서 가죽에서 살점을 떼어 내고 손으로 주물러 부드럽게 하면 손수건이 된다. 손수건을 말 고삐줄에 매달아 과시하는데 현대인이 볼 때 엽기적인 행동이지만, 스키타이 인들에게는 손수건을 많이 갖고 있는 자가 가장 훌륭한 용사로 간주되었다. 심지어는 머리 가죽을 여러 장 이어 맞추어 외투, 어깨망토, 방석 등을 만들었다. 이런 물건을 직접 사용해 본 헤로도투스는 살가죽이 희고 광택이 난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스키타이가 유럽 문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야만성 때문에 현재의 유럽이 존속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스키타이가 아니었다면 동방에 있는 더 큰 공포, 즉 중앙아시아로부터 주기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유목민들로부터 유럽을 구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의 야만성이 동방의 아시아인들로부터 서방을 지켜주는 방파제 구실을 했으므로 유럽의 학자들은 훈족을 스키타이의 후예나 그들의 방계로 간주했다.

 

화려한 스키타이 무덤. 스키타이 인들의 영토에서는 금이 풍부하여 황금 술잔을 사용하였고 은제나 청동제는 술잔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유럽학자들의 이러한 예단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훈족이 서진하는 과정에서 맞부닥친 민족으로 유명한 사르마타이족(Sarmatians)이 있었는데 이들은 스키타이를 격파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키타이를 이은 사르마타이족은 훈족의 주류가 아니라 훈족에 예속된 유목부족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훈족이 서방으로 진격하는 동안에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영향 하에 들어갔다. 훈족의 지배 하에 들어간 민족 중에는 사르마타이족뿐만 아니라 게르만족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는 스키리족(Skirians), 게피다이족(Gepids), 콰디족(Quadi), 헤룰리족(Heruli) 등이 특히 유명한데 그 중 스키리족은 한때 남부 러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훈족의 주력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차츰 흉노와 훈에 대한 사료가 축적되고 유물들이 곳곳에서 발굴되면서 훈족이 흉노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자 유럽인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훈족이 유럽인이 아니라면 아시아계통의 야만족에게 유럽이 정복당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훈족이 흉노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자료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학자 스트라보(Strabo, 기원전 63?∼기원후 23?)는 훈의 위치를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동쪽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역사학자 플리니우스(Plinius, 125년 사망)는 훈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흉노와 같다.

 

1세기 후반의 지리학자 오로시우스(Orosius)나 2세기 중엽의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Polemais)가 작성한 지도에 훈의 거주지역으로 표시된 지점들이 중국의 자료에 보이는 흉노의 지역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더욱이 355년∼365년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사이에 존재하던 알란(Alan)이 외적에 의해 침공당했을 때, 중국의 위서(魏書)에는 흉노에 의한 침공사실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 라틴학자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는 침공의 주인공을 훈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동서의 자료가 흉노와 훈으로 묘사한 또 다른 예는 북위(北魏)의 고종(高宗, 452∼465)에게 보내진 소그드어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북한(北漢)을 세운 유연이 평양(平陽)에서 황제를 칭하고, 그 아들 유총이 서진(西晉, 266∼316)의 수도 낙양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소그드 상인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낙양을 공략한 흉노를 훈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훈족이 투르크 계라면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아〉

 

외형적으로 볼 때 유럽인과 한국인을 포함한 몽골계는 확연히 구별된다. 동양계인 몽골로이드와 유럽인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형태학적 차이로 눈 부위를 지적하는데 몽골로이드는 코뼈가 낮은 데 비해 유럽인의 코뼈는 현저히 융기되어 있다. 또 유럽인의 윗 턱 부분은 그다지 돌출해 있지 않은데 비해 몽골로이드 윗턱은 치아와 더불어 돌출해 있다.

 

그런데 훈족이 유럽계 서양 유목민이 아니고 흉노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유럽 학자들은 훈족이 서양인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절묘한 대안을 내놓았다. 훈족이 흉노이기는 하지만 몽골-투르크계 중에서 투르크계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투르크족을 몽골로이드 계통에서 분리하여 백인 계통으로 분류한다. 즉 그들은 흰색 피부, 짙게 빛나는 눈동자, 둥근 얼굴, 강건하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단두(短頭, Brachycephaly) 백인종으로, 4대 백인종 그룹 중 유로피드 투라니드(Europid Turanid)계통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훈족이 흉노계 투르크계라면 몽골계 흉노가 서양을 지배했다는 문제점을 피해갈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6세기 중엽에는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토문카간(土門可汗)이 초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초반에 몽골 초원과 북부 중국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반면, 중앙 아시아와 중동지역 이슬람 세계 내에서 패권을 장악하며 11세기경부터 아랍 계열의 칼리프를 무력화하고 술탄의 명칭을 계승하였다. 투르크는 오스만 조에서 전성기를 맞아 1493년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대제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현재 터키 공화국의 모태가 되었다.

 

‘훈족’이란 용어는 원래의 훈족으로 불린 지배집단에 의해 지휘된 모든 부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훈족 속에 상당수의 투르크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수긍이 가는 일이다. 또한 훈족이 서방으로 서천하면서 조우하는 민족을 정복하면서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휘하에 들어갔다. 451년 살롱대전투가 벌어졌을 때 훈족의 주력부대는 훈족을 포함하여 훈족에 의해 정복당한 알란족과 동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 등 무려 45개 민족에 달하였다. 훈족에 유럽 계통으로 볼 수 있는 민족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사마천은 흉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콧구멍이 넓으며 콧수염이 아주 텁수룩하고 아울러 콧수염은 많지만 뺨에 난 뻣뻣한 털로 된 수염을 제외하고는 턱수염이 없다.

 

긴 귀에 구멍을 뚫어 둥근 모양의 귀고리를 달고 있다. 그들의 머리 모양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겨우 정수리에 있는 머리털만 남긴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찢어진 모양이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겉옷은 양쪽이 터져 있으며 그것을 묶은 허리띠의 끝을 앞으로 늘어뜨린다. 추위 때문에 소매는 손목에서 단단하게 묶는다. 짧은 털로 된 망토로 어깨를 덮고 털모자로 머리를 가린다. 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고 넓은 바지에 허리띠를 단단하게 묶는다. 허리띠에는 활집을 왼쪽 넓적다리 앞으로 기울여 맨다. 화살통 역시 허리띠에 매되 등 뒤에 걸치고 활시위는 오른쪽을 향하도록 한다.’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눈동자가 불타듯이 강렬하고 눈이 찢어진 모양이라는 것은 동양인의 모습이다. 사마천의 흉노에 대한 설명은 외양만 놓고 볼 때 대부분의 한국인을 설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기록도 있다. 후월(後越)의 태자(太子) 손진(孫珍, 흉노)이 한(漢) 사람의 시중(侍中)인 최약(崔約)에게 안질(眼疾)의 치료법을 질문했을 때, 평소에 손진을 경멸하던 최약은 익중칙유(溺中則愈)라 답했다. 손진이 “눈을 어떻게 물에다 잠기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최약은 “당신의 눈은 움푹 들어가서 바로 물에 잠길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손진이 화가 나서 최약 부자(父子)를 주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흉노로 불린 손진은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았다는 것을 뜻하므로 중국인과도 구별되고 몽골인과도 외모가 구별된다. 흉노를 묘사하면서 사마천은 동양인, 최약은 서양인의 모습으로 적었는데 흉노가 수많은 부족들로 구성되었다고 추정한다면 흉노의 모습이 완연히 다른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는 흉노 제국 안에서 사마천이 설명한 동양인과 최약이 설명한 서방계 모습의 민족이 함께 공존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료를 보더라도 흉노에 동양계와 서양계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훈족이 어느계인지를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럽인들은 재빠르게 훈족은 투르크계라며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했다.

 

우선 프랑스의 뻴리오는 중국어로 표현된 몇 가지 단어를 복원할 경우 이들 대다수는 투르크적이고 특히 그들의 정치적인 지배집단이 투르크에 속한다고 발표했다(국역판 {사기}에도 흉노족이 오늘날 핀란드와 헝가리 민족의 선조로서 원래 유럽 인종에 가까운 편이라고 적었다).

 

더불어 훈족의 왕가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중요한 증거로 제시했다. 아틸라의 아버지 문주크는 구슬(Boncuk)이나 깃발(Bayrak)이라는 뜻이며 아틸라의 아들인 덴기지크(Dengizik)의 어원도 투르크어 계통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 중류 시리아-이라크의 접경 지대에서 발굴된 3세기 중엽의 비문에서 훈족의 이름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이름도 투르크 식이었다.

 

몽골의 노인 울라(Noin Ula) 고분군 제25호에서 출토된 흉노의 인물 자수화도 투르크 계열로 추정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인물 자수화에서는 주인공이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빗고 있는데 이마가 넓으며 눈이 크고 짙은 콧수염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것은 안구는 검은색 실로, 동공은 남색 실로 수놓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몽골족은 동공이 검고 턱수염이 없으며 눈이 작은 반면에 투르크족은 동공이 남색이고 턱수염이 많으며 눈이 큰 것이 특징이므로 자수화의 인물은 투르크 계열이라는 주장이었다.

 

노인 울라 인물자수화. 노인 울라 제25호에서 출토된 흉노의 인물 자수화로 흉노가 투르크 계열이라는 증거로 제시되었지만 흉노를 투르크인이라 단정하는 것은 다른 자료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몽골의 고고학자 책 도이길소영은 주인공의 동공을 남색으로 수놓은 것은 검은 안구와 구별하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눈빛이 예리하고 위엄이 있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미술기법이고, 몽골인의 콧수염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르는 사람도 있으므로 동공의 남색이나 콧수염의 유무로 몽골인 여부를 가리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유럽인들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1955∼1957년에 섬서성 장안현 예서향 객성장(客省庄) 양주고분군에서 발견된 흉노 고분의 동제 부조(浮彫)도 훈족이 투르크계라는 근거로 인용했다. 이 부조에서는 콧대가 높고 가랑이가 긴 바지를 입은 장발의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씨름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투르크인들은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장발인데 반해 몽골인들은 코가 낮고 단발이므로 외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인 흉노가 투르크 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돌궐계와 몽골계는 장례방식이 다르다〉


웰스의 『세계문화사』. 웰스는 훈족을 서방세계가 그 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역동적이며 유능한 황색민족, 즉 유목 몽골계로 보았다. 
훈족을 연구하던 유럽인들은 초창기에 훈족을 유럽인이라고 주장했다가 유럽계로 분류되는 투르크인으로 설정했지만 이것도 곧바로 모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훈족이 몽골계라는 주장은 다음의 설명으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선 훈족이 유럽에 등장할 초창기부터 수세기 이내에 편찬된 유럽의 역사학자들의 사료에 나타나는 훈족의 모습은 투르크계가 아니라 몽골계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조시모스는 훈족을 일컬어 ‘형태 없는 돌덩이인 얼굴을 가졌다'면서 ‘피부색이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나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있고(눈이 작다는 뜻) 코가 납작하다’는 것은 동양인의 얼굴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도 이교도인 훈족에 대해 특히 심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그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이들은 낮은(모양이 없고 평평하게 자란) 코, 튀어나온 광대뼈, 얼굴에 있는 두 개의 눈은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그들의 꿰뚫어보는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

 

아폴리나리스가 설명한 훈족도 서양인의 얼굴이 아니라 동양인의 얼굴이 틀림없다.

유럽인들의 언어학에 의한 주장도 반론이 제기되었다. 일본의 시라토리 쿠라키치를 비롯한 동양계 학자들은 흉노의 언어적인 연구에 의하면 유럽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흉노는 투르크 계열이 아니라 몽골로 구분해야 한다고 단언해서 발표했다.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으로 유명한 웰스(Herbet George Wells, 1866∼1946)도 그의 저서 『웰스의 세계문화사』에서 훈족을 서방세계가 그 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역동적이며 유능한 황색민족 즉 유목 몽골계로 보았다.

 

유럽인들이 훈족을 투르크족으로 예단하게 된 이유는 동로마 황제가 훈의 지도자들에게 ‘투르크 왕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현재는 투르크가 특정 민족의 이름으로 굳어졌지만 고대 알타이어에서 ‘투르크(Turk)’는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은 훈족이 투르크계라고 주장한 프랑스의 뻴리오였다.

 

아틸라의 장례식. 아틸라의 시신은 투르크의 풍습처럼 화장하지 않고 판노니아의 티스자 강 근교에 매장되었다. 아틸라의 묘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알렉산더 대왕, 칭기스칸의 묘와 함께 고고학자들이 가장 발굴하고 싶어하는 무덤이다. 


그러나 훈족이 투르크계가 아니라 몽골계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빙하는 자료 중에 하나는 두 민족간의 장례 방법이 완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흉노의 몽골계는 염을 한 뒤 입관하여 땅에 매장하는데 반하여 돌궐 등 투르크계는 화장한다.

 

그러므로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흉노의 무덤들이 발굴되는데 이들이 투르크계라면 인골이 발견될 수 없는데도 일괄적으로 무덤 속에서 인골들이 발견됨을 볼 때 훈족은 몽골계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틸라의 장례식에도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아틸라가 몽골계임을 반증한다.

 

또한 말도 몽골계는 매장하지만 투르크계는 시신과 함께 화장한다. 이것은 훈족의 지배집단이 투르크계가 아니라 몽골계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몽골에서는 대칸의 장례시 금령마(金靈馬)라는 화려한 장식의 말을 순장한다. 특히 노욘산의 흉노 고분에서 수달피 수의(흑초피(黑貂皮))가 발견되자 흉노는 몽골계가 주류임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수달피 수의는 흉노를 비롯한 몽골계 북방민족의 전통적인 장례 습속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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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1. 28. 11:32
Ⅰ.오리엔트 수학 : 실용적인 산술과 측량

▶ 오리엔트 수학의 특징

▶ 바빌로니아 수학

▶ 이집트 수학

▶ 수의 표기법

 

◎이집트의 상형 문자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

 

◎마야 수체계

 

◎로마 수체계

 

◎인도-아라비아 수체계

◆오리엔트 수학의 특징

아프리카의 나일 강변(이집트 문명), 서아시아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메소포타미아 문명), 남 중앙아시아의 인더스 강 유역(인더스 문명), 동아시아의 황하 유역(중국 문명)에 기원전 2000년까지에는 고대 4대문명이라고 부르는 상당히 발달된 고대 국가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고대 국가의 주요 경제 활동은 농업과 목축으로 이 강들의 홍수로 부터 농토를 관리하는일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분배하고 조정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초기의 수학은 주로 고대 오리엔트(그리스의 동쪽)의 지역에서 농업이나, 토목, 건축과 같은 일에 필요한 실용적인 과학으로서 발생했다.
즉, 초기 수학의 특징은 실용적인 산술과 측량에 있었다. 이로부터 대수와 기하학의 시초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오리엔트 수학에서는 오늘날 '증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를테면 '이렇게 하여라.' 그러면 구하는 넓이 등이 구해진다고 할 뿐, 왜 그렇게 하면 그것이 구해진다는 이유를 밝힌 것은 없는데, 이것은 Ⅱ에서 논하는 고대 그리스 수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수학에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이와 같은 고대 문명에서 수학은 필수적인 요소의 하나였는데 오늘날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메소타미아)의 것뿐이다.
결국 오리엔트 수학은 토지측량, 토목공사 등 현실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만 쓰여진
'생활수학'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바빌로니아 인들은 영구적인 구운 점토판을 사용했고 건조한 기후 지역의 이집트인들은 돌과 나일강변의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를 사용했다. 그러나 초기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은 나무 껍질이나 대나무와 같은 썩기 쉬운 재료에 기록을 남겨 놓아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전해진 것이 별로 없다.

◆바빌로니아 수학

초기 바빌로니아인들은 바늘을 가지고 젖은 점토판에 뾰족한 이등변 삼각형을 새겨 넣어 쐐기문자를 만든 다음 기록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그 판을 화덕 속에서 구워서 남겼다.
이것이 19C에 와서 기원전 1600년경의 함무라비 왕조의 점토판이 발굴되고 쐐기문자 원문을 해독함에 따라 바빌로니아인들이 상업과 농업에 있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계산술을 사용했고 60진법의 수체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기하학은 거의 실제 측량과 관계된 것으로 특징은 대수적 성질에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2차방정식의 해법과 연립 2원2차방정식의 해법도 알고 있었으며 3,4차 방정식의 간단한 것도 다룰 정도로 대수가 싹트고 있었다. 오늘날 원주를 360등분 하는 것도 틀림없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업적이다.

 

◆이집트 수학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하류 지방에 있는 파피루스라는 갈대와 비슷한 풀을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기원전 1650년 경의 사원의 서기인 아메스가 쓴 '아메스의 파피루스'(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린드 파피루스라고도 함)에는 농토의 면적을 구하는 방법, 분수 계산의 방법과 같은 당시의 수학이 기록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원의 면적을 직경의 8/9의 제곱과 같다고 했고 직원기둥의 부피와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였으며 거대한 피라미드의 부피도 구하였지만 바빌로니아인들에 비하여 1차방정식 밖에 다루지 못하였다.

 

◆수의 표기법

아마 초기의 셈은 일대일 대응 원리를 이용한 간단한 조각 물건에 의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 접기, 조각돌이나 막대기 모으기, 자국 내기, 새김눈 내기, 매듭 묶기를 해서 셈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수를 세는 방법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수를 표기할 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나라마다 독특한 표기법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 기원전3400년경 이전에 사용되었으며 10진법에 기초하여

 

임의의 수는 모두 위의 기호를 요구된 수만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표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13015=1(10⁴)+3(10³)+1(10)+5     =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 : 기원전 2000년경 ∼기원전 200년에 사용되었으며 뺄셈 기호를 이용하여 표기를 간단히 하기도 했다.

예를들면, 38=40-2=
기원전 3000년과 기원전 2000년 사이의 고대 바빌로니아 인들은 위치의 원리를 이용한 60진법을 개발했었다.
예를들면, 524,551=2(60³)+25(60²)+42(60)+31=
이방법은 그 위치에 따라 1, 60, 60², ···을 나타냄으로써 오늘날 사용하는 위치적 기수법의 시초가 된 셈이지만 기원전 300년 후까지도 0에 대한 기호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마야 수체계 :20진법에 기초하며 0에 대한 기호가 있으며 이 기호의 변형이 지금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점과 대시에 의해 매우 간단히 표현되고 있다.
큰 수는 마야의 방식대로 세로로 쓰여졌다. 예를 들면

오늘날 초등산수에서 사용되는 긴 곱셈이나 나눗셈과 같은 계산 규칙은 15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개발되었다. 이렇게 계산 규칙이 느리게 발전된 이유는 충분한 종이 재료가 없었기 때문인데(중국인들의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12C이후에 유럽에 소개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판을 사용하였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덧셈, 뺄셈 방법에서 넘겨주거나 빌려 오는 개념이 바로 수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로마 수체계

10진법 또는 5진법을 사용하고 뺄셈의 원리(작은 단위의 기호를 보다 큰 단위의 기호 앞에 놓아 두 단위의 차를 나타냄)가 이용되었다.

1

5

10

50

10²

500

10³

I

V

X

L

C

D

M


예를 들면
1944=MDCCCCXXXXIIII
1994=MCMXLIV

이러한 형식은 큰 수를 나타내기가 불편하며 계산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계산은 수판으로 하고 숫자는 그 결과를 기록하는 데 사용하였다.

◎인도-아라비아 수체계 :1, 2, 3, 4, 5, 6, 7, 8, 9.0
인도-아라비아 수체계는 인도인들이 그것을 발명하고 아라비아인들이 서유럽으로 전파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위치값이나 0이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페르시아 수학자 알-화리즈미(al-Khowarizmi)가 825년에 출간한 책이다. 이 책에서 완전한 인도 수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새로운 수체계가 언제 유럽에 전해졌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13세기 쯤에는 이미 전유럽으로 전파되어 널리 쓰이고 있었다.
그 후 「수판론자와 산법론자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다가 수판론자들은 자취를 감추고 18세기가 되면 서유럽에서 수판은 사라진다.

 

0이라는 뜻의 영어 'zero'는 '공허한'혹은 '텅빈'이라는 의미의 인도어 sunya가 아라비아어 sifr의 라틴어 형태인 zephirum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 0이라는 기호로 말미암아 마침내 오늘날의 10진법이 확립되고 사칙연산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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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1. 23. 12:34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수학

 

고대 오리엔트

  사회의 형태가 점차 발전되어감에 따라 초기의 수학도 실용적인 토대 위에서 발전해 갔다. 신석기 시대의 농경문화의 사회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몇몇 큰 강의 유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아프리카의 나일 강변, 서아시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메소포타미아), 남 중앙아시아의 인더스 강 유역, 동아시아의 황하 유역이었다. 강은 편리한 수송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배수, 치수, 관개 등으로 강 유역의 땅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광대한 사업은 전에는 서로 떨어져 있던 지역을 결합시켰고 또 그러한 사업에 따르는 공사, 제정, 관리경영 등과 더불어 그들 사회가 창조된 목적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지식과 그에 수반되는 수학의 발전을 요구했다. 따라서 초기의 수학은 주로 고대 오리엔트의 지역에서 농업이나 토목, 건축과 같은 일에 필요한 실용적인 과학으로서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일은 하기 위해서는 측량법을 개발해야 했고 또 거래의 목적이나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데 필요한 회계 업무의 발전이 필요했다.
  방금 살펴보았듯이 초기 수학의 특징은 실용적인 산술과 측량에 있었다. 특별한 기교는 이러한 실용과학의 촉진과 응용 또는 교육을 통하여 우연히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추상화 경향이 발전하게 되었고, 또 어느 정도로는 과학 그 자체를 위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대수가 산술로부터 발전하였으며 이론 기하학의 시초가 측량으로부터 발전하였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이루어진 발견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이들 어려움의 한 가지는 당시의 사회 구조가 정적인 상태에 있었고 또 어떤 지역은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그 발견이 보존되는 데 필요한 종이 재료가 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영구적인 구운 점토판을 사용했고 이집트인들은 돌과 파피루스를 사용했는데, 다행히도 후자는 그 지역의 건조한 기후 덕분으로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나무껍질이나 대나무와 같은 썩기 쉬운 재료를 사용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의 과학과 수학에 대한 상당한 양의 지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반면에 고대 중국과 인도에서의 연구는 확실하게 전해진 것이 별로 없다. 따라서 헬레니즘 이전 시대의 수학을 주로 살펴 볼 이 장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 관심을 제한하게 될 것이다.

바빌로니아
 
1. 기원
  19세기의 처음 50년 이래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한 고고학자들은 약 50만개의 점토판을 체계적으로 발굴해 냈는데 그 점토판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중 5만개는 노대 니푸르(Nippur)의 유적지에서만 파낸 것이다. 그 중에는 대단히 훌륭한 수집품도 많이 있었는데 주로 파리, 베를린, 런던 등의 대 박물관과 예일, 컬럼비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고고학 전시관 등에 소장되어 잇다. 이 점토판들은 크기도 다양해서 겨우 몇 평방 인치밖에 안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책의 크기만한 것까지 있다. 글자가 판의 한쪽 면에만 있는 경우도 있고 양쪽면 모두에 있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판의 가장자리 둘레에 있는 경우도 있다.
  50만개의 점토판 중에서 약 300개가 수학에 관한 점토판으로 판명되었는데 수학에 관한 표와 문제가 적혀 잇다. 오늘날의 고대 바빌로니아인의 수학에 대한 지식이 바로 이들 수학판을 학문적으로 판독하고 번역해서 얻은 것이다.
  바빌로니아 점토판이 발굴되고 그의 쐐기문자 원문을 해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들 판으로부터 당시의 생활상과 관심거리를 알게 되었고, 또 바빌로니아 역사가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점토판의 수학 원문을 보면 기원전 2100년경의 최후의 수메르인 시대로 연대가 추정되는 것이 있고, 그 다음 시대로는 기원전 1600년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바빌로니아 왕조인 함무라비 왕 시대의 것이 대단히 많고, 그 다음에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300년까지 이어지는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신바빌로니아 제국시대의 것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와 세레우시단(Seleucidan) 시대의 것도 이어진다.

2. 상업과 농업수학
  가장 오래된 점토판조차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계산술을 보여주고 있고 또 60진법 위치 체계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졌음을 분명하게 해 준다. 이 초기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떤 판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 화폐, 영수증, 약속어음, 회계, 이익, 저당, 판매, 보증 등에 매우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상업을 하는 회사가 있었다고 기록한 판도 있고 무게나 크기의 체계를 다룬 것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달력은 아주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잇는데 그것은 그들의 일 년이 춘분에서 시작했다는 점이고 또 첫달이 황소자리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4700년 경의 춘분에 태양이 황소자리별에 있었으므로 바빌로니아인들이 이미 기원전 4000~5000년 경전부터 약간의 산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기하학
  바빌로니아의 기하학은 거의 실제 측량과 관계된 것이다. 많은 구체적인 예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의 바빌로니아인들이 직사각형의 면적, 직각삼각형과 이등별삼각형의 면적(아마 일발 삼각형의 면적까지 포함한 것 같음). 측별이 평행인 변과 수직인 사다리꼴의 면적, 직평행 6면체의 부피, 더욱 일반적으로 특별한 사다리꼴 밑면을 갖는 직각기둥의 부피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또 원주는 직경의 세 배로 했고 원의 면적은 원주의 제곱의 1/12로 했는데 이는 π=3으로 생각하면 정확한 공식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원주를 360등분 하는 것도 틀림없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업적인 것 같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이 수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이 제안되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노이게바우어의 다음 주장이 가장 그럴 듯 하다. 초기 수메르인 시대에는 오늘날의 7마일쯤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 마일'이라는 커다란 거리 단위가 있었다. 바빌로니아 마일은 보다 긴 거리를 측정할 때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시간의 단위(즉, 1바빌로니아 마일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나중에 바빌로니아 천문학에서 천체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이루어지는 처음 기원전 1000년 동안에 종종 바빌로니아 시간-마일이 시간의 간격을 측정하는 데 이용되었다. 하루는 12시간-마일과 같았고 또 완전히 하루가 하늘이 한 바퀴 도는 것과 같았으므로 완전한 1회전이 12등분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편의를 위하여 다시 바빌로니아 마일이 30등분으로 나누어졌고 1회전이 (12)(30)=360등분되었다.

4. 대수
  기원전 2000년까지 바빌로니아 산술은 잘 개발된 산문 형식의 대수로 발전하였는데 당시에 벌써 2차 방정식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3차 방정식과 4차 방정식까지 논의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표 제작자였으며 고등 기술을 가진 계산가였고 분명히 기하학보다는 대수에 더 강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이 다룬 문제의 깊이나 다양성 앞에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5. 플림프톤 322
  지금까지 분석된 바빌로니아 수학판 중에서 가장 놀랄만한 것은 '플림프톤 322'(Plimlton 322)로 알려진 것이다. 이 이름은 그것이 컬럼비아 대학의 플림프톤 소장품의 목록번호 322라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기원전 1900년에서 기원 전 1600년 사이로 연대가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고어체로 쓰여셔 있는데 그것은 1945년에 처음으로 노이게바우어와 사크스(Sachs)에 의해 분석되었다. 직각삼각형의 변의 크기가 될 수 있는 {3,4,5}와 같은 세 개의 양의 정수의 집합을 피타고라스 3쌍(primitive Pythagorean triple)이라고 한다. 
  플림프톤 322에 대한 분석은 바빌로니아 수학판이 대단히 주의깊게 관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전에는 그러한 판이 단순히 상업적 목곡이나 기록으로 간단히 처리되어 왔다.

이 집 트

1. 기원과 연대
  일반적으로 세평과는 달리 고대 이집트의 수학은 결코 바빌로니아 수학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빌로니아의 보다 진보된 경제적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또 바빌로니아는 지정학적으로 많은 대상(隊商)들이 다니는 길목에 위치했지만 이집트는 반고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나일 강은 흐름이 자주 바뀌는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과는 달리 광대한 토목공사나 관리상의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바빌로니아의 수학판이 최근까지 해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집트가 고대의 역사적 조사에 있어서 오랜 동안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 되어 왔다. 그것은 이집트인이 죽음을 경외하였고 또 그 지역이 매우 건조한 기후이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는 무덤과 화려하게 조각된 벽으로 이루어진 사원들을 짓게 했고 후자의 이유가 많은 파피루스와 그 밖의 물건을 썩지 않게 보존하도록 했다.

2. 산술과 대수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는 모두가 수치 계산인데 대부분 매우 간단한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문제가 실용적인 기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론적 성질을 띠고 있는 경우도 몇 가지 있다.
  곱셈의 한 예로서 26과 33을 곱해 보자. 26=16+8+2이므로 33의 배수를 더하면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33
          *2    66
           4   132
          *8   264
         *16
  528  
                 858

  별표를 달아서 표시한 33의 배수를 더하면 858이라는 답을 준다. 이제 753을 26으로 나누어 보자. 우선 배가를 계속해서 피제수 753을 초과하게 되는 바로 앞까지 제수 26을 계속적으로 배가해 간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26
           2    52
          *4   104
          *8   208
        
*16   416
          28

한편

         753 = 416+337
               = 416+208+129
               = 416+208+104+25

이므로 위의 열에서 별표시가 붙은 항을 주시하면 몫이 16+8+4=28이고 나머지가 25임을 알 수 있다. 곱셈과 나눗셈의 이 이집트 방식은 곱셈표를 배워야 할 필요를 없애줄 뿐만 아니라 수판에서도 매우 편리했으므로 수판이 이용되는 기간에는 물론이고 그 외의 기간에서도 계속해서 이 방법이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린드 파피루스와 모스크바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는 실용적인 기원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빵과 맥주의 농도라든가 가축들의 먹이 혼합, 곡식의 저장과 같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 많은 것이 간단한 1차 방정식에 관한 문제인데 그것을 일반적으로 나중에 유럽에서 임시위치법(臨時位置法, rule of false position)으로 알려진 방법에 의하여 풀렸다.

    χ+χ/7+24

를 풀기 위해서 χ에 임의의 편리한 값 하나를 가정한다. 예를 들어 χ+7이라고 하면 χ+χ/7+24=8이 되는데 8의 세 배가 24이므로 정확한 χ의 같은 3(7), 즉 21이 된다.

3. 기하학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 중에 26개가 기하학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땅의 면적과 곡물창고의 크기를 계산하는 데 필요한 측량 공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원의 면적은 직경의 8/9의 제곱과 같다고 했고 직원기둥의 부피는 밑면의 면적과 높이의 곱으로 구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면적은 밑변과 높이의 곱의 반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보인다.
  모스크바 파피루스에는 정사각 피라미드의 절두체의 부피에 대한 정확한 공식의 한 수치 예가 나오는 데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고대 오리엔트의 수학에서는 이 공식에 대한 어떤 확실한 예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몇 가지 추축만으로 그 공식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벨(E.T. Bell)이 이 초기의 이집트의 예를 비유하여 "가장 거대한 이집트의 피라미드"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다음은 고대 이집트의 수학과 관계가 잇는 명확한 항목을 연대순으로 열거한 것이다. 이 항목 외에도 오늘날 우리의 지식에 기여한 많은 비문과 파피루스가 있다.

1) 기원전 3100년경
  옥스퍼드에 있는 한 박물관에 이 당시로 연대가 추정되는 호화스러운 이집트 철퇴가 있다. 이 철퇴에는 전투의 승리를 기록한 이집트 상형문자로 씌여진 수백만개의 글자가 있는데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수가 나온다.

2) 기원전 2900년경
  기제(Gizeh: 카이로 부근의 도시)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는 기원전 2900년경에 세워진 것인데 이는 틀림없이 어떤 수학적, 공학적 문제가 관계되었을 것이다. 그 피라미드는 13에이커의 땅에 평균 2.5톤의 무게의 돌이 이백만개 이상 조심스럽게 쌓여져 만들어진 것이다. 이 돌들은 나일 강가의 사암 채석장에서 옳겨 온 것이었다. 피라미드 안에 있는 어떤 방의 천장은 54톤이나 나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길이가 7피트이고 두께가 4피트나 되는 이 돌들은 6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채석장으로부터 운반되어 와서 지상에서 200피트가 되는 높이까지 올려진 것이다. 또 정사각형의 밑변의 상대 모차가 1/14000보다 작고 직각의 상대오차가 1/27000보다 작다. 그러나 이 인상적인 통계치에 함축된 공학기술은 그 작업이 10만명의 사람이 동원되어 30년 동안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상당히 감소된다.

3) 기원전 1850년경
  이는 모스크바 파피루스의 근사적인 연대로서 모스크바 파피루스는 그것이 편찬된 것보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 25개의 문제가 실린 수학책이다. 모스크바 파피루스는 1893년에 이집트에서 구입되어 1930년에 편집자의 주석을 달아 인쇄되었다. 그것은 볼래 가로가 3인치이고 세로가 18인치였다.

4) 기원전 1850년경
  추선과 가늠대로 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학 기구가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베를린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5) 기원전 1650년경
  이는 린드(혹은 아메스) 파피루스의 근사적인 연대인데 그것은 실제의 편람 형태로 된 수학책으로서 필경가 아메스(Ahmes)가 그 이전의 작품을 신성문자로 베껴 쓴 85개의 문제가 수록되어 있다. 이 파피루스는 스코틀렌드의 이집트학 학자인 린드(A. Henry Rhind)가 1858년에 이집트에서 구입한 것인데 나중에는 대영박물관에 보존되게 되었다. 이 파피루스와 모스크바 파피루스가 고대 이집트 수학의 정보에 대한 주요한 근원이다. 린드 파피루스는 1927년에 인쇄되었다. 그것은 가로가 1피트이고 세로가 18피트쯤 된다.

6) 기원전 1500년경
  시브즈(Thebes: 고대 이집트의 수도에 있는 태양의 사원 앞에 세워진, 현존하는 가장 커다란 오밸리스크(방첨탑, 方尖塔))가 이 시대로 추정된다. 그것은 높이가 105피트이고 밑면은 한 변이 10피트인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고 무게는 430톤쯤 된다.

7) 기원전 1500년경
  베를린 박물관에 이 시대로 추정되는 해시계가 하나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해시계이다.

8) 기원전 1350년경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기언전 1350년의 롤린 파피루스는 당시에 이미 큰 수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9) 기원전 1167년경
  이는 헤리스 파피루스의 연대인데 그것은 라메시스 4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만든 문서로 그의 아버지인 라메시스 3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잇다. 당시의 사원의 재산에 대한 명부 작성이 오늘날 고대 이집트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운 실용적인 셈의 가장 좋은 예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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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운 2013. 11. 23. 12:31

1.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이집트의 나일강, 바빌로니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인디아의 갠지스강, 중국의 황하 등의 유역에서 문명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므로 그 피해를 막기 위하여 통치자는 이것을 정확히 예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정기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하늘을 관찰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이집트인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에 이미 1년이 365일과 1/4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당시의 지배자는 국민이 입은 피해의 정도에 맞추어 그 세금을 절감해야 했으므로 이로 인하여 수의 계산기술도 상당히 진보되었다고 한다. 초기 수학은 농업, 토목, 건축과 같은 일에 필요한 실용적인 과학으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의 과학과 수학에 대한 상당한 양의 지식이 오늘까지 전해지나 중국이나 인도의 연구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중국인과 인도인은 썩기쉬운 재료를 사용했으나 바빌로니아 인은 그들의 문자를 점토판에 적어 햇빛에 말려서 사용하여 지금까지 점토판이 많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곱셈표, 역수표, 제곱, 세제곱표, 지수표가 표시되어 있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세계최고의 수학서는 대영 박물관의 Rhind 수집품 중에 있는 아메스의 파피루스이다. Rhind 는 1858년에 이것을 구입했다. 이 파피루스에 기재된 고문서는 1877년 독일의 고고학자 아이젠로올에 의하여 현대어로 번역되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집트 사람들은 이론적인 성과를 몰랐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증거로 거기에는 정리가 없음을 들 수 있으며 일반법칙도 거의 없었다. 대개가 같은 종류의 문제를 몇 개고 계속 풀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귀납적으로 쉽게 일반법칙을 발견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하지 않고 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에는 분수의 계산을 표기하고 있고, 또한 1개의 미지수를 가지는 1차방정식 및 2차방정식에 귀속되는 문제도 다루고 있다. 또 아메스의 파피루스에는 여러 가지 기하문제 등이 있고, 원주율 π로서는 (16/9)2 = 3.1604… 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원과 동면적인 정 4각형의 존재도 인정했던 흔적도 있다.

  이집트의 고문서에는 등차급수, 등비급수 등에 해당되는 예를 볼 수 있다. 아메스의 파피루스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아마도 기하학적 지식을 표시하고 있는 최고의 증거품일 것이다. (모스코바 파피루스) 고대의 과학은 미신과 결부되어 있다. 바벨로니아의 기하학적 도형이 길흉을 점치는 데에 사용되었던 증거도 있다. 그들의 도형 중에는 평행선, 정 4 각형, 오목각을 포함하는 도형 등이 있다. 바빌로니아인은 60진법을 아용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1차방정식, 2차방정식도 풀고 있었다. 바빌로니안 인의 점토판인 Plimpton 322에는 직삼각형을 나타내는 세변의 테이블이 실려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피타고라스 원시 3 쌍(공통인수가 없는 3 쌍)이 실려있다.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문제 : 재산이 일곱채의 집이고 각 집에는 7마리의 고양이가 있고 각 고양이는 7마리의 쥐를 먹었고 각 쥐는 7개의 밀 이삭을 먹었고 각 밀 이삭은 7홉의 곡식을 만들 수 있다. 집, 고양이, 쥐, 밀이삭, 홉 모두를 합하면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