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치운 2013. 10. 25. 12:00

3. 고구려 영토의 몇 가지 문제

고구려 영토의 변화와 관련하여 아직 해결하지 못한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먼저 고구려가 오늘날의 북경일대를 지배했는가라는 문제다. 고구려가 북경 일대를 장악했다고 보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408년에 죽은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그려진 13태수의 하례를 받는 장면과 묵서명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묵서명은 고구려가 자사, 태수와 현령까지 갖춘 구체적인 지배체제를 가동하여 북경 인근의 구체적인 영토를 지배했다는 단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408년 이전에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지배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학자들이 더 많다. 유주자사 진을 망명객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유주자사를 지낸 진이 설령 고구려의 지배체제의 틀에서 그곳을 지배한 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망명해 올만큼 고구려가 유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고구려가 404년 북경 인근으로 추정되는 연군(燕郡)을 공격한 기록도 있는 만큼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이 검토되어야 한다.

고구려 영토와 관련된 몇몇 중요 지명의 경우도 논란의 소지가 많다. 특히 낙랑, 서안평의 위치는 기존 통설이 많이 공격받기도 한다. 구체적 지명의 위치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검토가 있어야만 하겠다.

이런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반드시 검토해야 할 부분은 말갈 지배 문제다.

중국에서 나온 역사지도에 보면 고구려의 영토 범주에 말갈 거주지는 전부 제외시켜 놓고 있다. 심지어는 고구려 동부 중심인 책성주변도 말갈의 영역으로 그린다. 고구려와 말갈을 철저히 분리시켜 보자는 시각이다. 고구려와 말갈을 분리시키려는 중국의 지도에는 단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조공을 한 국가를 중국의 영역에 포함시킨 장면과 극도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지도에는 고구려의 입장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갈은 고구려의 주요 구성원이다. 고구려와 말갈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말갈은 고구려 군대에 속하여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전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 존재였다. 598년 영양왕은 말갈군 1만을 이끌고 영주를 공격했으며, 661년에는 말갈장군 생해는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 뇌음신 장군과 함께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말갈군은 고구려군의 선봉에 서서 당나라 주력부대와 맞서 싸웠다.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말갈은 고구려와 분리시켜 볼 수가 없다.

수서에 기록된 말갈 7부 가운데 백산부, 안거골부, 호실부, 속말부, 백돌부는 고구려에 속한 부족들임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는 최근의 중국학자들의 발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불열부는 아예 기록조차 없어 단정하기는 힘들고, 흑수부는 유독 다른 계통을 지닌 읍루-물길과 연결되는 종족으로 여겨지는데, 흑수부는 고-당 전쟁 때에는 고구려를 도와 전쟁에 참전했다. 만약 고구려와 말갈이 전혀 별개의 세력이라면 어떻게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하나의 국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겠는가?

가장 이질적인 흑수말갈 조차 고구려와 무관한 세력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말갈에 대한 어떤 통제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양자 관계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흑룡강가에 위치한 러시아의 국경도시 하바로브스크시 인근의 코르사코브스키 고분군 112호 고분에서 고구려의 금동불상과, 같은 고분군에서 고구려식 화살촉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이곳은 흑수말갈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삼강평원의 북쪽이다. 금동불상과 화살촉 유물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 사는 흑수말갈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그릴 때에는 말갈의 거주지로 알려진 동북 지역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시 영토 개념에도 더 가까울 것이다. 손영종의 『고구려사2』의 지도는 고구려가 말갈 전역을 완전히 영토로 삼았다고 해석한 지도라고 볼 수 있다.

 

 

말갈 지역을 지도로 그릴 때에는 백산부와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 호실부 지역은 고구려의 내지에 그려 넣고, 연해주 북부와 삼강평원 일대의 흑수부 지역은 고구려의 변방으로 그리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구려사2』 지도에 표시된 흑룡강 북쪽의 시베리아 지역은 고구려 영토로 표시할 수 있을까?

먼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고구려를 그저 주변에 존재한 가장 강대한 국가 정도라고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담비가죽을 비롯한 산물을 거래하는 상업 활동의 보호, 여러 부족들의 산발적인 내침(來侵) 방지, 여러 부족들의 병사를 차출하여 외부와의 전쟁에서 동원 등을 목적으로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구체적인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가 이곳에 통치조직을 갖춘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은 아직까지는 무리한 역사 추론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간혹 무력시위를 하거나, 외교관을 파견하고, 소수의 부족장들에게 고구려 관직을 주는 책봉을 하거나, 또는 고구려의 선진 문물을 하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구려를 따르게 하는 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만으로 고구려 영토를 이곳까지 그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만약 현대 중국의 영토 표시 방법에 준하여 고구려 영토를 그린다면, 고구려가 숙신에게 조공을 받고 말갈 등을 제어한 것만으로도 북쪽 영토는 무한정 확대되어 그려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 지도에 고구려 영토에서 말갈을 제외시킨 것은, 수와 당의 영토를 그린 방식과 전혀 다른 이중 잣대로 지도를 그린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지도 표시 방법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북한의 『고구려사2』 지도 역시 지나친 과장이 있지만, 중국의 지도 표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겠다.

고구려 영토 표시에 있어서 또 하나 주목할 곳은 요서 지역이다. 대체로 고구려 영토를 표시한 지도에는 요서지역이 빠져있다. 일부 지도에 무려라 등 요서에 고구려 전진기지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요하를 건너 국경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특히 고구려의 것이 아니면 모두 중국의 것으로 표시하는 안일한 지도 표기가 문제가 된다. 대다수의 한국의 역사지도에는 고-수 고당 전쟁 시기 양국간 국경을 요하로 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수나라와 당나라는 요서 지역에 제대로 된 군현조차 없었다. 겨우 군사기지로 유성군 1개소에 인구 3천 남짓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를 근거로 광활한 요서 지역을 전부 수와 당의 영토로 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요서 지역은 역대로 고구려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다.

왕 명

년 대

고구려의 활동 상황

모본왕

49년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공격

태조대왕

55년

요서에 10성을 쌓음 ?

태조대왕

121년

후한 습격, 후한의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등의 군대가 동원된 것으로 볼 때 전쟁 무대는 요서 일대로 추정

미천왕

313년

모용선비의 책성 공격 (요서의 중심인 대릉하 주변)

광개토대왕

395년

거란 정벌, 부산(負山), 부산(富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름. 의무려산맥을 넘어 요서 북부로 진격한 것 ?

광개토대왕

402년

후연의 숙군성(대릉하 주변) 공격

광개토대왕

404년

후연의 연군(북경 일대 또는 대릉하 주변) 공격

광개토대왕

406년

후연의 군대가 3천리나 쫓겨 다님 (요서지역에서 전쟁 ?)

광개토대왕?

408년 이전

유주자사 진이 북경 일대 지배 ? (덕흥리 고분)

장수왕

436년

북연의 수도 화룡(조양지방)에 진격, 북연 접수, 북위군과 대치

장수왕

479년

유연과 함께 지두우 분할 (대흥안령 산맥, 요서 북부)

문자명왕

502년

북위의 변방을 습격 (북경 일대)

안장왕

520년대

유성(조양)을 공격하여 평주사마 한상을 잡아 옴

평원왕

560년대

돌궐을 격파, 거란 지배력 강화

평원왕

578년 경

북주군과 배산에서 맞서 싸움 (요서 일대 ?)

영양왕

598년

수의 영주 선제 공격, 요서와 발해만에서 수나라 해군 격파

보장왕

644년

영주 공격, 요하 서쪽 무려라에서 적과 대치

보장왕

658년

적봉진 전투(적봉 지역), 두방루의 3만 군대 당군과 전투

보장왕

659년

토호진수(서납목륜하)에서 고구려군 당나라 신문릉 군대 습격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게 요하는 내지 하천이지, 국경 하천이 아니었으며, 고구려군은 수시로 요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의 요서 지역에서의 활동은 두드러진다.

사서 명

내 용

후한서, 삼국지, 양서

사방 2천리

위서, 주서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북사

위나라 때에 비해 3배,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수서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구당서

동서 3,100리, 남북 2천리

신당서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합

통전

수나라 시기에 이르러 점점 커져 동서 6천리

역대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영토를 잠시 정리해보자.

고구려의 영토는 후기로 갈수록 넓어졌다. 특히 동서 6천리는 약 2,400km로 발해의 사방 5천리보다 더 크다는 표현이다. 북위는 고구려를 작은 술동이를 담을 거대한 술동이에 비유한 바 있다. 고구려가 북방의 강자 돌궐을 격파하고, 세계제국인 수와 당을 거듭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영토도 확대되었고 국력도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위서』<봉의전>에 따르면 봉의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거란이 고구려의 호위 하에 북위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간 일을 항의하였다고 한다. 문자명왕은 이 요구에 응하여 거란이 노략해간 재물과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낸 바가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북위는 고구려가 거란족의 상당수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거란의 종주국(宗主國)인 고구려에 항의사절을 보낸 것이다.

기존의 국사교과서 등은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라는 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통전의 기록을 적극 해석해서 고구려의 영역을 그린다면, 거란의 거주지도 포함해서 지금의 요서 북부 적봉시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까지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거란족의 경우 전체가 다 고구려에 지배된 것이 아니라, 일부는 돌궐, 일부는 수 등에 의해 분할 지배되었으므로, 이 지역은 영토보다는 강도가 약한 고구려 세력권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