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3.10.22 갑골문자
  2. 2013.10.19 한민족의 문자역사
  3. 2013.10.19 세계 최초의 문자,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 
  4. 2013.10.19 알타이어족 한국어의 특징
posted by 치운 2013. 10. 22. 12:09

◑ 갑골문자

현재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한자는 실제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왕조인 은나라 말기(BC1300-BC1000)에 사용된 갑골문자이다.  은나라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정치 형태를 취하였는데 전쟁과 농업 생산, 사냥등 국가의 중요 사항은 물론 왕족의 출산, 질병, 바람, 구름 등의 자연 현상, 일기 예측에 이르기 까지 모든 행위와 현상에 대해 점(占)을 쳐서 신의 뜻을 물었다.  즉 일상의 전반적인 것을 점을 쳐서 얻은 결과에 의지하여 이를 거북의 등딱지나 뼈에 기록했는 데 이 때 사용된 문자를 갑골문자라고 한다

  <갑골문자의 발견과 연구과정>
  청나라 말기 1899년 국자감 제주(國子監 祭酒: 국립 대학 총장격)였던 왕의영(王懿榮)이 말라리아를 오래 앓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용골(龍骨)이라 부르는 땅 속에서 파낸 어떤 오래 된 동물의 뼈를 샀다.   왕의영이 이 뼈를 보다가 표면에 글자 같은 것이 새겨진 것을 보고 더 많은 용골을 사들여 고대 문자에 조예가 깊은 유악(劉顎)과 검토하여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문자임을 밝혀 냈다.
후에 나진옥(羅振玉)이 이를 대규모로 수집, 탁봉하였고, 왕국유(王國維)와 동작빈(董作賓)이라는 학자는 갑골문 자체에 대한 연구에 몰두, 문자를 해독하고 갑골문의 역사학적 가치를 입증하였다.
중화인민 공화국 수립 후 곽말약(郭末若 1892-1978)이 주도한 중국 과학원은 그 당시까지 연구된 갑골과 그 성과들을 <갑골 문합집(甲骨 文合集)>이라는 책으로 편찬하였다.

  <갑골문자의 해독과 그 이후>
  
갑골문자는 지금부터 3천년 전 이상의 시대에 쓰인 문자인데 발견 뒤 겨우 몇 십년의 연구 성과로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인명이나, 지명 등의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거의 해독되었다.  이는 세계 고대 문자 해독의 역사에서 보면 경이적인 발전이다.  갑골문자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해독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축적된 문자학적 연구 성과와 왕국유나 동작빈 등 훌륭한 학자가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연구하여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한자가 수 천년의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사용되었고 글자와 언어 체계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6:21

 

가.녹도문자(사슴발자국 문자)

1>.5900년전 배달국(밝다) 1대환웅인 거발한환웅의 신하인 신지벼슬의 혁덕이 사냥갔다가 모래밭에 찍힌 사슴발자국을 보고 글을 만들었는데 이를 녹도문자라고 부르며 녹도문자는81자의 천부경으로 기록되어 내려오고 있고 액운을 물리치는 부적의 문자로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신라 고운 최치원이 금강산 석벽에 새겨진 녹도문자를 해독하였고 가로 9자 세로 9자합하여 81자의 천부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한문

한문을 흔히 중국의 문자로 알고 있으나 이는 우리 동이족의 문자입니다.배달국 14대환웅 치우천황(자오지환웅)의 신하인 군장 창힐이 까마귀발자국을 보고 만든글이 최초의 한문이며 창힐은 동이족으로서 우리민족입니다.

다.한글 (가림토문자.혹은 가림다문자)

1>.한글은 500년전 후조선의 세종왕이 창제한것이 아니라 4300년전 쥬신국 3대 단군(환검)인 가륵단군이 9환국 3한(250여 부족국가)의 여러부족국가의 말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신하인 삼랑 벼슬의 을보륵에게 명하여 글을 만들게 명했습니다.

2>.을보륵은 환국의 천부인사상을 응용하여 "천부인"으로 글을 만들었는데" 천"은 하늘상징인 "ㅇ"에서 ㅇ.ㅎ등이....."부"는 땅의 상징인 "ㅁ"에서 ㄱ.ㄴ. ㄷ.ㄹ.ㅁ.ㅂ.ㅌ.ㅍ.ㅋ등이....."인"은 사람상징인 "ㅅ"에서 ㅅ.ㅈ.ㅊ등이.....모두 38자의 정음인 글을 만들었는데 이를 "가림토문자" 혹은 "가림다문자"라 부릅니다.

3>.한글의 원형인 가림토문자는 2050년전 인도의 "구자라트"지방으로 건너가 "구자라트문자"가 되었으며, 1250년전 일본 남부의 신대지방으로 건너가서 신대문자가 된것이며 일본 신대지방의 700년전의 각종유물에 한글원형인 가림토문자가 유물로서 전해내려오고 있고 일본은 고구려문자인 지금의 일본어와 더불어 한글원형인 신대문자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4>.500년전 후조선국의 세종왕이 고대 쥬신국의 가림토문자가 우리의 글자임을 알고서 집현전학자인 신숙주와 성삼문을 시켜 중국에 13번 답사케하여 전해오는 쥬신국의 비문을 탁본하여 가지고 오게했고 세종왕은 38자의 "가림토문자(가림다문자)"중에 10자를 삭제하고 28자만을 골라 훈민정음이라고 발표한것이 한글창제의 진실이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짤막하게 한글은 고대 쥬신국의 글을 따온것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5>.후조선국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세조부터 3대왕에 이르기까지 한글창제의 진실을 은폐하고 세종왕의 업적으로 만들기위해 "고조선비사"."대변설". "조대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징기"."통천록"등의 상고사를 읽지못하도록 상고사를 수거하여 불사르고 이를 어기면 역모의 죄로 다스렸는데 이를 후조선의 금서라고 부릅니다.

가.최만리의 상소문: 세종때 부제학 벼슬을 지낸 학자

崔萬理等諺文創制反對上文 (世宗實錄券一百三十九張)(최만리등 언문창제 반대상소문 (세종실록 권일백삼 십구장))

1.세종 26년 2월20일에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집현전의 일부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기 위하여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의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서신등(臣等)이 엎드려 언문의 제작을 살피옵건데, 지극히 신묘(神妙)하와 창물운지(創物運智)가 멀리 천고에 뛰어나나, 신등의 구구(區區)한 관견(管見)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바가 있사옴으로, 감히 위간(危懇)을 베풀고 삼가 뒤에 조목(條目)을 드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는 바, 거룩한 재결(裁決)을 바라는 바입니다.

2.감히 말하기를 "언문은 본디 다 옛글자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글자의 형태는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였다지만,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바가 없습니다.(세종실록 권 103 26년(1444)2월 庚子)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

3.이 반대 상소에 가담한 대표적인 학자는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며 당시 집현전을 대표하던 쟁쟁한 학자들로 당대의 학풍을 주름잡던 학자들이다.이처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들도 집현전 학자요, 반대한 사람들도 집현전학자들로서 최만리등을 포함한 집현전학자들의 주장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한글의 자모는 모두 다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세종대왕이 모방하면서 "글자를 변경시켰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최만리등을 포함한 집현전학자들은 이와같은 상소문 때문에 옥에 갇혔다

4.더욱이 <세종실록> 25년 조에는 최만리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또 있는데 한글 28자는 옛 "전자(篆字)"를 본받았다는 기록이었다.

5.한글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문헌은 조선 성종 때 성현이 지은<용재총화>의 한 구절이었다. 즉, 한글의 자모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빌려왔다는 내용이었다.

 6.훈민정음해례본

ㄱ).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ㄴ).이 책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가 집필한 것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세종이 지은 것으로 책의 본문에 해당된다. 제 2부는 세종의 명령에 따라 젊은 학자들이 지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하였고.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나.인도의 구자라트문자

1).인도의 서북부 수라스트란 반도에 위치한 구자랏주 바도다라시를 살펴보면 시가지의 간판은 모두 한글이며 70%이상이 현재의 한글과 똑같다인도에선 이를 산스크리트문자 또는 구자라트문자라고 부르며2500년전 아쇼카대왕이전부터 있던글자이며 훗날 아쇼카대왕때 가장많이 쓰였던글자로 기록하고 있다

2). 2500년전에 한글 가림토문자가 전파된후 본격적으로 2050년경부터 사용한것으로 확인)산스크리트문자 또는 구자라트문자는 글자꼴과 음운까지도 한글과 똑같다.

다.서불문자: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

지정일자 : 1974.02.16위치 : 상주면 양아마을규모 : 가로 7m, 세로 4m, 자연암 위에 음각1.경남(慶南) 남해군(南海郡) 상주면(尙州面) 상주리(尙州里) 즉, 남해도(南海島) 상주해수욕장(尙州海水浴場)이 내려다 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 암각(岩刻)에 대한 기록(記錄)은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벽(岩壁)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2."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文獻)에서 보이고 있다.

3.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編纂)한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彫刻)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한다.추사 김정희가 이 글씨의 뜻을 알 길이 없어 중국의 유명한 학자에게 탁본을 보냈는데 글자의 형태는 진나라 소전 이전의 글씨처럼 보이나 도무지 그 뜻을 알길이 없다.

4.조선(朝鮮)시대의 모든 비석(碑石)의 글을 종합(綜合)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 朝鮮總督府發刊)에도 이 암각(岩刻)은 고문자(古文字)의 하나로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뜻을 지닌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생각하였다.

5.19세기 학자(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初期)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 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

6. 여기 남해도(南海島)에 있는 암각(岩刻)은 형태(形態)가 섞여져 있으며, 그렇지만 각각의 형태들이 모두 균일(均一)한 선()으로 이루어져 적당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에, 최소한 상형(象形)의 전문(篆文)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대마문자(對馬文字)나 도목문자(桃木文字)와 같은 계열(系列)의 전문(篆文)이면서, 암각의 위치와 상태로 보아, 기도(祈禱)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부적(符籍)과 비슷한 성격(性格)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7.여하튼 이 암각(岩刻)은 아직까지 어떠한 의미로 된 내용(內容)인지 분명하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상황이며, 왼쪽 아래에 보이는 '천()' 자()는 후대(後代)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산 건너편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남해도(南海島)의 서리곶, 거제도(巨濟島)의 갈곶절벽, 제주도(濟州道)의 정방폭포 밑에도 있다고 전해지며 남해도(南海島)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바위의 거북등 모양들은 태양(太陽)의 상징(象徵)을 새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라.기록(記錄)으로 알 수 있는 고대(古代) 글자

1.신시(神市)시대에는 산목(算木) 또는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서(鹿書), 자부(紫府)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 등이 상고시대(上古時代) 신지(神誌)들의 업적(業績)이었으며, 복희(伏羲)의 용서(龍書)와 단군(檀君)시대에 삼랑을(三郞乙) 보륵(普勒)이 만든 가림토(加臨土 또는 加臨多)의 신전(神篆)들이 백산(白山), 흑수(黑水), 청구(靑邱), 구려(九黎)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부여(夫餘)에서는 서산(書算)이나 부여인(夫餘人 또는 漢水人이라고도 함) 왕문(王文)이 전문(篆文)을 축약(縮約)한 부예(符隸 또는 吏讀文)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2.발해(渤海)에서는 현재 러시아어(russian)와 비슷하게 타지역(他地域) 글자를 뒤집어 사용하는 독특(獨特)한 반자(反字)를 고집(固執)하였다. 그리고 왜()와 진()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횡서(橫書), 결승(結繩), 계목('+')을 혼용(混用)하였으며, 고려(高麗高句麗)는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고 한다. 진(, chhin, B.C. 221~B.C. 207)나라 때의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게 사신(使臣)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 chin, A.D. 265~420)나라 때의 왕문(王文)의 후손(後孫)인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다.

3.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漢字, chinese)가 원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한글(korean)을 비롯한 일본어(japanese) 또한 이렇게 과거부터 계승(繼承)된 언어(言語)를 각자 개발(開發)시킨 것이다열거(列擧)한 글자들 가운데,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古代文字)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녹도문자) 흔적(痕迹)이 아닐까 생각된다.

4.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初期) 마야에서는 작대기(_)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숫자를 계산할 때,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후기에는 그림이 보다 화려해지고 작대기와 점이 옆으로 세워지지만, 그 원래의 기본적인 방법에는 변함이 없다.

5.그리고 우서(雨書)는 작대기만으로 이루어진 'ㄱ'자형(字形)으로 여겨지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소개된 유기(留記)에서는 이 자형(字形)을 태백산(太白山)의 푸른 바위 절벽(絶壁)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은 지금의 초서(草書)와 비슷한 형태로 종이로 만든 쪽의 일종이라고 하며, 용서(龍書)는 복희(伏羲)의 64괘()에서 볼 수 있는 역문자(易文字)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여기서도 효()를 구성할 때,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가림토(加臨土) 신전(神篆)은 지금까지의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방법을 추려서 만들었으며, 한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6.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이두문(吏讀文)으로서, 진() 나라에서부터 정립(定立)되기 시작한 지금의 한자(漢字)에 상당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한편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발견된 20여가지의 고대문자(古代文字)들이 이와 비슷하거나 해당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마문자(對馬文字)와 도목문자(桃木文字)는 여기 남해도(南海島)에서 발견된 모양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주로 나뭇가지나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해안(南海岸) 일대의 해양족(海洋族)이 사용하였던 글자로 알려져 있다.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6:03

 

세계 최초의 문자,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 

 

최근 수많은 유물의 발굴을 통해 옛 동이족의 강역에서 중국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선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파장이 국내에서는 아직 크지 않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설형문자가 사용된 것처럼 선진 문명의 척도라 볼 수 있는 고유문자를 사용한 증거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민족의 경우 문자다운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다가 삼국시대에 한자가 겨우 도입되었으므로 우리의 첫 번째 국가라고 설명되는 고조선을 문명화된 국가로 볼 수 없다고 단언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는 설사 일부 청동기 문화가 중국보다 다소 앞섰다 하더라도 문자가 없는 한 진정한 문명세계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근래 이런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놀라운 주장을 저자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한민족은 세계 최초의 문자인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를 발명했고,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는 아시아 전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또한 중국이 자랑하는 한자 역시 녹도 문자에서 발전한 것으로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우리는 흔히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에는 한글 이전에 다른 글자가 있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세종 25년 개해 12년, 훈민정음창제 첫 발표문을 보면, “이달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 자를 만드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세종 28년, 9월 정인지가 쓴 해례 서에는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는 옛날의 전자(篆字)를 본떠서…”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집현전을 대표하던 학자로서 한글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 등이 올린 상소문에도 나온다.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더라도…”  저자는 한글창제 당시의 이러한 기록에서 한글 이전에 문자가 있었고 세종대왕은 한글을 재창조한 것임에 착안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글 이전의 문자를 『환단고기』와 『단기고사』를 통해 찾게 된다. 『환단고기』「단군세기」를 보면 단군3세 가륵임금 때인 B.C. 2181년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단기고사』에는 단군조선 개국 초기에 만들어진 가림토 문자가 그 후 어떻게 발전하면서 문명의 역사를 열어갔는지 보여주고 있다.  가림토와 한글의 글자모양을 비교해보면 그 연관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가림토와 한글은 태극에서 파생된 문자이고 음양오행의 원리가 집약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저자는 한국, 일본, 인도, 몽고, 중국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가림토를 비교하면서 단군조선이 통치하던 광대한 영토를 확인하게 된다.  일본의 신대문자는 가림토 문자의 모음 중 5자, 자음 27자 중 6자를 쓰고 있으며, 인도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고 있는 문자는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같은 것을 밝히고 있다. 즉, 알타이어의 사용범위가 터키, 몽고, 티베트, 만주 퉁구스어, 한국어, 일본어 등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볼 때 그 문자의 원형이 가림토 문자였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한글과 한자의 뿌리 저자는 가림토 문자를 만들도록 명하신 제3대 가륵단군의 가림토 문자 창제배경에서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 해도…” 라는 기록에 의문을 품고 다시 세계 최초의 문자인 녹도문자에 접근한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중 소도경전 본훈 제 5편의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BCE 3898년)께서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백일사」 <신시본기>를 보면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는데 신지가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발명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저자는 녹도문자는 배달국시대 이후 계속 사용해 온 것이 분명하며 단군조선 때까지 진서라는 이름으로 널리 쓰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문자가 어렵고 말이 통하지 않아 BCE 2181년 제3대 가륵 단군 때 하늘 소리글자인 가림토 문자를 새로이 창제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자는 동이족이 발명한 가림토 문자와 녹도 문자 등이 중국 대륙에서 널리 사용 발전해 온 것을 한(漢)나라가 자기의 글과 글자로 삼았다는 의미에서 한문(漢文) 또는 한자라고 하는 것이다. 설문해자 및 갑골문에 남아 있는 글자는 중국에서 가림토 문자와 녹도문자가 함께 사용되었다는 증거이고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기록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다.  정리하면, 한문은 녹도 문자가 뿌리가 되어 탄생한 문자이며, 한글은 가림토 문자가 원형이 된 것이다. 한문은 세상 만물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뜻글자니 음이요, 한글은 하늘의 소리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니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장차 세계에서 배워갈 우리의 말과 글 한글과 한자 이전, 우리 민족은 세계 최초의 문자인 녹도 문자와 가림토 문자의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은 신라시대(진덕왕 3년)이후로 자기 문자를 빼앗기고 한자만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음양의 조화가 완전히 깨져 문자체계가 무너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과 우리 것이 뒤죽박죽되면서 모화사상이 생겨났고 한국인의 가치관과 뿌리는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문화나 현상에 대해 중국에서 그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사람이 생겨났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찾는 것은 너무도 중차대한 일이다.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면 미래도 잃게 된다.  지금은 천지가 가을 운수로 들어가고 모든 것이 근본으로 들어가는 때이다(原始返本). 상제님께서는 “장차 우리나라 말과 글을 세계 사람이 배워 가리라.”(道典 5:11:3)고 하셨다. 세계 최초의 문자를 만든 한민족, 이제 머지 않아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이 세계인의 언어가 될 것이다. 한국에 태어나 한국말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의 우수성과 또한 여러 언어의 효시이며, 문명발전의 초석이 된 뿌리 한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posted by 치운 2013. 10. 19. 15:54

 

국어의 자음 체계는, 특히 파열음 계열에서 영어, 독어, 불어 등과 같은 인도 유럽 계통의 언어가 이중 체계(二重體系)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삼중 체계(三重體系)로 되어 있다. 단모음의 수도 10개나 될 정도로 많다. 또, 국어 음운 구조의 특질로는 두음 법칙(頭音法則), 음절 끝소리 규칙, 모음 조화(母音調和), 동화 작용(同化作用) 등을 들 수가 있다.

두음 법칙이란, 첫소리에 둘 이상의 자음이나 유음 ㉠‘ㄹ’과 ‘ㄴ’음, ‘냐, 녀, 뇨, 뉴, 니’ 등의 소리가 오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두음 법칙은 알타이 어의 공통 특질의 하나로 꼽힌다. 이 중에서 중자음 ‘__[時], __[隙], __[米], __[女兒]’ 등은 중세 국어에서는 사용되기도 했지만, 임진란을 전후하여 모두 단자음으로 바뀌어 지금은 사라졌다. 따라서, 외국어에서는 ‘student, sketch, spring’ 등과 같이 여러 개의 자음이 첫소리에 올 수 있지만, 국어에서는 두세 음절로 나누어 발음하고 표기한다.

중세 국어에서는 ‘러울, 라귀, 락시’ 등과 같이 /ㄹ/ 소리도 첫소리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다. 현대 국어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본래 어두에 /ㄹ/음을 가졌던 한자로 ‘라, 로, 루’ 등은 /나, 노, 누/로, /랴, 려, 료, 류, 리/ 등은 /야, 여, 요, 유, 이/로 바꾸어 발음한다. 구개음화된 /ㄴ/, 즉 /냐, 녀, 뇨, 뉴, 니/ 등이 어두에 쓰이지 않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음절 끝소리 규칙이란, 자음이 음절 끝에 올 때에 터지지 아니하고 닫힌 상태로 발음되는 현상을 이른다. 따라서, 이들 끝소리는 단독으로 발음되거나 자음과 연결될 때, 또는 모음으로 시작되더라도 실질 형태소가 뒤따를 때에는 제 음가(音價)대로 발음되지 아니하고 대표음으로 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ㄳ, ㅄ, ㄺ’ 등과 같은 두 개의 자음이 음절 끝에 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넋, 값과, 흙 위’가 ‘넉, 갑과, 흑 위(→[흐귀])’로 발음되는 것이 그것이다.

모음 조화도 알타이 어의 공통 특질 중의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다. 국어에서 모음 조화란, 알기 쉽게 말하면 양성 모음은 양성 모음끼리, 음성 모음은 음성 모음끼리 결합하려는 현상이다. 이것은 발음하는 위치가 비슷한 모음끼리 결합시킴으로써 발음을 쉽게 하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음 조화는 15세기에는 엄격하게 지켜졌으나, 그 뒤 차차 약화되어 왔다. 현대어에서는 의성어, 의태어나 어간과 어미의 연결 구조 등에 남아 있을 뿐이다.

동화 작용에는 모음 동화와 자음 동화가 있다. 모음 동화는 흔히 ‘ㅣ’ 모음 동화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살리어→살리여’나 ‘손잡이→손잽이’와 같이 ‘ㅣ’ 모음의 앞 뒤의 모음이 ‘ㅣ’ 모음을 닮아 ‘ㅣ’ 모음과 비슷한 정설 모음(前舌)으로 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자음 동화에는 비음화(鼻音化)와 설측음화(舌側音化)가 있다. 비음화는 비음이 아닌 소리가 비음에 동화되어 같은 비음으로 변하는 것이고, 설측음화는 설측음이 아닌 말소리가 설측음을 닮아 설측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들 동화 작용은 발음의 편의를 좇아 변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ㅣ’ 모음 동화는 일반적으로 표준 발음법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음 동화는 표준 발음법으로 인정한다.

이 밖에, 국어의 음운상의 특질로는 음상(音相)의 차이로 인하여 표현 의미가 달라지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국어의 자음 중에서 파열음 계열은 삼중 체계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하였거니와, 모음 체계도 양성과 음성으로 구별되어, 이들이 지니고 있는 음상의 차이가 어감(語感)을 다르게 만든다.

6차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상), 3. 언어와 국어 (3)국어의 특질 중에서 [되집기마당] 문장 부호 ㉠작은따옴표(‘ ’), 낫표(「 」) 가로쓰기에는 작은따옴표, 세로쓰기에는 낫표를 씁니다.

⑴ 따온 말 가운데 다시 따온 말이 들어 있을 때 씁니다. 예) “여러분! 침착해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⑵ 마음속으로 한 말을 적을 때 씁니다. 예) ‘만약 내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모두들 깜짝 놀라겠지.’ ⑶ 문장에서 중요한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드러냄표 대신 쓰기도 합니다.

예)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