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치운 2013. 10. 29. 11:06

한자(漢字)는 원래 우리글[韓字]이다

 

언어는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아마도 태초에 먼저 말이 있었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문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말과 글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면, 인류 역사에 문자가 발생하고 진화해온 과정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추측컨대, 문자는 아마도 먼저 그림문자의 단계를 거쳐 점차 추상화되고 소리의 변화와 결합하는 가운데 글자로서 완성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본래 음양일체로 두 개의 문자가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글만이 우리의 글이며, 한자(漢字)는 중국의 글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표의문자인 한자(漢字)는 원래 한자(韓字)이며, 표음문자인 정음(正音)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두개의 문자 가운데 하나였다.

한자에 담긴 우리 역사

 

한자(漢字)란 한(漢)나라의 글자라는 뜻이다. 이는 한나라 때에 이르러 해서라는 모양으로 완성된 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한족이 처음 만든 문자는 아니다. 한자의 원형은 우리 동방족(동이족東夷族)이 창제한 것이다.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큰 틀에서 볼 때, 한자는 처음에 그림문자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한자의 기원을 흔히 갑골문에서 찾는다. 갑골문이란 거북이나 소의 뼈에 새겨진 문자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로, 정사를 판단하기 위해 점을 칠 때 사용한 것이라 한다. 중국의 고대 은 왕조(BC 1600~BC 1122, 상商나라)의 도성이었던 유적지 은허에서 다량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갑골문이 처음 출현한 곳은 서요하 상류로 확인되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의 것으로서, 이곳이 동방족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갑골 점복은 처음에는 소 어깨뼈나 발굽뼈로 했으나 은나라 때부터는 거북 등뼈도 사용하였다. 이때 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자료를 제시한다. 나아가 갑골문 속에는 우리 민족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좬삼일신고좭 좬참전계경좭 좬천부경좭은 우리 삼성조 시대의 신교문화를 전해준 3대 경전에 속한다. 그런데 이 천부경이 갑골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더구나 고려말 충신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농은 민안부는 고려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으로 불린 충신으로서, 조선을 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도전 두문동 성수공사 5:328~9, 11:389 참조). 또 좬환단고기좭 좧태백일사좩에는 목은 이색 등이 천부경을 주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의 친구였으며 따라서 천부경을 이해하고 공유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갑골문의 모사본으로 알려진 이 천부경 글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에는 없는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것이 아니냐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자의 뿌리는 배달국 태고문자

 

그런데 은나라가 갑골문을 사용하고 있을 때, 단군조선에서는 전문(篆文)이라 하여 약칭 단전(檀篆)이라고 불리는 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이 당시 사용된 토기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자들이 최초에 창조된 것은 언제일까?

지금까지 동북아지역에서 갑골문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대 금문(金文: 고대 청동기, 토기, 갑골에 새겨진 원시 한자와 각화문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자취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갑골문이 은나라 때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림문자로 출발한 금문은 어쩌면 전자(篆字)에 비견되는, 전서(篆書)의 원형이었으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초의 금문연구서인 『금문신고(金文新攷)』(낙빈기, 산서인민출판사, 1987년)의 저자인 낙빈기(駱賓基)는 금문의 해석을 통해 신농과 황제 등 삼황오제시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였으며, 더욱이 이것이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였음을 고증하였다. 이런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중국내에서는 금서(禁書)로 분류돼 왔었다.

 

기록에 전하는 중국 고대문자의 시조는 5500년 전 동이족 태호 복희씨라는 설과 4700년 전 창힐이라는 설이 남아있다.

 

역(易)철학의 시조인 태호 복희씨는 배달국 제5대 환웅천왕의 막내아들이다. 복희씨는 중원으로 이주하여 동아시아문명을 실질적으로 개벽한 문명의 개조이며 한자의 뿌리가 되는 육서(六書)의 원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역사기록 의하면 그는 용봉(龍鳳)을 토템으로 하여 관명을 지었다고 하며 새로 만든 문자를 용서(龍書)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후대 황제 헌원 때 ‘창힐’이라는 인물이 새 발자국 모양을 따서 조적서(鳥跡書)를 만들었는다고 하며, 현재 그의 고향 섬서성 백수현 사관촌에 그 비석이 남아있다. 즉 복희씨의 용서와 창힐의 조적서 등이 후대에 갑골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秦)시황(BC221~210)이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문자를 통일하고, 이를 고대문자와 구분하여 소전(小篆)이라 칭했으며(앞에 밝을 명明자 참조), 다시 한대(BC140~ )에 이르러 한자(漢字,예서)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한자연구서이자 사전격인 고전 『설문해자(說文解字)』(BC100, 9353자)가 정리되어 나온다.

 

그러면 복희, 창힐시대에 동방 배달에는 어떤 문자가 사용된 것일까? 배달국 문자를 만든 인물은 초대 환웅천황 때 신지(神誌) 혁덕으로 전해온다. 그는 사슴발자국을 보고 처음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녹도글자가 경남 남해군 양하리 금산 중턱바위에 있다. 환단고기 대변설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후대에 더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된 바, 이것이 1942년에 <영변>지와 구한말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 실린 신지 전자(篆字)다. 배달국에서 만들어져 고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창성조적서비(鳥跡書碑)의 창힐문자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좬환단고기좭 좥삼성기좦에 의하면 창힐은 배달국 제14대 치우천황 때 문물을 배워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갑골문과 금문에 널리 전해오는 전자(篆字)는 기실 배달국의 녹도문이 전해져 여러 가지로 수정, 변형되어온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한자의 변천과정을 보면, 우리 것이 먼저고 우리가 중국을 가르친 스승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문명의 뿌리가 한민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도 모든 문물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가르치는 교육의 현장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배달혈통이 중국을 지배했었다

배달(倍達民族) 혈통이 중국에 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했었다.

- 중국의 삼황오제는 전부 동이족, 한국인이었다 ! -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와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때까지는 한족(漢族)의 존재가 중국에서는 없었음으로 중국의 상고사(上古史)는 동이족(東夷族)의 역사였고,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족이 북상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역사서(歷史書)인 사기(史記)의 저자(著者), 사마천(司馬遷)은 황제헌원 이전의 유명한 인물이 모두 동이족(東夷族)인 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기(史記)라는 책에서는 황제헌원(黃帝軒轅)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였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은 배달국(倍達國)의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 때, 강수(姜水,중국 섬서성)에서 소전(少典,벼슬이름)으로 있던 신농(神農) 아버지의 후손이 공손인데, 바로 공손의 후손이 황제헌원이다. 소호금천(少昊金天)은 배달국 시대에 산동 반도 지역에서 고도의 문명 국가를 통치했던 사람인데, 중국의 고사변(古史辯)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東夷系也)“”라고 하여 동이족(東夷族)임을 밝히고 있다. 전욱고양은 황제헌원의 손자이며, 제곡고신은 황제헌원의 증손자이다. 또한, 요(堯)임금은 황제헌원 및 제곡고신의 후손이다. 순(舜)임금은 고조선 단군 1세때, 고시(高矢)의 친형인 고수의 아들이다.

중국의 금(金)나라는 신라(新羅) 말 경순왕의 후손인 아골타(阿骨打)가 건국한 나라이며 김(金)씨가 세운 나라여서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 중국의 원(元)나라는 단군 4세 오사구의 아우 오사달의 후손인 홀필열(忽必烈)이 건국하였으며, 중국의 청(淸)나라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 그 후손이 다시 청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우임금(하夏나라의 시조). 탕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주周나라)도 역시 동이족(東夷族)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 서적인 서경(書經), 예기(禮記), 사기(史記)에 보면, 이들은 일상생활이나 대사(大事)를 집행할 때 언제나 삼신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지내며 생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禹)임금은 황제헌원의 후손이며, 전욱의 아들인 곤의 아들이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을 우리는 누루하치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누루하치의 성(性)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性)은 원래 김(金)씨에게서 분가(分家)해 나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도 당연히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性)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는가? 애신(愛新)각라(覺羅), 즉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청(淸)나라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 그 후손이 다시 청나라를 건국했는데, 누루하치의 성(性)인 애신각라(愛新覺羅)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강태공(姜太公)은 진주(晋州) 강(姜)씨의 후손으로 한족(漢族)에게 신교(神敎)를 전수해 준 사람이다. 강태공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을 만나 넓은 식견과 지혜로 문왕의 스승이 되어 문왕이 죽은 뒤에 무왕을 도와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일으킨 인물이다.

태호(太昊) 복희(伏羲)는 배달국(倍達國)의 5대 태우 환웅의 12번째아들이며, 우사(雨師)직책을 수행했다고 한다. 복희(伏羲)씨는 최초로 동양 철학을 체계화 했으며, 음양오행과 태극기의 팔괘를 처음 그려낸 사람이다. 주역(周易)의 역철학을 처음 만드신 분이며, 혼인제도를 처음 만들었고, 문자를 제정했다고 한다. 침구를 처음 시작해 침(針)을 만들었고, 금슬(악기)은 물론, 백초(百草)를 맛보아 의학을 처음 개발해 냈으며, 양잠을 처음 시작했다 한다. 양잠은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신 태호복희 때부터 시작했으니 바로 배달국 환웅시대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동이족은 상고시대부터 양잠을 시작해 각 시대의 조정에서 왕비들이 양잠의 책임자로 백성들의 양잠을 솔선 수범해 왔던 것이다. 특히 양자강 유역의 동이(東夷) 려(黎)족과 동이(東夷) 묘족의 양잠은 유명하여 그 전통이 지금의 항주 소주 인근에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태호복희는 풍산(風山) 출생으로, 풍(風)씨의 시조인데, 그 후 풍씨는 맥이 끊겨져 지금은 자손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중국 하남성 회양현에 그의 묘지가 있다. 중국인들은 동이족(東夷族)을 비하(卑下)하여 동이족인 태호복희의 형상을 사신인수(蛇身人首)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다고 한다.

염제(炎帝) 신농(神農)은 배달국(倍達國) 때의 사람이다. 신농(神農)씨는 온갖 풀맛을 보아 의약(醫藥)을 확립시켜 놓았으며, 백곡(百穀)을 정함으로써 천하만세에 농사법의 혜택을 많이 입혔다고 한다. 경농(耕農)과 의학의 창시자이며, 시장(市場) 제도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시장이란 사람들이 물물생산해서 교역을 하는 장소를 말한다. 염제 신농(神農)은 진주(晋州) 강(姜)씨의 시조가 되는데, 신농(神農)의 아버지는 배달국(倍達國)의 8대 안부연(安夫連) 환웅 때, 소전(少典,벼슬이름)으로 있었으며, 강수(姜水)의 감병관으로 임명받고 강수(姜水,중국 섬서성)에 정착했다고 한다. 호남성 영현에 그의 묘지가 있다. 중국인들은 동이족(東夷族)을 비하(卑下)하여 동이족인 신농(神農)의 형상을 인신우수(人身牛首)의 형상으로 그려 놓았다고 한다.

참고 자료:

1. 책 “개벽 실제상황”, 대원출판.

2. 증산도(甑山道)의 도전(道典).

3. 한민족의 뿌리와 단군 조선사, 김영주 지음.

4. 만화 환단고기, 제 1.2.3권.

5. 한국 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원.

6. 동양 문화사.

7. 한국 상고사의 쟁점.

자료 출처 : http://www.cyworld.com/yammo98