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치운 2013. 10. 20. 18:24

망신살

인사신해가 해당됨. 색정으로 들킨다. 결혼식이나 음식에대한 악평도 해당됨.

양다리걸치다 기혼자에게 들키는 것이나, 도난, 사기, 실패, 실망도 해당됨.

역마+망신= 이동중에 망신당함.

겁살+망신= 손재또는 사업이 망할 수 있음. 자기 스스로 일을 만들어 문제 생김.

장생. 제왕동주 - 희신일때 권모술수, 계산빠름. 정치계윗사람,

은행계통은 금전, 서류, 철저하게 할 것

흉신 기신으로 동주- 게으른 면이 있음. 거짓말 함.

시비 송사 법정문제발생

'역학이야기 > 명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신살 역마살  (0) 2013.10.20
반안살  (0) 2013.10.20
12신살 도화살  (0) 2013.10.19
12신살 고초살(월살)  (0) 2013.10.19
12신살 겁살  (0) 2013.10.19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6:21

 

가.녹도문자(사슴발자국 문자)

1>.5900년전 배달국(밝다) 1대환웅인 거발한환웅의 신하인 신지벼슬의 혁덕이 사냥갔다가 모래밭에 찍힌 사슴발자국을 보고 글을 만들었는데 이를 녹도문자라고 부르며 녹도문자는81자의 천부경으로 기록되어 내려오고 있고 액운을 물리치는 부적의 문자로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신라 고운 최치원이 금강산 석벽에 새겨진 녹도문자를 해독하였고 가로 9자 세로 9자합하여 81자의 천부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한문

한문을 흔히 중국의 문자로 알고 있으나 이는 우리 동이족의 문자입니다.배달국 14대환웅 치우천황(자오지환웅)의 신하인 군장 창힐이 까마귀발자국을 보고 만든글이 최초의 한문이며 창힐은 동이족으로서 우리민족입니다.

다.한글 (가림토문자.혹은 가림다문자)

1>.한글은 500년전 후조선의 세종왕이 창제한것이 아니라 4300년전 쥬신국 3대 단군(환검)인 가륵단군이 9환국 3한(250여 부족국가)의 여러부족국가의 말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신하인 삼랑 벼슬의 을보륵에게 명하여 글을 만들게 명했습니다.

2>.을보륵은 환국의 천부인사상을 응용하여 "천부인"으로 글을 만들었는데" 천"은 하늘상징인 "ㅇ"에서 ㅇ.ㅎ등이....."부"는 땅의 상징인 "ㅁ"에서 ㄱ.ㄴ. ㄷ.ㄹ.ㅁ.ㅂ.ㅌ.ㅍ.ㅋ등이....."인"은 사람상징인 "ㅅ"에서 ㅅ.ㅈ.ㅊ등이.....모두 38자의 정음인 글을 만들었는데 이를 "가림토문자" 혹은 "가림다문자"라 부릅니다.

3>.한글의 원형인 가림토문자는 2050년전 인도의 "구자라트"지방으로 건너가 "구자라트문자"가 되었으며, 1250년전 일본 남부의 신대지방으로 건너가서 신대문자가 된것이며 일본 신대지방의 700년전의 각종유물에 한글원형인 가림토문자가 유물로서 전해내려오고 있고 일본은 고구려문자인 지금의 일본어와 더불어 한글원형인 신대문자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4>.500년전 후조선국의 세종왕이 고대 쥬신국의 가림토문자가 우리의 글자임을 알고서 집현전학자인 신숙주와 성삼문을 시켜 중국에 13번 답사케하여 전해오는 쥬신국의 비문을 탁본하여 가지고 오게했고 세종왕은 38자의 "가림토문자(가림다문자)"중에 10자를 삭제하고 28자만을 골라 훈민정음이라고 발표한것이 한글창제의 진실이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짤막하게 한글은 고대 쥬신국의 글을 따온것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5>.후조선국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세조부터 3대왕에 이르기까지 한글창제의 진실을 은폐하고 세종왕의 업적으로 만들기위해 "고조선비사"."대변설". "조대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징기"."통천록"등의 상고사를 읽지못하도록 상고사를 수거하여 불사르고 이를 어기면 역모의 죄로 다스렸는데 이를 후조선의 금서라고 부릅니다.

가.최만리의 상소문: 세종때 부제학 벼슬을 지낸 학자

崔萬理等諺文創制反對上文 (世宗實錄券一百三十九張)(최만리등 언문창제 반대상소문 (세종실록 권일백삼 십구장))

1.세종 26년 2월20일에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집현전의 일부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기 위하여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의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서신등(臣等)이 엎드려 언문의 제작을 살피옵건데, 지극히 신묘(神妙)하와 창물운지(創物運智)가 멀리 천고에 뛰어나나, 신등의 구구(區區)한 관견(管見)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바가 있사옴으로, 감히 위간(危懇)을 베풀고 삼가 뒤에 조목(條目)을 드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는 바, 거룩한 재결(裁決)을 바라는 바입니다.

2.감히 말하기를 "언문은 본디 다 옛글자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글자의 형태는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였다지만,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바가 없습니다.(세종실록 권 103 26년(1444)2월 庚子)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

3.이 반대 상소에 가담한 대표적인 학자는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며 당시 집현전을 대표하던 쟁쟁한 학자들로 당대의 학풍을 주름잡던 학자들이다.이처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들도 집현전 학자요, 반대한 사람들도 집현전학자들로서 최만리등을 포함한 집현전학자들의 주장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한글의 자모는 모두 다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세종대왕이 모방하면서 "글자를 변경시켰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최만리등을 포함한 집현전학자들은 이와같은 상소문 때문에 옥에 갇혔다

4.더욱이 <세종실록> 25년 조에는 최만리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또 있는데 한글 28자는 옛 "전자(篆字)"를 본받았다는 기록이었다.

5.한글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문헌은 조선 성종 때 성현이 지은<용재총화>의 한 구절이었다. 즉, 한글의 자모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빌려왔다는 내용이었다.

 6.훈민정음해례본

ㄱ).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ㄴ).이 책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가 집필한 것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세종이 지은 것으로 책의 본문에 해당된다. 제 2부는 세종의 명령에 따라 젊은 학자들이 지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하였고.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나.인도의 구자라트문자

1).인도의 서북부 수라스트란 반도에 위치한 구자랏주 바도다라시를 살펴보면 시가지의 간판은 모두 한글이며 70%이상이 현재의 한글과 똑같다인도에선 이를 산스크리트문자 또는 구자라트문자라고 부르며2500년전 아쇼카대왕이전부터 있던글자이며 훗날 아쇼카대왕때 가장많이 쓰였던글자로 기록하고 있다

2). 2500년전에 한글 가림토문자가 전파된후 본격적으로 2050년경부터 사용한것으로 확인)산스크리트문자 또는 구자라트문자는 글자꼴과 음운까지도 한글과 똑같다.

다.서불문자: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

지정일자 : 1974.02.16위치 : 상주면 양아마을규모 : 가로 7m, 세로 4m, 자연암 위에 음각1.경남(慶南) 남해군(南海郡) 상주면(尙州面) 상주리(尙州里) 즉, 남해도(南海島) 상주해수욕장(尙州海水浴場)이 내려다 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 암각(岩刻)에 대한 기록(記錄)은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벽(岩壁)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2."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文獻)에서 보이고 있다.

3.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編纂)한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彫刻)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한다.추사 김정희가 이 글씨의 뜻을 알 길이 없어 중국의 유명한 학자에게 탁본을 보냈는데 글자의 형태는 진나라 소전 이전의 글씨처럼 보이나 도무지 그 뜻을 알길이 없다.

4.조선(朝鮮)시대의 모든 비석(碑石)의 글을 종합(綜合)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 朝鮮總督府發刊)에도 이 암각(岩刻)은 고문자(古文字)의 하나로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뜻을 지닌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생각하였다.

5.19세기 학자(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初期)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 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

6. 여기 남해도(南海島)에 있는 암각(岩刻)은 형태(形態)가 섞여져 있으며, 그렇지만 각각의 형태들이 모두 균일(均一)한 선()으로 이루어져 적당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에, 최소한 상형(象形)의 전문(篆文)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대마문자(對馬文字)나 도목문자(桃木文字)와 같은 계열(系列)의 전문(篆文)이면서, 암각의 위치와 상태로 보아, 기도(祈禱)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부적(符籍)과 비슷한 성격(性格)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7.여하튼 이 암각(岩刻)은 아직까지 어떠한 의미로 된 내용(內容)인지 분명하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상황이며, 왼쪽 아래에 보이는 '천()' 자()는 후대(後代)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산 건너편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남해도(南海島)의 서리곶, 거제도(巨濟島)의 갈곶절벽, 제주도(濟州道)의 정방폭포 밑에도 있다고 전해지며 남해도(南海島)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바위의 거북등 모양들은 태양(太陽)의 상징(象徵)을 새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라.기록(記錄)으로 알 수 있는 고대(古代) 글자

1.신시(神市)시대에는 산목(算木) 또는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서(鹿書), 자부(紫府)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 등이 상고시대(上古時代) 신지(神誌)들의 업적(業績)이었으며, 복희(伏羲)의 용서(龍書)와 단군(檀君)시대에 삼랑을(三郞乙) 보륵(普勒)이 만든 가림토(加臨土 또는 加臨多)의 신전(神篆)들이 백산(白山), 흑수(黑水), 청구(靑邱), 구려(九黎)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부여(夫餘)에서는 서산(書算)이나 부여인(夫餘人 또는 漢水人이라고도 함) 왕문(王文)이 전문(篆文)을 축약(縮約)한 부예(符隸 또는 吏讀文)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2.발해(渤海)에서는 현재 러시아어(russian)와 비슷하게 타지역(他地域) 글자를 뒤집어 사용하는 독특(獨特)한 반자(反字)를 고집(固執)하였다. 그리고 왜()와 진()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횡서(橫書), 결승(結繩), 계목('+')을 혼용(混用)하였으며, 고려(高麗高句麗)는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고 한다. 진(, chhin, B.C. 221~B.C. 207)나라 때의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게 사신(使臣)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 chin, A.D. 265~420)나라 때의 왕문(王文)의 후손(後孫)인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다.

3.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漢字, chinese)가 원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한글(korean)을 비롯한 일본어(japanese) 또한 이렇게 과거부터 계승(繼承)된 언어(言語)를 각자 개발(開發)시킨 것이다열거(列擧)한 글자들 가운데,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古代文字)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녹도문자) 흔적(痕迹)이 아닐까 생각된다.

4.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初期) 마야에서는 작대기(_)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숫자를 계산할 때,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후기에는 그림이 보다 화려해지고 작대기와 점이 옆으로 세워지지만, 그 원래의 기본적인 방법에는 변함이 없다.

5.그리고 우서(雨書)는 작대기만으로 이루어진 'ㄱ'자형(字形)으로 여겨지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소개된 유기(留記)에서는 이 자형(字形)을 태백산(太白山)의 푸른 바위 절벽(絶壁)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은 지금의 초서(草書)와 비슷한 형태로 종이로 만든 쪽의 일종이라고 하며, 용서(龍書)는 복희(伏羲)의 64괘()에서 볼 수 있는 역문자(易文字)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여기서도 효()를 구성할 때,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가림토(加臨土) 신전(神篆)은 지금까지의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방법을 추려서 만들었으며, 한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6.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이두문(吏讀文)으로서, 진() 나라에서부터 정립(定立)되기 시작한 지금의 한자(漢字)에 상당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한편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발견된 20여가지의 고대문자(古代文字)들이 이와 비슷하거나 해당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마문자(對馬文字)와 도목문자(桃木文字)는 여기 남해도(南海島)에서 발견된 모양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주로 나뭇가지나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해안(南海岸) 일대의 해양족(海洋族)이 사용하였던 글자로 알려져 있다.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6:03

 

세계 최초의 문자,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 

 

최근 수많은 유물의 발굴을 통해 옛 동이족의 강역에서 중국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선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파장이 국내에서는 아직 크지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설형문자가 사용된 것처럼 선진 문명의 척도라 볼 수 있는 고유문자를 사용한 증거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민족의 경우 문자다운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다가 삼국시대에 한자가 겨우 도입되었으므로 우리의 첫 번째 국가라고 설명되는 고조선을 문명화된 국가로 볼 수 없다고 단언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는 설사 일부 청동기 문화가 중국보다 다소 앞섰다 하더라도 문자가 없는 한 진정한 문명세계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근래 이런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놀라운 주장을 저자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한민족은 세계 최초의 문자인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를 발명했고,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는 아시아 전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한 중국이 자랑하는 한자 역시 녹도 문자에서 발전한 것으로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우리는 흔히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에는 한글 이전에 다른 글자가 있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세종 25년 개해 12년, 훈민정음창제 첫 발표문을 보면, “이달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 자를 만드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세종 28년, 9월 정인지가 쓴 해례 서에는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篆字)를 본떠서…”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집현전을 대표하던 학자로서 한글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 등이 올린 상소문에도 나온다.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더라도…”  저자는 한글창제 당시의 이러한 기록에서 한글 이전에 문자가 있었고 세종대왕은 한글을 재창조한 것임에 착안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글 이전의 문자를 『환단고기』와 『단기고사』를 통해 찾게 된다. 『환단고기』「단군세기」를 보면 단군3세 가륵임금 때인 B.C. 2181년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단기고사』에는 단군조선 개국 초기에 만들어진 가림토 문자가 그 후 어떻게 발전하면서 문명의 역사를 열어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가림토와 한글의 글자모양을 비교해보면 그 연관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가림토와 한글은 태극에서 파생된 문자이고 음양오행의 원리가 집약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저자는 한국, 일본, 인도, 몽고, 중국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가림토를 비교하면서 단군조선이 통치하던 광대한 영토를 확인하게 된다.  일본의 신대문자는 가림토 문자의 모음 중 5자, 자음 27자 중 6자를 쓰고 있으며, 인도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고 있는 문자는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같은 것을 밝히고 있다. 즉, 알타이어의 사용범위가 터키, 몽고, 티베트, 만주 퉁구스어, 한국어, 일본어 등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볼 때 그 문자의 원형이 가림토 문자였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한글과 한자의 뿌리 저자는 가림토 문자를 만들도록 명하신 제3대 가륵단군의 가림토 문자 창제배경에서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 해도…” 라는 기록에 의문을 품고 다시 세계 최초의 문자인 녹도문자에 접근한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중 소도경전 본훈 제 5편의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BCE 3898년)께서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백일사」 <신시본기>를 보면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는데 신지가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발명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저자는 녹도문자는 배달국시대 이후 계속 사용해 온 것이 분명하며 단군조선 때까지 진서라는 이름으로 널리 쓰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문자가 어렵고 말이 통하지 않아 BCE 2181년 제3대 가륵 단군 때 하늘 소리글자인 가림토 문자를 새로이 창제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자는 동이족이 발명한 가림토 문자와 녹도 문자 등이 중국 대륙에서 널리 사용 발전해 온 것을 한(漢)나라가 자기의 글과 글자로 삼았다는 의미에서 한문(漢文) 또는 한자라고 하는 것이다. 설문해자 및 갑골문에 남아 있는 글자는 중국에서 가림토 문자와 녹도문자가 함께 사용되었다는 증거이고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기록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다.  정리하면, 한문은 녹도 문자가 뿌리가 되어 탄생한 문자이며, 한글은 가림토 문자가 원형이 된 것이다. 한문은 세상 만물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뜻글자니 음이요, 한글은 하늘의 소리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니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장차 세계에서 배워갈 우리의 말과 글 한글과 한자 이전, 우리 민족은 세계 최초의 문자인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의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은 신라시대(진덕왕 3년)이후로 자기 문자를 빼앗기고 한자만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음양의 조화가 완전히 깨져 문자체계가 무너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과 우리 것이 뒤죽박죽되면서 모화사상이 생겨났고 한국인의 가치관과 뿌리는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문화나 현상에 대해 중국에서 그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사람이 생겨났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찾는 것은 너무도 중차대한 일이다.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면 미래도 잃게 된다.  지금은 천지가 가을 운수로 들어가고 모든 것이 근본으로 들어가는 때이다(原始返本). 상제님께서는 “장차 우리나라 말과 글을 세계 사람이 배워 가리라.”(道典 5:11:3)고 하셨다. 세계 최초의 문자를 만든 한민족, 이제 머지 않아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이 세계인의 언어가 될 것이다. 한국에 태어나 한국말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의 우수성과 또한 여러 언어의 효시이며, 문명발전의 초석이 된 뿌리 한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5:54

 

국어의 자음 체계는, 특히 파열음 계열에서 영어, 독어, 불어 등과 같은 인도 유럽 계통의 언어가 이중 체계(二重體系)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삼중 체계(三重體系)로 되어 있다. 단모음의 수도 10개나 될 정도로 많다. 또, 국어 음운 구조의 특질로는 두음 법칙(頭音法則), 음절 끝소리 규칙, 모음 조화(母音調和), 동화 작용(同化作用) 등을 들 수가 있다.

두음 법칙이란, 첫소리에 둘 이상의 자음이나 유음 ㉠‘ㄹ’과 ‘ㄴ’음, ‘냐, 녀, 뇨, 뉴, 니’ 등의 소리가 오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두음 법칙은 알타이 어의 공통 특질의 하나로 꼽힌다. 이 중에서 중자음 ‘__[時], __[隙], __[米], __[女兒]’ 등은 중세 국어에서는 사용되기도 했지만, 임진란을 전후하여 모두 단자음으로 바뀌어 지금은 사라졌다. 따라서, 외국어에서는 ‘student, sketch, spring’ 등과 같이 여러 개의 자음이 첫소리에 올 수 있지만, 국어에서는 두세 음절로 나누어 발음하고 표기한다.

중세 국어에서는 ‘러울, 라귀, 락시’ 등과 같이 /ㄹ/ 소리도 첫소리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다. 현대 국어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본래 어두에 /ㄹ/음을 가졌던 한자로 ‘라, 로, 루’ 등은 /나, 노, 누/로, /랴, 려, 료, 류, 리/ 등은 /야, 여, 요, 유, 이/로 바꾸어 발음한다. 구개음화된 /ㄴ/, 즉 /냐, 녀, 뇨, 뉴, 니/ 등이 어두에 쓰이지 않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음절 끝소리 규칙이란, 자음이 음절 끝에 올 때에 터지지 아니하고 닫힌 상태로 발음되는 현상을 이른다. 따라서, 이들 끝소리는 단독으로 발음되거나 자음과 연결될 때, 또는 모음으로 시작되더라도 실질 형태소가 뒤따를 때에는 제 음가(音價)대로 발음되지 아니하고 대표음으로 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ㄳ, ㅄ, ㄺ’ 등과 같은 두 개의 자음이 음절 끝에 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넋, 값과, 흙 위’가 ‘넉, 갑과, 흑 위(→[흐귀])’로 발음되는 것이 그것이다.

모음 조화도 알타이 어의 공통 특질 중의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다. 국어에서 모음 조화란, 알기 쉽게 말하면 양성 모음은 양성 모음끼리, 음성 모음은 음성 모음끼리 결합하려는 현상이다. 이것은 발음하는 위치가 비슷한 모음끼리 결합시킴으로써 발음을 쉽게 하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음 조화는 15세기에는 엄격하게 지켜졌으나, 그 뒤 차차 약화되어 왔다. 현대어에서는 의성어, 의태어나 어간과 어미의 연결 구조 등에 남아 있을 뿐이다.

동화 작용에는 모음 동화와 자음 동화가 있다. 모음 동화는 흔히 ‘ㅣ’ 모음 동화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살리어→살리여’나 ‘손잡이→손잽이’와 같이 ‘ㅣ’ 모음의 앞 뒤의 모음이 ‘ㅣ’ 모음을 닮아 ‘ㅣ’ 모음과 비슷한 정설 모음(前舌)으로 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자음 동화에는 비음화(鼻音化)와 설측음화(舌側音化)가 있다. 비음화는 비음이 아닌 소리가 비음에 동화되어 같은 비음으로 변하는 것이고, 설측음화는 설측음이 아닌 말소리가 설측음을 닮아 설측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들 동화 작용은 발음의 편의를 좇아 변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ㅣ’ 모음 동화는 일반적으로 표준 발음법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음 동화는 표준 발음법으로 인정한다.

이 밖에, 국어의 음운상의 특질로는 음상(音相)의 차이로 인하여 표현 의미가 달라지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국어의 자음 중에서 파열음 계열은 삼중 체계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하였거니와, 모음 체계도 양성과 음성으로 구별되어,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음상의 차이가 어감(語感)을 다르게 만든다.

6차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상), 3. 언어와 국어 (3)국어의 특질 중에서 [되집기마당] 문장 부호 ㉠작은따옴표(‘ ’), 낫표(「 」) 가로쓰기에는 작은따옴표, 세로쓰기에는 낫표를 씁니다.

⑴ 따온 말 가운데 다시 따온 말이 들어 있을 때 씁니다. 예) “여러분! 침착해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⑵ 마음속으로 한 말을 적을 때 씁니다. 예) ‘만약 내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모두들 깜짝 놀라겠지.’ ⑶ 문장에서 중요한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드러냄표 대신 쓰기도 합니다.

예)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5:46

도화살(년살) 자,오,묘,유

1. 주색잡기에 빠짐. 술,여자로 항상 문제가 있다. 색란, 바람피움, 색정사

2. 성격이 있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함. 이성문제가 복잡함.

   자기가 꽃이라서 벌이 찾아옴(도화)

   홍염살: 자기가 이성상대를 꼬심

3. 남녀간의 성욕, 쾌락을 바탕으로 결혼생활을 하거나 애인을 만나는 경우가 많음.

  자, 오, 묘, 유가 2,3개 이상 있으면 해당됨.

  진도화: 진짜도화- 년지, 일지 기준. 품위있음

  가도화: 가짜도화- 자오묘유가 연월일시에 있을때 해당됨. 드러내고 촐싹됨.

  주색, 술과 여자로 스트레스 해소함. 애인이 많음. 여자, 남자로 망신을 당하게 됨.

  망신살에 들통남- 말을 조심 할 것. 겁살- 애로사항이 많이 생김

4. 성격에 다소 음란, 음치, 성욕이 강함. 주색을 즐기기는 하나, 단 식,상이 공망이면서 도화살이면

   주색을 좋아하나 성욕은 약하다(조루증)

5. 학창시절에 이성으로 인해서 학문을 중단하게됨. 특히 월지 도화가 있는데, 대운, 해운에 서 도화가

   들어올 때 학업중단. cf. 재성도 학마운이다.

   계수 일간이 정해가 되면 공돈이 들어 올 일로 공부가 안됨. 돈쓰고 공부하라.

   월지도화- 고등학교에서 대학3년 사이에 휴학하게 됨(건강문제, 생각문제)

   남자 사주에 시간에 정재가 있어면 이혼도장 안 찍어주면서 별거하고 있음.

'역학이야기 > 명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안살  (0) 2013.10.20
12신살 망신살  (0) 2013.10.20
12신살 고초살(월살)  (0) 2013.10.19
12신살 겁살  (0) 2013.10.19
지지의 삼합  (0) 2013.10.19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5:41

고초살(월살) 사주의 진술축미에 해당

화개를 충하는 글자임. 개종(종교를 바꿈)하게 됨. 뼈마디까지 파고드는 악살이다.

살이 잘 안찜. 만물이 고갈되고 싹이 트지 않음. 씨가 마름. 용두사미

고초일에 씨를 뿌리면 씨가 발아 안됨.

동물교배가 안됨. 고초일 결혼하면 자식이 1년안에 안 생김. 생기더라도 잔병치레아이 이거나 평생토록

신체가 약함(난쟁이, 장애등급) 파종, 교미, 부화, 성교가 안 됨.

병점: 기능마비, 소아마비 등이 발생함. 원인모르는 병(신들리는 병)

대운, 해운, 사주에 고초살일 때

사업부진, 매출 줄어듬. 고초년: 장사가 잘 안 됨 자금이 고갈됨.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음. 종교상 분쟁

을 일으킬 수 있음. 새로운 학문을 냄.

'역학이야기 > 명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신살 망신살  (0) 2013.10.20
12신살 도화살  (0) 2013.10.19
12신살 겁살  (0) 2013.10.19
지지의 삼합  (0) 2013.10.19
지지의 합 (육합)  (0) 2013.10.18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5:39

 

겁살: 내가 외부로 강탈또는 방해 받는일. 손재운 돈, 건강, 목숨을 가져감.

     1. 겁살이 오면 내가 부도나거나, 강제차압, 겁탈, 철거 재물을 빼앗기는 형태

         겁살 연월일운에 일하면 월급을 똑바로 못 받음. 해운에서 겁살 체크할 것.

    2. 노력하는 것에 비해 결과가 작음.

    3.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거나 관재구설에 말려드는 경우가 많음.

    4. 집,토지,부동산을 강제압류, 차압당함 스토커 당하기도 함.

    5. 태어난 년지에 겁살이 있으면 가문을 잇기 어려움. 윗대 조상의 영광을

       잇지 못하고 어려서 객지 생활을 하거나 초년에 많은 고생함.

    6. 월지겁살이 있으면 부모,형제, 자매 인연이 약함. 형제가 트러블이 있음.

       양자로 갈 수도 있음. 할머니 손에 키워짐.

    7. 일지에 겁살이 있으면 부부금슬이 안 좋음. 배우자가 질병이 있을 수

       있거나 이혼 할 수도 있음.

    8. 시지에 겁살이 있으면 병든 자식이 생길 수 있음. 그 자식으로 신경씀.

       사고사로 죽을 수 있음.

     9. 천을귀인 겁살이거나 천,월덕귀인과 같이 있으면 꾀돌이 임.

        머리가 좋으므로 디자인 설계등 아이디어 제공

   10. 겁살이 편관과 동주되거나 편관운이 들어오면 뜻밖의 사고를 당함

        겁살이 많으면 성격이 과격 함.

'역학이야기 > 명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신살 도화살  (0) 2013.10.19
12신살 고초살(월살)  (0) 2013.10.19
지지의 삼합  (0) 2013.10.19
지지의 합 (육합)  (0) 2013.10.18
천간의 합 (간합)  (0) 2013.10.17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5:32

 

◉ 지지의 삼합

삼합(三合)이란 3개의 지지가 합을 이룬다 해서 명칭함인데 육합이 좋아하

는 친구끼리의 합이라면 삼합은 사상(思想)이 같은 사람끼리의 단합(團合)

또는 물질에 비유하면 동질의 화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삼합된 오행의

힘은 뭉친 힘이 되어 매우 강하여 천간의 합보다 형이 더욱 강력하다. 삼합

은 신살적인 작용은 아니하고 오직 오행상의 작용을 하게 되므로 이에 대해

서는 “용신”항목에서 다루기로 한다.

* 寅午戌 = 火局 : 불바다

* 巳酉丑 = 金局 : 칼, 싸움터

* 申子辰 = 水局 : 큰물, 바다

* 亥卯未 = 木局 : 밀림

◉ 방합(方位合): 합 중에서 제일 강하다.

지지는 세 개씩 모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형성하는데, 자기 계절의 지지

가 다 모이면 방향의 국(국)을 이룬다하여 방국(방국)이라고 한다.

* 寅卯辰 = 東方 木局

* 巳午未 = 南方 火局

* 申酉術 = 西方 金國

* 亥子丑 = 北方 水局

방합은 삼합보다 역량이 크고 삼합은 육합보다 역량이 크다.

예를 들어 해자축이 방합인데 해자축이 다 있으면 전방(前方)이라하고, 해자축 가운데 그 하나가 없어 해축, 해자, 자축 이렇게 두 개의 지(支)만 있으

면 반방(半方)이라 한다. 반방을 이루어도 오행은 역시 방합한 오행으로 화하나 전방보다 힘이 못한것 뿐이다.

'역학이야기 > 명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신살 고초살(월살)  (0) 2013.10.19
12신살 겁살  (0) 2013.10.19
지지의 합 (육합)  (0) 2013.10.18
천간의 합 (간합)  (0) 2013.10.17
대운  (0) 2013.10.17
posted by 치운 2013. 10. 18. 11:34

기문둔갑의 전맥자인 이기목옹. 
입춘절을 맞아 바야흐로 2003년 계미년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 2월7일 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어느 허름한 건물의 2층 모임터. ‘청구학당’이라는 간판이 보일 듯 말 듯 걸려 있는 이곳에서 ‘기문둔갑(奇門遁甲)’으로 2003년의 세계운과 우리 국운을 알아보는 행사가 열렸다. 기문둔갑의 스승과 소수의 제자들 사이에서만 매해 입춘절에 은밀히 행해지던 행사로,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스승인 수봉(粹峯) 이기목옹(73)이 “계미년의 연사(年事)와 국운을 풀어보겠다”고 말하자 제자들은 자세를 바로잡고 스승의 입을 주시했다. 미국의 대(對)이라크 전쟁과 북한 핵문제로 전 세계가 들썩거리는 비상시국인지라 실내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먼저 천하국(天下局; 세계 전체의 운)을 살펴보면 천자국(天子國)인 미국이 자리한 중궁(中宮)에 ‘서방의 금(金; 유럽을 가리킴)’들이 세력을 다투고 있는 형상이다. 이는 유럽 제국이 같은 서방인 미국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미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이끌어 나가려는 기운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북 간방에 자리잡은 한국은 상하가 충(沖)하는 궁에 있으니 남북 모두 좌불안석의 형상이라….”

제자들은 약간 뜨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역대 기문둔갑에서는 천하국을 풀이할 때 중궁의 천자국으로는 항상 중국을 꼽아왔기 때문. 스승은 잠시 풀이를 멈추고 제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미국이 재채기만 해도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독감에 걸리는 세상이 됐으므로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중궁의 천자국을 미국으로 바로잡음을 기문둔갑의 34대 방주의 자격으로 발표한다.”

정치인들에겐 치정의 미학

자상한 선생님처럼 차분하게 설명하던 이옹이 ‘방주’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는 듯했다. 매의 눈처럼 형형한 안광이 돋보이는 이옹의 얼굴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방주의 위엄이 느껴졌다. 대체 기문둔갑은 무엇이며 그 방주는 어느 정도의 위치일까.

역사적으로 기문둔갑은 정치인들에게는 치정의 미학으로, 군략가에게는 용병의 무경(武經)으로 이용돼왔다. 이를테면 군주는 천문의 변화, 역모 같은 사직의 위험 여부, 국정 방향 등을 기문둔갑을 통해 점쳐왔고 전쟁시에는 병법가들이 적의 동태와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데 기문전법을 사용했던 것.

이러한 기문둔갑은 사람의 사주팔자처럼 특정한 시기를 음양오행으로 치환한 뒤 모두 9개의 궁에 각각 배속해 자신과 상대방의 운을 알아보는 방식으로 돼 있는데, 9개 궁 가운데서도 중앙인 중궁을 어떻게 보느냐가 핵심이다. 난해한 방정식을 푸는 듯한 기문둔갑의 연원은 멀리 태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역사상 우리 민족에 전해 내려온 기문둔갑의 학문적 맥은 고구려 고국천왕대의 재상 을파소(乙巴素)에서 시작됐다는 게 이옹의 설명. 을파소가 ‘청구기문좌우총방(靑邱奇門左右叢坊)’이라는 문파(門派)를 세우고 이의 부속기관으로 ‘태청궁 청구 태학당’이란 교육기관을 개설함으로써 기문둔갑의 중흥조이자 초대 도조(道祖)가 됐다는 것. 을파소는 나라의 인재들을 모아 수천년을 이어 내려온 정통 선도(仙道)인 기문둔갑을 전수했다고 한다.

을파소 이후 18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기문둔갑의 맥은 현재의 이옹에 이르기까지 모두 34대의 전맥자에 의해 이어져왔다. 아쉽게도 고구려에 연원을 둔 기문둔갑은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극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전해진 까닭에 사주추명학처럼 대중화되지 못했다.

이옹 역시 어린 시절이었던 1940년대 양산 통도사 근처 영취산에 들어가 제32대 방주인 응청진인(凝淸眞人)과 제33대 기봉(奇峯) 선사로부터 5년간 기문둔갑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스승으로부터 34대 방주로 지정돼 ‘홍연전결’이라는 기문둔갑의 요체를 담은 죽간본을 증표로 받았는데, 현재 시중에 기문둔갑서로 유포되고 있는 ‘홍연진결’과는 내용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   (계속)
 
영취산 인근에는 입구는 좁은데 안으로 들어가면 9가지 길이 난 천연동굴이 숨어 있어요. 명산이라면 이런 9지 동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문파는 그런 동굴만 찾아다녔지요. 당시 사조(응청진인)는 세수가 134세였고, 스승인 기봉 선사는 84세였어요. 저는 기문둔갑을 비롯해 선도를 익히고 있었고 제 위로 불도로 정진하던 사형과 사제도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나면서 동굴에서 헤어진 후로는 서로 소식이 끊어져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지만요.”

이 무슨 무협소설 같은 얘긴가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이옹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는 “이 세상에는 거짓말 같은 참말도 있다”면서 말문을 닫았다. 사실 이옹은 전적으로 산 공부를 해온 ‘외계인’이 아니다. 세속에서 부산대 국문학과를 나와 교사와 소설가로 활동해온 경력이 있고 지금도 틈틈이 한시를 발표하는 문학인이기도 하다.

기문둔갑의 계보는 그렇다 치고 다시 계미년의 국운 진단으로 돌아가자. 이옹은 천하국으로 세계의 대세를 살핀 뒤 본격적으로 한반도국(남·북한)을 짚어 읊어나갔다.

“지역적으로 남한의 국도인 서울이 자리한 궁에 두문(杜門) 유혼(幽魂)이 찾아오므로 앉은뱅이 용쓰듯이 뜻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는 형상이다. 간사스런 신하가 임금의 무능함을 틈타 전횡하니 세상이 어지럽겠다. 또 북한의 평양이 자리한 궁은 상극(相剋)을 일으키는 지점이라 전쟁 아니면 환란을 의미하는 무시무시한 양상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문(生門) 복덕(福德)이 찾아오므로 대외적으로 위엄을 보이면서 체제는 유지할 수 있겠다.”

이옹은 마지막으로 남한 자체의 운을 기문둔갑으로 풀어나갔다. 한반도 운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제자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이옹의 말을 들었다.

“남한은 역모·저항 등 험난한 기운”

“남한의 운은 패란격이라 할 수 있다. 역모와 위계질서 문란, 피지배계층의 저항 등 험난한 기운이 강하다. 다행히 공식적으로 올해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옮겨가므로 역모의 기운은 이것으로 해소될 수 있겠으나, 정치 지도자들이 정치적 부조리를 일으킬 경우 국민이 절대 좌시하거나 방관하지 않을 상이다. 제3세력이 나타나 어떠한 행동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남한이 싫어 떠나는 국민들도 적지 않겠다. 경제면으로는 금리나 물가가 안정되지 못하고 널뛰듯이 심하게 요동치겠다. 올 한해는 남한의 재력(財力)이 정체불명의 곳으로 흘러갈 상이니 새 정부의 대외관계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재력이 춤을 추는 때는 사업에서는 무책이 상책이다. 다만 복권이나 증권 등 횡재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할 수 있겠다….”

이옹은 그렇게 말하면서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주 민감한 몇 대목에 대해서는 기자에게 절대 기사화하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수학공식처럼 엄격한 규칙이 있어 개인의 주관이 개입할 수 없다는 기문둔갑은 예전 소수의 권력층이 누린 비기로서만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위기 관리의 학문’으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옹이 1970년대부터 서울에 올라와 학당을 열고 현재 여의도 동아문화센터에서 공개 강의를 해오고 있는 것도 기문둔갑을 ‘대중에 봉사하는 학문’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

이옹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경희대 사회교육원에서 기문둔갑을 강의하는 손혜림씨는 “기문둔갑은 기업인에게는 물가의 평단법(評斷法)으로 경기를 예측할 수 있게 하고 경영의 지침서가 되어 이익을 구할 수 있게 하며, 일반 대중들에게는 길흉화복을 추단해 생활의 반사경이 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 있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기문둔갑은 그 응용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 특징도 있다. 사주명리학보다 더 세밀하게 개인의 운세를 알아낼 수 있고, 명당을 논하는 풍수지리에도 응용할 수 있으며, 한의학의 처방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실제 이옹은 10여년 전 ‘육경정해’ ‘72혈도해’ 등 정밀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 풍수지리서를 세상에 내놓아 그간 사이비가 난무하던 풍수계를 진정시킨 일화로도 유명하다. 제자인 김정진 박사(경희대 한의대 겸임교수)는 “지금도 스승께 풍수지리를 문의하는 유명인들이 적잖은 걸로 알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이옹이 세간에 나와 3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배출한 제자들은 400여명. 자기 전공 분야에서 기문둔갑을 응용해 일가를 이룬 제자들도 적지 않다. 현재 이옹은 35대 방주로 어떤 제자를 선택할지 고민중이다.   (끝)
 

 

 

 

'역학이야기 > 기문둔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파조수가 煙波釣수歌 의 해설 1  (0) 2013.11.11
연국포례법 <煙局布例法>  (0) 2013.10.24
기문둔갑이란?|  (1) 2013.10.24
洪局數(홍국수)의 유래  (0) 2013.10.24
기문둔갑기원  (0) 2013.10.18
posted by 치운 2013. 10. 18. 11:31

세상 만물은 음양오행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없고,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없으니 기문둔갑이라고 하여 음양오행을 벗어난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의 기본적인 틀이 구궁을 위주로 하며 음양오행, 수리학, 주역, 등 여타 易術을 포괄하니 그 응용범위가 넓고 쓰임이 다양하다.
우도(右道)기문은 능히 바람을 일으키고 비도 내리며,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변화해서 짐승이나 연기로 변하는 등 신출귀몰한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제대로 이어져서 전승되어 온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명리학이 시간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寄門遁甲은 방위를 다루는 학문이라, 시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한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비해, 방위는 사람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가 있으니 명리학은 숙명론에 가깝고, 방향과 위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선택할 여지가 있으니 奇門에는 개운법, 처세술, 방액법, 戰術學 등이 있게 된다.

기문은 그 폭이 넓어 人事에도 적용하여 운명학으로도 활용하는데, 九宮과 八卦의 다양한 변화에 天時, 地宜, 人和의 天地人 三才를 더하면 당면한 일의 점사(占事)부터 평생운의 흐름까지 어디 한 곳이라도 놓치는 곳이 없다. 奇門에 통달하면 天機를 훔치고, 귀신까지 속이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奇門遁甲/주역의 점측술에서 유래한 일종의 전설적인 점측술이다. 기문둔갑이라 할 때 기(奇)란 천간 중 乙`丙`丁을 삼기(三奇)로 삼는 것을 말하고, 문(門)이란 8괘의 변화하는 모습인 개(開), 휴(休), 생(生), 상(傷),두(杜), 경(景), 사(死), 경(驚)의 8문을 가리킴으로 기문(奇門)이라 하였다.
둔갑이라 할 때의 둔(遁)은 숨는다는 뜻이며, 甲은 십천간의 처음인 甲을 홀로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점을 칠 때에 甲은 한 위치를 점하지 않고 戊, 己, 庚, 辛, 壬, 癸의 六儀를 구궁, 팔문, 팔괘, 구성에 나누어 배치시키며 天, 地, 人事의 길흉화복을 점친다.
기문둔갑은 ‘역위건착도’의 ‘태을구궁’에 그 연원이 있는데, 관련 서적으로는 ‘기문둔갑부응경’, ‘둔갑연의’, ‘기문둔갑점험’, ‘홍연진결’ 등이 있다.

 

다음은 수봉 이기목 선생의 설명이다.

奇學은 爲政者에게는 治政의 美學이요. 軍略家에게는 用兵의 武經이며 企業人에게는 經營의 指針書요.
一般 大衆에 있어서는 生活의 反射鏡이라 할 수 있겠다.  卽 天時年局으로서 天의 機微를 捕捉하여 國政의 向方을 設定할 수가 있어 爲政者에겐 政治의 美學이 될 수가 있겠고. 勝戰賦(奇門戰法)로서 戰勝의 기선을 잡을 수가 있겠기에 軍略家에겐 用兵의 武經이 될 수가 있으며 또한 物價의 評斷法으로 時勢의 高歇(고헐)을 豫測할 수가 있으니 企業人에게는 經營의 指針書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요. 年月日時에 該載定(해재정)이라 하여 人命의 富貴貧賤과 吉凶禍福을 주지케 해주므로  뭇 사람들에게는 生活의 反射鏡이 될 수가 있겠다.
 奇門이 무엇인가에 關한 解答은 어쩌면 이것으로서 족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굳이 蛇足之辯(사족지변)을 빌리자면 奇學은 後天世界의 凡諸衆生이 안고 있는 煩惱(번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마련된 延命之術(연명지술)이라 할 수 있겠다.
[先天은 無爲之道요. 後天 有爲之術이라] 하여 先天의 世界는 無爲自然의 世界로서 道德이니 規範이니 하는 一切의 人爲的 制約을 必要로 하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先天의 世界에서는 眞人과 道通君子[仙官(선관)]들만이 사는 곳이라 衆生이 사는 사바세계와는 달라서 一切의 規範이 필요치가 않지만 그러나 호랑이도 새끼를 많이 낳으면 시라소니가 나온다는 말과 같이 先天世界에서도 人口數가 점점 불어나게 되어 그때부터는 無爲自然의 道만으로는 다스려 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또 天地의 度數도 先天運에서 後天開闢運이 到來한지라 無位는 有爲로 變하고 道는 規範으로 바뀌게 되니 知人과 達人의 世界가 衆生의 世界로 轉落하게 됨에 따라 衆生의 百八煩惱(백팔번뇌)를 治癒(치유)할 方途가 없어 마침내 有爲之術(유위지술)로서 後天 延命之策(연명지책)을 마련해 주었으니 이름하여 奇門定命學이다.
일찍이 紫府眞人(자부진인)[檀君王朝(단군왕조)의 後孫(후손)] 께서는 太白仙園(태백선원)의 三淸宮(삼청궁)에다 共工(공공). 軒轅(헌원). 倉詰(창힐). 大撓(대효) 等(등)의 門徒(문도)를 모아놓고 東邦隱書(동방은서)를 傳受(전수)하니 이는 靈生五劫之宗(영생오겁지종)이요 先天未判之時(선천미판지시)부터 있어온 紫府秘文(자부비문)으로서 곧 衆生을 救濟하는 唯一한 後天 延命術인 것이다.
그후 大撓(대효)와 倉詰(창힐)에 의해 綿綿(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靑邱奇門(청구기문)의 脈은

//마침내 高句麗朝에 이르러 樂聖(낙성) 乙巴素(을파소) 仙師(선사)께서 靑邱奇門(청구기문) 左右總坊(좌우총방) 이라는 道坊을 開設하시고 또 紫府秘文(자부비문)의  내용을 演解(연해)한 洪煙正決(홍연정결)을 編纂(편찬)하시었으니 壹千八百年 靑邱歷史(청구역사)에 길이 빛나는 師門(사문)의 正典(정전)이 곧 그것이다. (시중에 홍연진결은 이의 가본이며 홍연비결도 역시 가본이다.)
軒轅(헌원)은 中國奇門(중국기문)의 創始(창시)者로서 風后(풍후). 太公(태공). 黃石公(황석공). 張子房(장자방)등의 역대 中興(중흥) 道祖(도조)들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中國奇門의 脈絡(맥락)을 있게 한 奇祖(기조)들이시다.
靑邱奇門(청구기문)은 八艮山에 뿌리를 둔 仙文化의 一脈으로서 白頭山民族 고유의 干支文化圈을 형성시킨 代表的 文化樣式인 것이며 따라서 그 創學의 動機 또한 純粹하여 어디까지나 心身修鍊에 目的이 있었던 것이다.
中國奇門(중국기문)은 그 創學的 動機가 자못 公利的이었으니 그 의도와 목적이 곧 戰爭을 수행하기 위한 方便책의 일환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로 말해서 軒轅(헌원)은 不可抗力的인 蚩尤(치우)와의 戰爭을 奇門兵法으로서 만이 勝利를 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靑邱奇門(청구기문)이든 中國奇門(중국기문)이든 間에 斯學(사학)의 궁극적인 創學目的은 上爲保國(상위보국)하고 下爲保命(하위보명)함에 있다고 하겠으므로 天時年局(천시년국)으로서 保國安民을 策하고 人事命局(인사명국)으로서는 保命(보명). 護身(호신)을 決(결)하니 이로서 斯學(사학)은 後天 延命之策으로서 國家의 危亂時(위란시)에는 保國强兵策이 되고 個人의 運路開陳을 爲해서는 避凶趨吉(피흉추길)의 護身策이 되므로 至寶的인 秘策이라 하겠다. 

 

가. 奇學의 淵源(연원)
흔히들 奇門遁甲의 淵源을 中國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이것은 우리 民族이 創出(창출)해낸 自生的文化圈(자생적문화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 自生的文化圈이란 곧 紫府秘典(자부비전)을 말하고 紫府秘典은 또한 紫府仙師(자부선사)에 의해 纂修(찬수)된 우리겨레의 精神史인 同時에 後天衆生을 爲한 方便品으로서 神策化 해낸 것이 奇門定命學이다.
또한 여기에는 左右 兩坊(양방)이 있어서 左道는 學統으로서 秘奧(비오)한 理致를 통하게 했고 右道는 肉身과 精神을 하나로 묶어 修練을 하므로 서 最高의 境地에 到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左道는 그 槪要를 大略的이나마 알고 있는 이가 많지만 右道에 關해서는 大部分 모르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 같아서 조금 說明을 하자면 右道는 步法으로 이루어 졌는데 步法은 이를 俗된 말로는 縮地法이라 하지만 바르게 표현하자면 夏禹氏의 禹步法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 옛부터 전해오는 [뉘엿 뉘엿 걸어도 황소 걸음 ]이라는 俗談이 여기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夏禹氏의 步法이 어째서 우리의 歷史的 所産(소산)이 될 수 있느냐? 라는 疑問을 제기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疑問은 우리의 上古史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바로서 조금은 부끄러운 質問이라 할 수 있겠다.
其實(기실) 支那族(지나족)들이 자기네 祖上(조상)이라 우기는 三皇(삼황) 五帝(오제)가 宗族(종족)상으로는 모두가 우리의 傍系祖上(방계조상) 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에 對한 疑問點은 자연 解消되리라 여겨진다. 그러므로 夏禹氏의 步法은 그 由來가 곧 우리의 精神文化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래서 禹步法(우보법)이 修鍊過程으로 채택이 되어 距今(거금) 二千年의 歷史를 通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 創始者(창시자)
紫府仙師께서 三淸宮(삼청궁)에다 傳授의 殿堂을 마련하시고 이에 네 사람의 弟子를 길러 내셨으니 곧 共工(공공). 大撓(대요). 軒軒(헌헌). 倉詰(창힐) 等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奇學을 가리켜 그 創始者를 말하라면 以上에서 指摘한 네 사람의 人物가운데 直接的인 傳脈者(전맥자)는 없다. 그러나 奇門(기문)은 亦是 紫府仙師 時代에 分明 創製(창제) 되었으니 盤固天皇(반고천황)이 그 嚆矢(효시)라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盤固天皇은 分明히 右道 創始의 嚆矢는 될 수 있어도 左道 創製의 紀元(기원)은 樹立(수립)하지 못했다. 盤固天皇이 桓因(환인) 天帝(천제)로부터 統治權域(통치권역)을 分轄(분할) 받고서 세 사람의 追從者와함께 六丁 六甲 神將(신장)을 거느리고 奇術(기술)을 부리면서 三危山(삼위산)으로 들어갔다. 以上은 桓檀古記(환단고기)에 收錄(수록)된 盤固天皇(반고천황)에 關한 記錄이다.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點(점)은
[ 六丁六甲을 거느리고  奇術을 부리면서 三危山으로 들어갔다.] 라고 한 記錄의 部分에 關해서다.
干支文字는 本是 祭儀文字(제의문자)로 制定된 것이다.
祭儀文字(제의문자)란?
告(고) 天祭(천제)의 儀式(의식)을 擧行(거행)할 적에 天神(천신)의 啓示를 받아 記錄하는 形而上學的인 文字(문자)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神과 人間과의 對話를 疏通 시켜주기 爲해서 만들어진 文字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六丁 六甲의 干支文字는 모두가 神將인 故로 盤固(반고)가 부렸다는 奇術은 分明히 右道의 修練에서 얻어진 高度의 遁甲術과 藏身法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또한 盤固天皇은 六丁 六甲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超人的인 靈力을 지닌 분이며. 또한 奇術이라는 말의 뜻은 곧 奇門遁甲術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右道 修練에 通達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或者는 奇術이라는 말의 뜻을 奇異한 術法쯤으로만 解釋하는 例도 있지만 그러나 奇術이 分明한 奇門遁甲術이라는 事實은 六丁 六甲 神將 이라는 말로서 充分한 뒷받침이 되리라 믿는다.  또 六丁 六甲 神將을 거느리고 奇術을 부리면서 三危山(삼위산)으로 갔다는 그 奇術은 奇門遁甲術이 아니고는 달리 解釋이 되질 않는다.

이를 더욱 確實히 證明해 줄 수가 있는 典考(전고)가 있다. 그것은 [中國人의 神話(신화)]라는 책에서 遁甲의 化身으로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은 盤固의 關한 이야기로서 그곳에서도 盤固가 遁甲의 過程을 거치는 場面을 여러 차례 볼 수가 있다.

어느 나라의 王后가 오래 동안 귓병을 알아 왔는데 마침내 하루는 귀속에서 黃金색갈의 귀여운 누에가 나왔다. 그런데 이 黃金 누에가 차차 자라나더니 급기야 黃金 강아지로 變하고 이 黃金의 강아지는 차차 자라서 敵將의 목을 따오는 큰 功을 세우고 나서 다시금 人身 犬首의 半 人間이 되는 遁甲의 過程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支那人(지나인)들이 무어라 하든 相關없이 上古時代에 우리 겨례의 傍系(방계) 祖上임에는 틀림이 없다.

左道坊(좌도방)의 創始는 三淸宮의 넷 弟子중 大撓(대요)에 依해 學統의 體系가 完成 되었고. 그 뒤 高句麗 九代 故國川王朝(고국천왕조)(在位179-197)에 宰相을 지낸 乙巴素(을파소)仙師께서 [靑邱奇門 左右 叢方] 이라는 門派를 創設하셨고 뒤이어 附設 敎育機關으로서는[太淸宮 靑邱 太學堂]을 세워 俊才를 불러모아 心身을 修練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곧 本坊의 創立 由來인 同時에 또 淵源史다. 其實 盤固天皇(반고천황)이 右道奇門의 創始者라고 는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沿革상의 記錄일 뿐이고. 斯學(사학)의 淵源史(연원사)와 連結을 지어서 얘기하기는 조금 未洽한 感이 있다. 그러므로 斯學(사학)의 淵源(연원)은 乙巴素(을파소) 仙師께서 實際로 門派를 創設하신 그 年度부터 始源으로 起算하는 것이 妥當할 것 같고 또한 本坊의 創門 年代를 記錄的으로 밝히자면 故國川王이 아직 在位中이던 時期를 遡及해서 紀元 190 年代 부터 起算을 한다면 적어도 1800년 以上의 긴긴 歷史가 곧 斯門(사문)의 淵源史(연원사)임을 알 수가 있겠다.  그러나 나라가 沒落됨에 따라 本坊의 命運도 비탈길을 걷기 始作하여 끝내는 그 本據地를 떠나서 深山窮谷 名山의 九支洞府를 찾아 轉轉하면서 綿綿若存 그 殘脈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역학이야기 > 기문둔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파조수가 煙波釣수歌 의 해설 1  (0) 2013.11.11
연국포례법 <煙局布例法>  (0) 2013.10.24
기문둔갑이란?|  (1) 2013.10.24
洪局數(홍국수)의 유래  (0) 2013.10.24
기문둔갑아시나요?|  (0) 2013.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